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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3월 14일 ~ ([age(1973-03-14)]세), 전라북도 군산시 출생.[1]
1. 개요
트위터[2]전 SKT T1 감독, 전 온게임넷 프로리그 해설자. 전직 제8게임단 감독. 종교는 개신교.
2. 생애 및 활동
1973년 3월 14일 전라북도 군산시에서 태어났다. 군산고등학교와 전북대학교 체육교육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체육교육학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3]2.1. IS 매니저 시절
전북대학교에서 체육교육학을 전공했고, 스포츠 선수 케어를 위해 심리학도 겸해서 공부했다. 이를 바탕으로 2001년 창단된 아이디얼 스페이스에서 임요환의 개인 매니저[4]와 선수들의 심리 상담을 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때는 본인의 스포츠 심리학 논문 작성을 위한 연구 활동의 일환이었기에 팀으로부터 보수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때의 인연으로 통해 e스포츠의 비전을 알아보고 본격적인 게임단 감독 커리어로 나아가게 된다.2.2. 감독 시절
역대 e스포츠 감독 중 전문성을 띠는 첫 감독이다.비록 프로게이머 출신은 아니지만 스포츠 심리 전공으로 스타크래프트에 처음 접목시켜 지금은 당연한 것들을 많이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전공으로 처음으로 마주친게 임요환이라는 거물급 선수.
2.2.1. 동양 오리온 감독시절
IS 시절 송호창 감독 특유의 이벤트 뺑뺑이를 참지 못하고[5] 나온 임요환은 홍진호, 이윤열[6]와 함께 자신을 영입하려던 KTF의 제안을 거절하고, 자신과 함께 나온 선수들과 함께 오리온 창단을 선택한다.[7] 그리고 주훈도 오리온의 초대 감독이 된다.임요환은 e스포츠 사상 '최초의 억대 연봉 선수'가 되었으나, 오리온은 임요환의 개인 후원만 하려 했었다. 팀 차원의 후원은 숙소가 딸린 분당의 연습실[8], 운영비 월 400만 원이 전부였다. 그리고 오리온은 운영비에서 감독 연봉을 챙겨가라고 하였단다.
유일하게 연봉을 받던 임요환이 운영비를 보태도 빠듯했기에[9] 주훈 감독은 차마 연봉을 챙겨가지 못하였다. 오히려 자신의 사비를 보태고, 주변인들로부터 빚을 내기도 하고, 임요환 선수의 아버지로부터도 지원을 받으며[10] 팀을 운영한다.
이후 어렵게 선수들을 모으고 첫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인 2003년 KTF EVER Cup 온게임넷 프로리그에서 우승을 했다. 동양 오리온 스폰 이후 임요환의 Olympus배 스타리그 3위, 박용욱의 Mycube배 스타리그 우승,[11] 최연성의 TG삼보 MSL 우승 등 개인전 성적도 뛰어났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전공인 스포츠심리를 접목해 타이밍, 빌드 등 현재라면 당연히 여기는 요소들을 들여오기 시작했다.[12]
2004년 초 동양 오리온과의 스폰 재계약 과정에서의 이견[13]으로 전격적으로 스폰을 철회, 4Union(4U)으로 팀명을 개명했다가 2004년 4월 드디어 SK텔레콤의 한 관계자가 임요환이 e스포츠계의 마이클 조던 같은 선수라면서 설명했는데 윗선에서 혼쾌히 승낙을 하며 인수창단되어 SKT T1의 초대 감독이 된다.
이 와중에 4U로 2004년 neowiz Pmang Cup 온게임넷 프로리그에서는 부진한 성적을 내었지만, LG IBM 팀리그 우승, 최연성의 하나포스 센게임 MSL 우승,[14] 임요환의 KT-KTF 프리미어 리그 2003 준우승 등 여전히 4U의 저력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고 임요환 편을 보면 알겠지만 이는 SKT T1 창단의 든든한 뒷배경이 되었다.[15] 이 모든 성과는 본인과 선수들의 재능과 처절한 노력으로 이룬 결과이다.
