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4 18:24:04

졸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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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1] 졸본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성곽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음
[2] 졸본의 평지성으로 추정되는 토성
[3] 평양 천도 이전에 존재했던 평양의 평지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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卒本城 / 忽本城

1. 개요2. 명칭
2.1. 상세 기록
3. 위치

1. 개요

고구려 왕조의 첫 번째 수도.

시조 동명성왕 고주몽이 북부여에서 남하해 졸본 땅에 고구려를 세웠다. 이후 제2대 유리명왕국내성으로 천도하기까지 40여 년간 수도였다.

고구려의 역대 수도 3개 중 가장 존재감이 없다. 아무래도 수도로서의 역사가 썩 길지 않았던 것도 있고, 제대로 된 나라의 기틀이 잡히지 않았던 때의 수도였던 것도 있다. 그 때문에 역사에 무지한 일부 사람들 중에서는 고구려의 역대 수도가 국내성평양성 단 2개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많으며, 또한 당장 고구려 관련 역사책들이나 고구려의 역사를 배우게 될 때에도 졸본성은 아예 언급도 없이 그냥 넘어가거나 설령 언급돼도 아주 짤막하게나마 언급되는 경우가 상당해서 졸본성의 무존재감은 더 부각된다.

2. 명칭

오래된 지역답게 여러 명칭이 전해져 내려온다.
명칭 기록 비고
졸본(卒本) 삼국사기》, 《삼국유사
홀본(忽本) 광개토대왕릉비
흘승골성(紇升骨城) 위서 중국의 기록

2.1. 상세 기록

  • 졸본천(卒本川)
"난 경명(景命)[1]을 받들어 원기(元基)[2]를 세우고자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 중
그러나 급하게 궁실(宮室)을 만들지 않고 단지 초가집을 지어 비류수(沸流水) 위에서 거주하였다.
《삼국사기》 -시조 동명성왕- 중
《삼국사기》에 최초로 졸본이 등장한다. 앞서 동명성왕은 세 현자를 만나 신하로 삼은 뒤, 위의 선언을 하며 공식적으로 국가 건설에 나섰다. 하지만 북부여에서 도망쳐 나와 궁전을 지을 겨를이 안 되니 다만 졸본천 비류수 가에 초가집을 지어 임시로 거주했다고 한다.[3]
  • 졸본성(卒本城)
성곽(城郭), 궁실(宮室)을 세웠다.
《삼국사기》 -시조 동명성왕- 재위 4년(bc 34) 7월 중
비류국도 장악하고, 이런저런 기후도 나타나던 재위 4년째 되는 해, 드디어 성곽을 세우고 궁궐을 지었다. 이때 지은 성을 졸본성이라고 했다. 《삼국사기》엔 궁정(宮庭), 왕대(王臺)란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 졸본부여(卒本扶餘)
고구려는 즉 졸본부여(卒本扶餘)다.
《삼국유사》 <고구려조> 중
북부여에서 어려움을 피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중
《삼국유사》,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명칭. 《삼국유사》는 아예 "고구려가 졸본부여다!" 하고 단정짓지만 《삼국사기》는 "고구려 설화는 이런 게 있고 저런 것도 있더라~" 하는 것이 차이다. 어쩌면 고구려 시조는 졸본에 와서 바로 고구려라는 독립 국가를 세운 게 아니라 일시적으론 '졸본 지역의 부여국'이라는 부용국인 척 했을 수도 있다.
  • 졸본주(卒本州)
졸본주에 이르러 마침내 도읍하였다.
《삼국유사》 <고구려조> 중
《삼국사기》는 극초기엔 졸본천에 초가집을 지어 살았다고 하나 《삼국유사》는 졸본주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고 했다.
  • 홀본(忽本)
왕은 홀본 동쪽에서 용을 밟고 승천하셨다.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중
고구려의 국가 공식 표기라고 할 수 있는 광개토대왕릉비엔 '홀본'이라고 했다. 《삼국사기》의 '졸본'과는 앞의 ㅈ, ㅎ 차이가 있는데 이는 옛 지명이 전부 순우리말이었고 이를 한자로 음차할 때, 서로 대충 비슷한 한자들을 썼기 때문이다. 사실상 졸본 = 홀본인 셈.
  • 홀본성(忽本城)
(왕께서) 비류곡(沸流谷)에 있는 홀본 서쪽 산에 성을 쌓아 수도를 건설 하셨다.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중
역시 얼추 《삼국사기》와 비슷하다. 《삼국사기》도 졸본천에 온 뒤, 비류수 위에 살았다고 전하는데 비문 역시 비류곡의 홀본 서쪽에 성을 쌓았다고 했다. 이 성을 홀본성이라고 한다.
  • 흘승골성(紇升骨城)
(세 사람은) 주몽과 함께 흘승골성에 이르러 마침내 거주하였다.
위서》 <동이전> -고구려조- 중
《위서》가 말하길 흘승골성에 이르렀다 한다.
《삼국사기》 -시조 동명성왕- 중
중국 남북조시대 북위에선 동명성왕의 이름을 직설적으로 부르며 흘승골성에 도착해 거주했다고 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조상 우대를 위해 이름을 말하지 않고 왕호로만 부르는 것과 대조적이다.[4] 또한 졸, 홀본과 전혀 다른 흘승골성이란 지명을 언급하는데 어째서 이런 발음상의 큰 차이가 나는 지역명이 나오는지는 아직 미상이다. 《삼국유사》엔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올 때 승골성(升骨城)에 내려 왔다고 했다. 어쩌면 <해모수 설화>와 헷갈렸을 수도 있다.[5]

