최근 수정 시각 : 2024-02-14 23:24:30

존 에머리치 에드워드 달버그 액튼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존 에머리치 에드워드 달버그 액튼
Rt. Hon. John Emerich Edward Dalberg-Acton
KCVO DL
파일:Picture_of_John_Dalberg-Acton,_1st_Baron_Acton.jpg
본명 존 에머리치 에드워드 달버그액튼 경, 제1대 액튼 남작, 제13대 그로폴리 후작
John Emerich Edward Dalberg-Acton, 1st Baron Acton, 13th Marquess of Groppoli[1]
출생 1834년 1월 10일
양시칠리아 왕국 나폴리
사망 1902년 6월 19일 (향년 68세)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테네르제
국적
[[영국|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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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신체 NNNcm, NNkg, 혈액형
가족 이름 (관계)
학력 학교명 학부명 (학과명 / 재학 여부)
종교 가톨릭
직업 역사가, 정치인, 작가
소속 자유당
1. 개요2. 생애3. 자유주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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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Power corrupts. Absolute power corrupts absolutely.
권력은 부패한다.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영국정치가, 작가, 역사가이다.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이 명언은 그가 한 성공회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왔다. 문장 전체를 옮기면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으며,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합니다."

국내에는 이 명언을 남긴 사람 정도로만 알려진 경향이 있지만, 사실 당대 제일의 역사가들 중 한 명으로,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도 19세기 역사학의 대표 격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현재까지도 영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역사학 학술 저널 중 하나인 The English Historical Review의 창립자이기도 하다.

신학적[2]으로나 정치적으로나[3] 자유주의 성향의 가톨릭 신자로도 알려져 있다.

2. 생애

이탈리아(당시에는 양시칠리아 왕국) 나폴리 출생이다. 단 본래 이탈리아 토박이는 아니었고, 슈롭셔에 기반을 둔 귀족인 액턴 가문의 일원으로서 프랑스를 거쳐 이탈리아로 이주한 집안의 후손이다. 이후 영국의 본가가 후손이 끊어지자 다시 본국으로 돌아와 토지와 작위를 계승하였다. 1859년 영국으로 귀국한 뒤 하원 의원을 지냈으며, 훗날 휘그당(휘그당은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본래 반가톨릭 성향의 개신교도들이 주축이 된 정당이었으나, 18세기 말을 기점으로 가톨릭 관용에 찬성하는 노선[4]으로 전향한다.)에 입당한다. 같은 당 출신인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총리와 절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69년에 준남작에서 남작으로 승작한 것도 역사학에서 쌓은 업적보다는 정치 활동에 의한 부분이 컸다. 이후 그는 후에 근대사 연구에 매진하여 많은 저서들을 남긴다.

전통적인 명문 가톨릭 귀족 가문이었으나, 아직 영국의 가톨릭 차별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차별을 받았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진학하려 했으나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거부당하기도 하였다.[5] 그러나 이후 역사가로서 명망이 높아지자 이번엔 오히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모셔가(1895년) 근대사 담당교수가 되었다.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여, 당시 가톨릭 교회의 보수화에 격렬하게 저항하였으며, 교황무류성 교리의 선포를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6] 그 결과 교회와는 상당히 불편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코 교회와 관계를 끊지 않았으며, 케임브리지 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에도 계속 미사에 참석하였다. 당시 1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에 반발한 신자들을 중심으로 구 가톨릭교회가 생겨났지만, 액튼 경은 여기 동참하지 않았으며, 본인 스스로도 "로마 교황청과의 일치는 나에게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교황청도 액튼 경의 반대활동에 대해 특별히 터치하거나 제재를 가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오늘날의 한스 큉과 비슷한 면모일지도.

1901년 들어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어, 이듬해 처가가 있는 독일 바이에른 왕국 테게른제에서 6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생애 마지막까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살았으며, 병자성사를 받고 사망했다.

3. 자유주의 사상

“자유는 더 높은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자유는 그 자체로 가장 높은 정치적 이상이다. 훌륭한 행정을 위해 자유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와 사적 삶에서 최고로 가치있게 여기는 대상들을 추구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해 자유가 필요하다.”

하이에크는 같은 자유주의자로서 위와 같은 구절을 인용했다.
[1] 성씨가 Dalberg-Acton이다. 국립국어원에서는 하이픈이 들어간 단어나 인명을 외래어로 수용할 때 무시하고 붙여쓰도록 정해 놓았다.[2] 당시 교황청의 반자유주의ㆍ반민주주의 성향과 교황무류성 등을 비판했다.[3] 자유당원이였다.[4] 이것의 결과물이 가톨릭 해방령[5] 당시에는 가톨릭 해방령 선포 이전이라 가톨릭 신자의 옥스브리지 입학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때 케임브리지대, 옥스퍼드대는 성공회 미션스쿨이나 다름 없었으며, 오늘날에도 케임브리지대, 옥스퍼드대 산하 신학부(영국 성공회 사제 양성 교육기관)라는 잔재가 남아있다.[6] 성공회 사제였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추기경직에까지 올라간 존 헨리 뉴먼도 교황무류성에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다만 액튼 경과 달리 온건한 입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