SKT T1 창단 계약 하루 전 최연성과 박용욱이 너무 힘들어서 게임을 그만두려하자 말리며 팀원들을 모아서 이야기를 들으며 희망을 복돋운 뒤 다음날 아침 8시에 잤는데, 2시간 뒤 SK담당자에게 계약 승인을 받았다는 연락을 받고 바로 선수들을 깨워 데려가 계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2.2.2. SKT T1 감독시절
창단 후 SKT T1의 전성기를 이끈 감독으로, 2003~2004년에 프로리그 우승 1회,[16] 준우승 1회, 팀리그 2회 연속 우승, 2005~2006년에 프로리그에서 오버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면서 명실상부 최고의 용병술, 최고의 감독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모든 감독과 모든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었다.창단이 되면서 이전에 없었던 코치진들이 생기게 되고 본인이 이전에 했던 업무들을 분담하면서 생긴 시간에 타 팀들의 전력까지도 풍부하게 분석해서 엔트리를 짜고 선수들의 빌드 연구에 도움을 주게 되었는데 이는 오버 트리플 크라운에 기여하기도 했다.[17]
동양감독 때부터 거론된 외모[18]와 목소리, 하는 말까지 모두 카리스마가 넘쳤지만,[19] 반대로 몇 가지 사건들로 인해 권위적인 감독이라는 오명을 얻게 된다.
특히 SKY 프로리그 2004 1Round 결승 인터뷰 과정에서라는 발언으로 졸지에 당시 김현진 선수를 완전히 실력 없는 선수 취급했고[20], 팽팽한 접전 끝에 4:3으로 참패했다. 이후 김현진은 팀에 방출되었고, 이듬해부터 시작한 드래프트를 통해 eSTRO로 이적했다.
또 2006년 핵승엽 사건으로 다시금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임요환과 한승엽 경기에서 한승엽이 핵관광을 펼치면서 임요환이 패배했는데, 이후 다른 선수들이 나머지 경기에서 연달아 이겨 결과는 SK텔레콤 T1의 3:1 승리. 그리고 승리 인터뷰 때 주훈의 발언이 문제가 되었다.
STX SouL 한승엽이 핵을 쐈을 때 솔직히 화가 났다. 자신이 유리한 상태에서 빨리 끝내주는 것도 매너라고 생각한다.
페어플레이 정신에 어긋난 행동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선수들에게 앞으로 한 세트라도 내줄 경우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공언했다.
이 발언 이후 주훈은 불쾌훈이라는 별명을 얻고야 만다.[21] 이 말이 문제시된 건 내로남불로 비쳐진 이유가 큰데, 최연성이 한창 날아다니던 시절 심리전 차원에서 인터뷰에서 도발적 멘트를 하거나 게임에서도 관광경기를 했었는데 그런 선수가 있는 팀 감독이 관광경기 당했다고 불쾌함을 표시했으니 설득력이 있을 리가... 아무튼 주훈은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 초대 우승, 팀리그 2회 연속 우승,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 역사상 유일무이한 오버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며 많은 영광을 누렸다.
하지만 임요환이 군대를 간 SKY 프로리그 2006 후기리그부터는 점점 팀이 개막장화가 되었다. 창단 이전부터 팀의 정신적 지주이자 맏형인 주장 임요환의 역할이 컸어서 그 공백이 컸다는 점, 후기리그부터 선수들의 세대교체를 염두에 두고 신인들에게도 기회를 줬어야 했으나, 주훈은 팀 창단 이후 성과에 너무 연연해서 기존 선수들의 기용에만 지나치게 신경썼다는 점,[22] 주훈 본인도 그렇고 오버 트리플 크라운 달성 이후 코칭 스태프들의 분위기가 창단 초기보다는 다소 해이해졌다는 점 등이 있었다.[23]
또한 주훈의 능력은 엔트리 예고제 이전에는 본인의 전공을 살려 상대팀의 엔트리를 예측해 맞추고[24] 그에 따라 맞춤형 엔트리를 낼 때 극대화되었으나,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 전기리그부터 엔트리 예고제가 시행됨에 따라 주훈의 이러한 장점이 사라져간 것도 원인이 있었다.