3. 위치

그래서 가장 중요한 졸본성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릉비는 대충 비슷한 지역을 소개하고 있다. '비류수(비류곡) 위에 있는 졸본(홀본).' 광개토대왕릉비는 조금 더 자세한데 홀본 서쪽에 있는 산에 성을 지었다고 한다. 이 산성을 현재 한•중 양국 사학계는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 성(遼寧省) 번시 시(本溪市) 환인현(桓仁縣)에 있는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보고있다.

그런데 왜 굳이 '홀본 서쪽 산'이라고 했을까. 광개토대왕릉비는 시조 추모왕이 '홀본 동쪽'에서 승천했다고 했다. 즉 홀본이 단순히 오녀산성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녀산성과 다른 성들을 아울러 불렀을 수도 있다.

또한 고구려의 전기 ~ 중기 수도는 평지성과 산성 두 성이 동시에 쓰였다. 이를 통해 현재의 하고성자토성(下古城子土城)이 오녀산성의 짝인 평지성으로 추측되고 있다.

하고성자토성과 오녀산성은 '혼 강'이라는 강을 따라 가면 서로 만날 수 있다. 하고성자토성은 초기 한성백제위례성과 같은 거대한 토성이며, 국내성과 비슷하게 네모난 모양이다. 현 랴오닝성 번시시 일대에 있다.

나합성(喇哈城) 역시 평지성으로 추측되고 있다. 자세한 건 오녀산성 문서 참고.

[1] 천명의 다른 말.[2] 원대한 기틀, 즉 국가를 의미.[3] 하술된 광개토대왕릉비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4]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고려의 아버지 뻘 되는 나라이니 역사서 체제를 <본기>로 잡고 매우 우대해 준 방면 중국의 《위서》는 이민족의 국가이니 <열전>으로 적고 대충 취급한 것이다.[5] 과거 한국어를 한자로 표현할 때는 음을 그대로 차용한 음차식 표현과 뜻을 차용한 훈차식 표현이 병재하고 있었다. '골'이라는 말이 고대 한국어로 마을이나 촌락, 또는 성읍을 의미하는 단어다보니 '졸본'이라는 이름은 뜻을 훈차한 표현이고, '흘승골'이라는 명칭은 음을 그대로 한자로 옮긴 졸본의 음차식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