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18 19:49:21

존 터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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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나다의 경우 임기가 중간에 단절되었다가 다시 집권해도 처음 집권했을 당시의 대수를 유지한다.
역대 국왕 · 역대 총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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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제17대 총리
존 네이피어 윈드햄 터너
Rt. Hon. John Napier Wyndham Turner
PC CC[1] QC[2]
파일:John_Turner_1987_crop_(cropped).jpg
<colbgcolor=#700F1E> 출생 1929년 6월 7일
영국 잉글랜드 서리주 리치몬드
사망 2020년 9월 19일 (향년 91세)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
국적
[[캐나다|]][[틀:국기|]][[틀:국기|]]
재임기간 제17대 총리
1984년 6월 30일 ~ 1984년 9월 17일
직업 정치인, 변호사
학력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 (정치학 / 학사)
옥스퍼드 대학교 대학원 (법학 / 석사)
정당
서명 파일:존 터너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총리 취임과 조기 총선2.2. 단임 총리에서 야당 대표로
3. 여담

[clearfix]

1. 개요

제17대 캐나다 총리.

2. 생애

피에르 트뤼도 총리가 몬트리올 근교 산장에서 '눈 속을 걷는 산책'을 한 직후인 1984년 2월 29일 총리직 및 당대표직 사임을 발표하면서 1968년 이후 16년 만에 당대표 선거가 펼쳐지게 됐다. 트뤼도의 장기집권에 대한 피로감과 경제 상황의 악화, 퀘벡 분리주의 갈등으로 인하여 인기 하락을 겪고 있던 자유당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경선이었다.

이때 정계에서 물러나 있던 존 터너가 정계 복귀를 선언한 뒤 당대표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주요 상대는 장 크레티앵 에너지·광물·자원부장관이었는데, 당시 현역 의원이 아니었다는 페널티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정계를 떠나있는동안 트뤼도 총리와 거리를 두면서 얻은 차별화 이미지에 힘입어 장 크레티엥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2.1. 총리 취임과 조기 총선

총리 취임 직후 야당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피에르 트뤼도 총리가 마지막으로 단행한 200명 이상의 대규모 인사 임명을 철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추가 임명까지 진행하면서 여론의 반감을 샀다. 그리고 취임 단 9일 만인 7월 9일,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선언하며 승부수를 던졌다.

진보보수당 대표 브라이언 멀로니와 정치 전문가들은 터너가 초가을까지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 일정에 동행하며 전국을 순회한 뒤, 늦가을쯤 선거를 실시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터너가 기습적으로 조기 총선을 선언하자 다소 당황한 듯했으나, 선거전이 본격화되면서 진보보수당이 빠르게 자유당을 앞서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조기 총선 전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터너는 선거 초반부터 어색하고 시대에 뒤처진 듯한 인상을 줬다. 전임자 피에르 트뤼도 총리와 차별화를 시도하며, 오히려 진보보수당이 주장하던 적자 감축, 미국과의 관계 개선, 관료제 축소 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보수당 지지층의 결집을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정책 용어 실수, 성추행 논란[3] 등의 구설수에 오르며 선거를 이끄는 총리가 해서는 안 될 행동들만 골라 하는 모습이 이어졌다. 결정적으로 TV 토론에서는 멀로니에게 완패[4]하며 선거전의 모멘텀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 와중에 터너는 트뤼도와 거리를 두려 했으나, 이 전략이 오히려 자유당의 전통적 지지 기반인 퀘벡에서 지지율 급락을 초래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동안 자유당은 트뤼도의 개인적 인기와 진보보수당에 대한 전통적인 반감 덕분에 퀘벡에서 강세를 보였다. 그러나 터너가 트뤼도와 선을 긋자, 트뤼도 또한 터너를 공개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 선거 막판 터너는 트뤼도의 측근들을 다시 영입했지만, 이미 돌아선 민심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반면, 퀘벡 출신인 멀로니는 퀘벡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신헌법 협정을 약속하며 퀘벡 유권자들의 불만을 보수당 지지로 끌어들였다.