이후 조바심이 난 주훈 감독이 프로리그에 좀 더 팀 운영의 비중을 두고, 선수들에게 양 방송사 개인리그 중 하나를 골라서 출전하게 하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정책을 시행하였으나, 그 결과는 더 안 좋아졌다.[25]
김성제와 도재욱이 훗날 인터뷰나 강민과 박태민의 방송에서 술회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팀이 계속 우승을 거듭하자 코칭스태프와 선수들 모두 자만함에 빠졌고, 결국 그로 인해 프로리그 성적이 부진해졌다고 한다.[26] 2007년에는 선택과 집중의 실패로 프로리그 성적 부진이 계속되자 이후 해임을 예상한 주훈 감독은 팀 운영을 내팽개치고 밖으로 돌아다녔고, 서형석 코치는 소파에서 잠만 잤다고 한다.[27]
결국 새로 부임한 김성철 단장이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 후기리그가 끝난 직후인 2008년 1월 23일, 주훈을 포함 코칭스태프 전원(서형석 코치, 이효민 코치)을 경질시키고 박용운 감독 대행, 박용욱 코치 - 최연성 플레잉 코치로 코치진을 새로 꾸렸다.[28][29]
2.3. 해설자 시절
해임 직후 온게임넷 해설자로 활동하였는데, 본인조차도 실패했다고 생각할 정도의 흑역사가 되었다. 만약 e스포츠의 다른 분야나 협회 간부의 자리로 뛰어들었으면 당시 주훈의 권위만큼은 어떤 인물보다도 최고였으니 그걸 잘 살려서 제2의 전성기를 만들 수도 있었지만, 뭔 생각인지는 몰라도 해설자로 전향하며 남아있던 권위까지 땅에 떨어지게 된다. 사실 해설 첫날 반응은 약간의 논란이 있긴 했어도 '그래도 가능성이 있으니 지켜보자'는 반응이 대다수였는데, 문제는 해설 실력이 전혀 안 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고 한다면은 테란이 유리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나지 않습니까?
- 그~ 렇다고 한다면 은 고인기 아니 고윤기, 고잉훼, 고잉규 선수가.. 이 경기~ 를...
그래도 같은 식구였는데 이름마저 버벅거리시면... - 아..! 이게 어떤 뮈탈리스크~ 입니까? 다... 름이 아닌 이제~ 동 선, 수의 뮈~탈리스트가 컨트롤이 좋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시~나브로, 시나브~로...
- 이제~~~ 도 선수의
사실 주훈 본인도 '감독직 제의가 있다면 감독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다. 부진을 이유로 해고되었다고는 했지만, 어찌 되었든 현재까지 스타판에서 가장 많은 것을 이뤘던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타 팀들의 오퍼가 없는 점은 다소 의문. 당시의 경질이 온전히 주훈의 책임이라기보다는 T1 프론트가 팀의 리빌딩을 기다려주지 않은 것이라는 의견도 있는 반면 그 분의 카리스마가 함께하지 않는 주훈이 정말 팬들의 평가만큼 명감독인지 의심하는 목소리도 있어왔다. 스타크래프트 갤러리에서 이지훈의 '발트리'에 지친 KTF 매직엔스의 팬들이 "피파 선수 자르고 주훈이나 좀 영입하면 시청자도 좋고 팀도 좋잖아?" 하는 반응을 종종 보이기도 했다.
특이하게도 주훈이 해설하는 날에는 여러가지 사건이나 명경기가 나왔다. 스갤 등에서 케텝토스, 티원저그와 함께 대표 3약체로 손꼽히던 웅진테란 임진묵이 KTF를 올킬한 사건의 해설자가 주훈이었으며, 이후 주훈이 해설하면 명경기가 나오거나 사건이 터졌다. 그런데 해설이 그 경기력을 포장하지 못하면서 묻힌다.(...)
2009년 3.3 혁명 기념일도 주훈 해설이었는데, 하필 이날 디시 전체가 DDOS 공격으로 마비되어버렸다. 과연 사건을 부르는 남자 주훈.
