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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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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카
E. H. Carr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h_carr.jpg
본명 에드워드 핼릿 카
Edward Hallett Carr
출생 1892년 6월 28일
잉글랜드 런던
사망 1982년 11월 3일 (향년 90세)
잉글랜드 런던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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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머천트 테일러스 스쿨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
직업 외교관, 역사가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
History i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
1. 개요2. 생애3. 저서4. 관련 문서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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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외교관, 역사학자 겸 정치학자.

국내에는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로 유명하며, 이름을 이니셜로 지칭해온 전례 때문에 '에드워드 (핼릿) 카'보다 E. H. 카 [이에이치카]로 더 많이 불리고 있다.

2. 생애

2.1. 학창 시절

1892년 6월 28일, 영국의 중산층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영국 보수당을 지지했으나, 1903년(카 11세) 자유무역을 더 지지하는 영국 자유당 쪽으로 정치성향을 변경했다.[1] 머천트 테일러스 스쿨[2]을 나왔는데, 학생들 대부분이 정통 보수파였고 진보주의자는 경멸받는 극소수였다고 한다. 부모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카에게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교육시켰고, 이는 카의 명대사가 되었다.

1911년~1916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카는 한 역사학 수업에서 "페르시아 전쟁의 집필이 헤로도토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라는 색다른 시선에 감명을 받고, 역사철학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다.

2.2. 제1차 세계 대전

1916년~1936년,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병역면제가 되었고, 영국 외무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였다.
  • 1916년, 독일을 해상봉쇄하는 업무에 배정되었다.
  • 1917년, 러시아 내전 동향을 파악하는 업무에 배정되었다.
  • 1919년, 베르사유 조약 초안 작성에 참여했다. 프랑스가 독일에 과하게 배상금을 물리는 것에 비판했고, 독일-폴란드 국경설정에 있어서 독일 편을 크게 들었다.
  • 1920년~1921년, 프랑스 파리 영국대사관에서 근무했다.
  • 1922년~1924년, 영국에 돌아와 국제연맹 조직 구성에 참여했다.
  • 1925년~1929년, 라트비아 리가 영국대사관에서 근무했다. 부임 첫 해에 결혼하여 아들을 두었고, 연애-결혼-출산-육아기에 러시아 문학을 많이 매료되며 '자유주의적 견해를 재고'하게 되었다. 1927년에는 러시아 모스크바를 방문하기도 했다.
  • 1929년~1936년, 영국에 돌아와 외교관 신분으로 러시아, 소련에 대해 여러 책을 리뷰하고 주요 인물들의 전기를 작성하여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 표트르 브란겔 전기(1929),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전기(1931), 카를 마르크스 전기(1934)[3], 미하일 바쿠닌 전기(1936)[4] 등.
  • 1930년, 미국이 대공황에 스무트-홀리 관세법을 세우고 고립주의 및 경제블록화를 한 것이 독일의 호전성을 불러 왔다고 비판했다.
  • 1931년, 국제연맹 총회에서 대공황을 다시 비난하며 소련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 1932년, 소련의 계획경제를 옹호하는 입장으로 영국 내에서 토론을 했다.
  •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 이유가 베르사유 조약이 가혹하기 때문이라고 평가해 외무부 내에서 갈등을 시작했고, 3년 뒤 외교관 사임의 이유가 된다. 이후 1940년까지는 외무부 서기 일은 한다.[5]

1936년, 많은 발언을 쏟아냈다.
  • 나치 독일에 대해 영연방, 프랑스권 등이 인권을 운운하는 것은 위선이라 비판했다.[6]
  • 나치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는 것을 지지했다.
  • 나치 독일이 동유럽과 발칸반도에서 경제블록을 가지는 것을 지지했다.
  • 스페인 내전에 대한 국제사회의 불간섭을 촉구했다.
  • 프랑스/독일/소련의 기갑부대 강화를 집단안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전쟁을 위한 것이냐며 비난했다.
  • 국제연맹이 미국 우드로 윌슨의 이상주의에 비효율적이고 사당화되는 것을 비난했다.

1936년~1946년, 영국 애버리스트위스 대학교 국제정치학과 교수를 외교부 일과 병행했다.
  • 1936년~1939년, 채텀하우스(영국 왕립 국제 문제 연구소)에 참여하여 민족주의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 1939년, 책 '위기의 20년'에서 "1938년 뮌헨 협정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독일에 행해진 큰 잘못을 되돌리는 정당하고 도덕적인 시도"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자 그는 "확실히, 나는 눈이 멀었었다"고 주장을 철회하였다.[7]
  • 1939년 세계대전부터 강의를 안 해서(...) 교수직을 박탈하자는 주장이 1943년 특히 크게 있었으나 영향력이 커서 스스로 1946년 내려놓을 때까지 교수 직함을 유지하긴 한다.