결국 1984년 9월 4일, 터너 총리는 역사적 참패 속에 당하며 정권을 잃었다. 보수당이 압승을 거두는 가운데, 자유당은 단 40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으며, 이는 2011년까지 자유당 역사상 최악의 패배로 남았다. 퀘벡에서도 자유당은 단 17석을 얻었고, 몬트리올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사실상 전멸했다. 터너 내각의 장관 11명이 낙선했으며, 이 선거 결과는 자유당이 1958년 이후 경험한 최악의 패배로 기록되었다.

2.2. 단임 총리에서 야당 대표로

선거 참패 이후 9월 17일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총리 자리에 오른 지 단 2개월 17일 만으로, 이는 캐나다 역사상 두 번째로 짧은 재임 기간이었다. 터너는 역대 최단임 총리인 찰스 터퍼, 터너의 후임 총리 중 한 명인 킴 캠벨과 더불어 의회 회기를 한번도 소집해보지 못한 총리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다.

그래도 터너 본인은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밴쿠버 콰드라 선거구에서 현역 보수당 의원인 빌 클라크를 3,200표 차이로 꺾고 당선되었다. 보수당 열풍이 거센 상황에서 터너의 지역구 승리는 예상 밖의 결과로 평가받았다. 1984년 총선에서 브리티시컬럼비아에서 당선된 유일한 자유당 의원이었으며, 온타리오 서부 지역을 통틀어도 단 두 명뿐인 자유당 의원 중 한 명이었다.

워낙에 역사적 참패를 기록한 직후라 터너의 인기도 바닥으로 떨어졌고, 당대의 정치 평론가들은 캐나다 자유당이 영국의 자유당처럼 쇠퇴해 사라질 수도 있다고까지 전망했다. 1958년 총선 당시도 자유당의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그때는 확실한 제1야당으로서의 입지는 유지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진보 성향 신민당도 30석을 차지하며 자유당을 바짝 뒤쫓았다. 당시 신민당 대표였던 에드 브로드벤트는 여론조사에서 터너는 물론 집권당 대표인 멀로니보다도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야당 대표가 된 터너는 오히려 이때부터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데 자유당은 상원에서의 강력한 의석 우위를 활용해 멀로니 정부의 법안 처리를 지연시키며 반격에 나섰다. 또한, '랫 팩(Rat Pack)'이라 불리는 젊은 자유당 의원 그룹 역시 터너를 지원사격하며 적극적으로 멀로니를 압박했다. 이 그룹에는 셰일라 콥스, 브라이언 토빈, 돈 부드리아, 존 눈지아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3. 여담

  • 1958년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를 방문한 마거릿 공주와 춤을 추면서 관심을 모았고, 이때문에 한때 두 사람 사이에 결혼설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터너 본인이 성공회가 아닌 로마 가톨릭 신자기도 하고 영국 왕실 역시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냉담했던터라 금방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 대학 시절 수영선수로 활동한 적이 있다. 그 경험 덕에 1965년에 우연히 같은 바베이도스의 같은 호텔로 휴가를 떠난 존 디펜베이커 前 총리가 휴가를 즐기다 파도에 휩쓸려 익사할 뻔한 위기에서 직접 물에 뛰어들어 디펜베이커를 구출해내기도 했다.


[1] Order of Canada[2] Queen's Counsel, 당시는 엘리자베스 2세 치하였다.[3] TV 방송 도중에 자유당 전국위원장인 이오나 캄파뇰로와 부대표인 리즈 생 마르탱트렘블레이의 엉덩이를 두드리는 장면이 포착되자 성차별적이고 무례한 행동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4] 멀로니 대표가 트뤼도와 터너의 인사 알박기를 비판했는데, 터너가 자신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고 변명하자 멀로니가 너는 No라고 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었지만 Yes라는 선택지를 고른 것이라고 일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