그리고 결국 4라운드부터는 자주 캐리어 가야 한다는 사람과 교체되었고, 주훈은 영원히 해설자로는 돌아오지 않았다. 덕택에 스타크래프트 갤러리에서는 한동안 주훈의 향후 거취에 오지랖 넓은 걱정을 해주는 글이 대세를 탔다. "짜장면을 시켰는데 주훈이 배달을 오더라", "공원에 갔더니 주훈이 비둘기 먹이를 주고 있더라", "벙키 주훈이더라" 등등. 소위 주훈드립은 날이 갈수록 유행했다. 종국에는 낚시글이 양산되었는데 "오늘 김택용이 하도 병신같이 게임을 해서 봤더니" 따위로 제목을 붙여놓고 "김택용이 아니고 주훈이더라" 따위로 결론을 내리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그마저도 잊힌 듯했다.
나중에 본인이 밝힌 바에 의하면 T1에서 해임될 시점이 3월이라 9개월분의 잔여 연봉이 있었는데, 타팀 감독으로 부임 시 주지 않겠다고 하여 해설을 맡은 것이었다고 한다.[30]
2020년 주훈은 한 방송에서 해설 당시의 버퍼링 문제에 대해서 '초반 빌드가 나오면 이미 누가 이길지 (자신이) 다 아니까 3분만에 승리 예측이 끝나서 할 말이 없어 버퍼링이 걸렸다'는 신박한(?) 해명을 하였다. 할 말이 없는 것과 말을 버벅대는 것은 다른 문제거니와 초반 빌드에 따른 게임의 유불리란 절대적이지 않으며, 경기가 어떻게 흘러가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뒤바뀔수 있는 요소이다. 해설자는 이와 같이 시시각각 변하는 경기의 흐름과 전개 양상을 파악하고 이를 알기 쉽게 설명하는 역할이지, 경기 결과를 예측하는 도박사가 아니다. 오히려 과거 해설자로 활동할 당시의 인터뷰에서 주훈은 '할 말은 많은데 입이 따라오는 속도가 느려 버퍼링이 걸렸다'라는, 나중의 주장과는 정반대되는 이야기를 한 바 있다.
애초에 감독 시기, SKT T1이 오버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에도 주훈은 게임에 대해 제대로 이해한다고 보기는 어려운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T1 시절 함께 몸담았던 김성제의 증언에 따르면, 에이스 결정전에 출전하는 임요환에게 시간형 섬맵[31]에서 4드론을 조심하라(..)고 하는 등 엉뚱하고 터무니없는 얘기를 많이 했다고 하며, 이후 해설자가 되고 나서도 어휘력 문제에 앞서 해설자에 걸맞은 게임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도나 안목, 분석력 등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그가 감독 생활을 거치며 초반 빌드의 상성과 유불리의 개념 정도는 이해했을지 몰라도, 게임이 흘러가면서 전개되고 변화하는 경기 양상에 대해 제대로 짚어내고 이를 조리있게 전달할 능력은 없었고, 결국 1년만에 해설자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2.4. 이후
2009년 9월 10일, 득녀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2010년에 MBC GAME이 새봄맞이 특집 신규 프로그램인 제13게임단의 감독으로 선임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사회인 게임단 감독이라 사람들에게 할 일 없이 이런 거에나 나온다며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김형인에게는 "감독님은 모자 벗으면 남자 6명 중 6위"라는 굴욕적인 한 마디까지 듣고 말았다.[32]해설에서 물러난 이후 실제로 목격한 사람의 증언에 의해 마포 모처에서 스크린 골프장을 경영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주훈이 골프 프로 자격증을 가지고 있기에 골프 개인 코치도 겸했다는 모양이다.
2010년 10월 10일, 임요환이 스타크래프트 2로 전향함과 동시에 SKT T1에서 정식으로 탈퇴했음을 발표함으로써 다시 주목받은 적이 있었다. 임요환이 팀을 창단할 경우 임요환과 친분이 두터운 그가 감독으로 올 가능성이 높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알다시피 SlayerS가 창단 이후에도 감독직을 맡는 일은 없었다.