2.3.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자, 나치 독일 옹호에서 급격히 소련 옹호로 입지를 바꿨다.[8] 이는 영국 정보부에서 뮌헨 협정에 삐친 소련을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다시 연합군으로 끌어들이는 데에 러시아 전문가로서 활동한 것이다.[9]

1940년 3월에 더 타임스 논설위원이 되는 것을 핑계로 정부 일은 완전히 그만두었다. 1940년 여름에 '소련의 발트 3국 합병을 지지'하는 논설을 싣는다. 너무 급진적 친소련경향을 보인다는 편집장의 지적에 외교정책 관련 글만 쓰도록 제한받는다. 하지만 편집장이 축출되고 1941년~1946년에는 부편집장 직위로 다시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1941년에 세계대전은 결국 연합군이 이기겠지만 전후 유럽은 사회주의 식으로 경제를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42년~1945년 채텀하우스(영국 왕립 국제 문제 연구소)의 의장 역할도 역임하는데, 여기에서도 전후 체제를 사회주의 유럽연합으로 구상하였다. 그가 여태 말해왔듯 '결함 있는 시장경제가 전쟁을 불러왔고, 국가주도 계획경제가 평화를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1942년에 전후 열강들이 식민지를 모두 독립시킬 것을 주장해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43년에 소련의 카틴 학살을 비난했다. 1944년에 그리스 내전에서 영국군이 그리스 공산주의자들에게 공격을 받았음에도 옹호해 비난을 받았다. 또한 영국이 후원하는 폴란드 임시정부를 불인정하고, 소련이 후원하는 폴란드 임시정부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4. 전쟁 이후

1946년~1952년, 소속 및 직함 없이 외교 관련 활동 및 발언을 이어 갔다.
  • 1946년, 책 '소련이 서구에 준 충격'에서 "개인주의에서 전체주의로의 추세는 어디에서나 명백하며, 마르크스주의는 성공적인 유형", "서구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지배계급이 착취하기 위한 도구, 소련의 민주주의가 진짜"라고 주장했다.[10] 또한 "전쟁에서 스탈린은 윌슨의 역할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대신하여 다시 한번 민주주의를 연합군의 전쟁목표로 강화하였다"고 했다.[11]
  • 1946년, 영국이 미국의 차관을 받아들이는 것을 두고 '영국 패권의 종말'이라고 했다.
  • 1948년, 영국이 미국과 친해지기보단 냉전의 중립국이 되길 바랬고, 소련으로부터 유고슬라비아가 독립하는 것을 본받자고 했다.
  • 1948년, UN(국제연합) '세계 인권 선언' 기초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 1951년, 영국 라디오에서 민주주의, 계획경제(뉴딜 정책, 마셜 플랜)에 대해 연설했다.

1953년~1955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베일리올 컬리지 튜터 겸 펠로우를 역임했다.

1955년~1982년 11월 3일, 별세까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 펠로우를 역임했다.
  • 1956년, 제2차 중동전쟁을 비난하는 성명을 냈다.
  • 1961년, A. J. P. 테일러의 책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에 추천사를 남겨 논란이 되었다.
  • 1966년, '민주주의 인도는 굶고, 사회주의 중국은 밥은 먹는다'고 논평했다. 영국 역사가 로버트 콩퀘스트(Robert Conquest)는 이 논평을 두고 대약진운동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 1968년, 신좌파가 일어난 68운동에 대해 호평한 몇 안 되는 영국 교수였다.
  • 1978년, '서구 경제는 미친 것이며 장기적으로 멸망할 것'이라고 논평했다. 같은 해 중국이 마오주의를 포기한 것을 '퇴행적 발전'이라 명명하고, 중국과의 무역이 늘 것을 예측했다.
  • 1979년, 논문으로 "소련의 상황에서 스탈린은 선의의 힘이였다."이라고 주장했다.[12]

3. 저서

그의 이름을 떨친 저작은 역사철학에 관한 서적인 "역사란 무엇인가"와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명저 "20년의 위기"지만,[13] 정작 그가 평생을 바친 연구대상은 역사철학이나 국제정치학이 아니라 소련사였다. 소련에 대한 수정주의 시각을 대두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소련 편향적으로 역사를 서술한다고 비판도 많이 받았다.[14] 이로 인해 군사독재 시절의 한국에서 부림사건을 비롯해 그의 책이 불온서적 취급을 받기도 했다.