2.5. 제8게임단 감독 및 Kespa 운영팀장 시절
그리고 2011년 11월 4일, 케스파에서 위탁 운영을 하기로 결정된 제8게임단[33]의 감독으로 영입이 확정되었다. 이로서 약 2년만에 이스포츠판으로 복귀했다.허나 시즌이 끝나고 1R가 끝난 상황에서 팬들의 적어도 2등이라는 각종 설레발들이 무색하게 제8게임단의 성적(2승 5패)이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이에 처음에는 명장의 귀환이라며 찬양하던 분위기는 많이 사라지고 발트리라고 까이는[34] 여론이 많아졌다. 옹호파는 아무리 에이스들이 모였어도 선수층이 얇아 다른 팀보다 엔트리가 간파되기 쉽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비판 여론이 더 많았다.
아듀 MBC에 나와서 김철민 캐스터와의 우정을 과시했다. 스폰이 없을 때 기아 프라이드에 8명이 구겨져 탔던 에피소드나[35] 어떤 더운 곳에서 방송했던 마모씨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무엇보다 팬들에게 드러나지 않는 프로게이머 세계에 대해서도 썰을 풀었다.
8게임단이 첫 프로리그를 7위로 마무리하게 되고, 이후 주훈은 8게임단의 창단을 돕기 위해 KeSPA 운영팀장으로 직책을 잠시 변경한다고 한다. 그 사이 감독 역할은 한상용 코치가 수석코치로 승격됨과 함께 맡고, 주훈은 스폰이 잡히면 복귀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후 진에어가 8게임단 스폰[36]을 맡게 되었는데, 주훈은 온데간데 없고 한상용이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2.6. 이후 근황
2015년 6월 13일, 이윤열의 개인 방송에서 이승원이 밝힌 바에 따르면 주훈은 8게임단 감독을 맡기 이전처럼 다시 스크린 골프장을 운영 중이라고 한다. 골프 실력이 준프로급이라고.이후 2016년 3월, 정수영 감독의 필리핀 유학원 사업에 기술 고문으로 참여하는 것이 알려졌다. 게임을 통한 힐링을 겸하는 유학원인데, SKT와 KTF의 최전성기를 이끈 라이벌 감독들의 만남이라 이스포츠 팬들 사이에서는 화제가 되었다.
2017년 1월 정수영 감독이 강민의 방송 '그때그샏기들'에 나왔을 때 시청자가 주훈 탈모제 판매중이라고 하자 "아닌데.. 훈이 탈모제 치료 판매는 아니고 일 열심히 하고 살고 있는데.."라고 언급 후 "훈이는 부르면 온다. 같이 방송 나오면 좋겠다"고 언급해서 근황이 나왔다.
그리고 2019년, 정수영 감독과 동업으로 e스포츠 학원을 차렸다. 학원 이름은 '2SPORTS ACADEMY' # 그러나 오버워치 및 e스포츠 팬덤에서는 Team LW의 보복성 방출과 선수 착취의 주범인 지영훈을 강사로 영입했다는 이유로 정수영과 함께 비판받고 있다. # # 2020년에는 코로나로 학원의 운영이 부진했다.
결국 폐업한 듯하다.
스타 관련 방송에서 그와 연관이 있는 전프로게이머들에 의해 종종 그의 이름과 그에 대한 여러 썰들이 종종 언급되곤 한다. OGN 라이브 방송 온동회에 출연한 김성제에 따르면, 주훈은 감독 시절 게임을 전혀 몰랐다고 하며, 일찍이 그가 초단위로 빌드를 짜고 연구했다고 주장한 것도 사실은 자신이 연구한 내용에 대해 선수들을 불러모아 브리핑을 한게 아니고 혼자 책에다 3분 배럭, 4분 엔베와 같은 식으로 선수들의 빌드를 그 의미도 제대로 모른채 무지성으로 시간만 재서 적었던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이는 일종의 컨셉용 퍼포먼스(..)였으며 당시 주훈은 그런 식으로 보여주기 위한 쇼를 많이 했다고 한다. 한편으로 게임단에 행사 등이 잡혔을 때는 이에 대한 선수들의 부담을 줄여주려고 노력하기도 했다고 한다.
2024년 T1의 2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에 출연했는데, 머리를 심은 건지 풍성한 머리로 등장했다. #
3. 각종 기록
-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 최다 우승 감독(5회) - KTF EVER Cup 온게임넷 프로리그, SKY 프로리그 2005 전기리그, SKY 프로리그 2005 후기리그, SKY 프로리그 2005 그랜드 파이널, SKY 프로리그 2006 전기리그.
[1] 현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2] 2022년 현재 무슨 이유에선지 트위터 운영원칙을 위반한 계정이라며 일시 정지된 상태이다.[3] 학술연구정보서비스 홈페이지에 그의 학위논문이 검색되지 않을 뿐더러, 서울대학교 도서관 홈페이지에도 그의 학위논문이 소장되어 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석사과정 졸업이 아닌 수료가 최종 학력일 가능성이 농후하다.[4] 감독은 따로 송호창, 김양중, 조정웅이라는 3명의 감독들이었다. 그러나 저땐 총괄로 맡은건 송 감독이고, 나머지는 김 감독과 조 감독이 나눠서 맡았다. 거의 개인 매니저 같은 위주의 감독들이라고 보면 좋겠다.[5] 그야말로 절정을 찍은 게 2001년 SKY, 2002년 SKY배 대회...[6] 송호창이 팀 운영비가 부족해서 홍진호랑 임대형식으로 보냈다. 이윤열은 거기서 처음으로 스타리그 우승 후 더 활동하다 임대복귀한다. 홍진호는 준우승을 기록 나중에 송감독에게 벗어나면서 KTF의 프랜차이즈가 되어버리고 은퇴를 한다.[7] 온게임넷을 운영하던 온미디어의 모회사이며, 오리온은 후에 KOR 팀을 인수하여 온게임넷 스파키즈를 창단한다.[8] 실평수 9평 정도의 오피스텔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6명 선수와 합숙하며 연습까지 해야할 정도로 열악했다고 한다.[9] 그나마 대기업 팀인데 선수들이 스폰을 받는 기업의 과자를 사먹어야하는 게 말이 되냐며 드러누우면서 운영비 지원을 조금 늘렸는데도 여전히 빠듯했다고 한다. 임요환이나 최연성, 박용욱, 김성제의 팬카페 사람들이 집밥 반찬들을 선물로 보낸 적도 있었다.[10] 2002 WCG 들어가기 전 주 감독에게 아들을 케어 해달라는 요청을 한 적이 있었다.[11] 이땐 8강에서 팀킬전을 했으나 8강 풀리그 끝에 박용욱이 이겼다. 만약 한빛소프트배처럼 4강에서 만났더라면 박용욱 입장에서는 곤란했다.[12] 일부는 시즈모드 승리도 임요환과 주훈의 연구 산물이었던 것이다.[13] 팀 내 선수들과의 재계약 문제. 특히 숙소는 둘째치고 거금으로 임요환만 잡으려고 했다가 팀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임요환 및 타 선수들과의 계약문제로 철회되었다. 애초에 동양이 임요환을 계약했던 이유가 스타리그 우승이라는 핵심이었다. 그러나 박용욱과 최연성이 우승하면서 뭔가 어정쩡하게 흘러간 것이 초반에 기정사실이 된 것이고, 거기다가 저 두 선수는 애초에 영입할 의사가 없었는데 전부 임요환이 팀으로 끌어들인 선수들이였다는 것.[14] 당시 타팀 선수들 태반을 관광버스 태운다 라는 말이 허언이 아닐 정도의 리즈시절이었던 건 덤.[15] 창단 전까지 당시 여러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기도 해서 7,500만 원의 빚이 생기기도 했다. 자신의 지인은 물론이고 임요환 아버지에게도 빌렸다고. 후에 SKT T1 창단 직후 첫 연봉으로 다 갚았다고 한다. 2003년과 2004년의 물가를 생각한다면 당시 프로 스포츠 선수들 평균 연봉이 1억~2억 사이이고 슈퍼스타급 선수들이 3억이었음을 감안하면 대단한 업적을 이룬 거다.[16] 물론 T1 이름으로 우승한 시기는 2005년 쯤이었다.