3.1.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3.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 영국: 베르사유 조약에서 전쟁 발발에 이르는 외교 정책 연구[15] (1941)
  • 평화의 조건 (1942)
  • 민족주의와 그 이후 (1945)
  • 소련이 서구에 준 충격 (1946)
  • 소비에트 러시아의 역사[16] (1950~1978)
  • 혁명 연구 (1950)
  • 새로운 사회 (1951)
  • 두 세계대전 사이에 독일과 소련의 관계 (1952)
  • 역사란 무엇인가[17](1961)
  • 1917년 전후 (1967)
  • 10월 혁명 전후 (1969)
  • 러시아 혁명: 레닌부터 스탈린까지, 1917-1929 (1979)[18]
  • 나폴레옹에서 스탈린까지 (1980)
  • 코민테른의 황혼, 1930-1935 (1982)
  • 코민테른과 스페인 내전 (1984)

3.3.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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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관련 문서

5. 여담

  • 도전 골든벨 충주여고 편에서 골든벨 문제로 출제되었다.


[1] 1929년 이후 보수당-노동당 양당제가 되었지만, 1900~1918까지는 보수당-자유당 양당제였다.[2] 영국의 Top 10 엘리트 사립학교로, 10~18세에 입학한다. 한국으로 치면 대략 중~고교.[3] 카는 마르크스를 '지적이고 재능있는 작가'지만 '전적으로 파괴에만 전념한 재능'으로 평가했다. 그의 동기는 무분별적 계급 증오 뿐이며, 변증법은 횡설수설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개인보다 국가를 우선하는 시야는 칭찬했다. 후일 카는 이 전기 책이 '자신의 최악의 책'이라 평하고, 바쿠닌의 전기를 쓰기 위해 서론에 불과하다고 혹평했다.[4] 바쿠닌과 같은 급진주의자가 빅토리아 시대 영국을 방문해 둘러 보았다면? 이라는 가정의 소설을 작성했으나, 출판되지는 않았다.[5] 카는 독일을 베르사유 조약의 희생자로 히틀러를 경제적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지도자로 보고 "E. H. Carr—A Personal Memoir", New Left Review 네빌 체임벌린의 대독일 유화정책과 라인란트 재무장 등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려는 나치 정권의 노력들을 강력히 지지했다. - Laqueur, 113~114쪽. 데이비스, "에드워드 헬럿 카", 483쪽.[6] Haslam, The Vices of Integrity, 79쪽[7] Laqueur, 131쪽[8] 이를 두고 1942년, 반스탈린주의자 조지 오웰은 "카 교수는 충성의 상대를 히틀러에서 스탈린으로 바꾼 것 같다."라고 말했다. 카가 공산주의자라는 게 아니다. 당시 영국과 소련은 나치 독일이라는 적을 두고 같이 싸우고 있었고, 영국은 행여나 스탈린이 히틀러와 단독강화를 맺을까봐 노심초사했다. 카는 영국 외교부의 러시아 전문가로서 소련 측의 비위를 맞추면서 연합국 측에 붙잡아두는 일을 맡아했는데, 철저한 반스탈린주의자인 오웰이 카가 주도하는 친소정책을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참고로 당시 오웰의 반스탈린서적인 《동물농장》은 출판이 보류되고 있었다.[9] 영국과 카의 노력과는 별개로 나치 독일이 1941년 6월 독소전쟁을 벌이며 불가침조약을 파기해서, 소련이 다시 연합군에 돌아왔다.[10] Labedz, 101쪽[11] Huges-Warrington, 29쪽[12] Laqueur, 131쪽[13] 여기서 카는 이상주의자 우드로 윌슨을 통렬히 비난했다.[14] 후술하겠지만 이는 단순히 반공주의에 입각한 주장은 아니었다. 스페인 내전에 의용군으로 참전할 정도로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던 조지 오웰도 과도하게 스탈린을 옹호한다고 카를 비판했다. (다만 조지 오웰은 동물농장(소설)에서도 볼 수 있듯이 반 스탈린 성향이 짙은 것을 감안해야 한다.)[15] 1939년 9월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집필하였고, 1941년 9월에 논문의 형태로 출판되었다.[16] 1950년부터 1978년까지 총 14권이 출판되었으며 볼셰비키 혁명(3권), 공백기(1권), 일국 사회주의(5권), 계획경제의 기초(5권)로 구성되어 있다.[17] 유명한 역사철학서다. 부림사건에서 이 책의 정치성을 두고 논란이 되었다. 이는 변호인 영화의 흥행으로 이 책이 다시금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82년 역사란 무엇인가 제2판을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준비하고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서문만을 남긴채 사망하였다.[18] 위의 '소비에트 러시아의 역사'를 일반 독자를 위해 한권으로 편집한 책이다. 국내에도 출판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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