[17] 동양 때도 그랬지만 주훈 감독 이전에는 빌드나 타이밍 개념은 센스있는 프로게이머들의 전유물에 불과했고 공식화되지는 않았는데 주훈 감독부터 이를 확립한 것이다. 프로게이머 출신의 감독도 김가을 이전에는 없었어서 감독들 사이에서도 빌드나 타이밍 등은 거의 희소한 상태이다. 감독의 전문성의 역할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이 주훈 감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타 팀이 동양 때부터 프로리그, 개인리그 성적이 좋은 SK T1을 벤치마킹하느라 빌드나 타이밍은 센스있는 프로게이머들의 전유물이 아닌 프로게이머라면 누구나 당연히 가져야하는 능력이 되었고 게다가 타팀의 창단 효과, 일부 프로게이머들의 코치 및 감독 전향 등과 맞물려 스타판의 경쟁이 치열해지게 되었다.[18] 선글라스와 적당히 잘 벗겨진 머리 덕분에 매트릭스에 나오는 스미스 요원 닮았다는 이야기도 나왔었다.[19] 살벌한 눈빛으로 초시계로 빌드 타이밍을 잰다던가, 액션이 크지 않고 세리머니 같은 것도 없던 초창기 프로리그 때 주먹을 불끈 쥐고 붕붕 휘두르는 등.[20] 제노스카이는 7경기 맵이었다. 또한 김현진은 이 대회에서 한 경기도 뛰지 못한 상태였다.[21] 나중에 프로리그 2008 올스타전에서 주훈은 박용운에게 다시 한 번 불쾌함을 시전했다. 이때 박용운의 ID는 주훈 해설보다 머리숱 많음.[22]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훈 시절의 신입으로 들어온 도재욱, 정명훈이 이후에 T1의 거목 중 하나가 되었다는 점이다.[23] 어떻게 보면 팀의 계속되는 우승으로 인하여 코칭 스태프 포함 선수단 전체에 번아웃이 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데, 프로리그 초대 우승의 역사를 새로 쓰면서, 팀리그 2회 연속 우승에 프로리그 역사상 유일무이한 오버트리플 크라운이라는 새로운 목표달성 및 역사를 기록하게 되면서 더 이상의 목표 의식을 찾지 못해 이로 인한 번아웃이 왔을 수도 있다는 것. 당장에 스타1 선수와 코치를 거쳐 리그 오브 레전드 종목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롤드컵 2회 우승, 1회 준우승의 엄청난 업적을 이루어낸 최우범 감독도 이와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리그오브레전드 종목에서 가장 규모가 큰 대회라고 평가받는 롤드컵 우승 이후 선수들의 멘탈 케어 및 프로의식을 제대로 잡아주지 못하여 다음해 최악의 흑역사를 쓴 사례가 분명히 있는 만큼, 당시 주훈 감독, 코치진들의 선수 케어 능력도 문제가 있었지만, 당시 선수들의 프로의식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이러한 총체적 난국의 결과로 SKT T1은 2006 후기리그 7위, 2007 전기리그 8위, 2007 후기리그 10위의 T1 최악의 흑역사를 기록하면서 몰락하고 만다.[24] KTF 매직엔스 시절의 정수영 감독 역시 엔트리 적중력은 높았다. 문제는 선수들이 정작 플레이오프 때 말아먹어서 그렇지.[25] 대표적으로 김성제와 같이 팀 창단부터 개인리그는 팀을 위해 희생하고 프로리그에 집중했던 선수에게 타격이 갔다. SKT는 임요환, 최연성 등을 제외하고 칼같이 성과급이 적용되는데 그 기회가 줄어들었기 때문. 프로리그 출전 기회를 이전처럼 연습실 성적에 의하지 않고 개인리그 성적에 의해 주도록 했는데, 연습실에서는 잘 했으나 개인리그 경험이 없거나 좋지 않은 선수들에게는 치명적이었다.[26] 타 팀들은 T1을 보고 창단에 그렇게 노력해 소속 선수들 중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하기 시작해 결국 창단 효과를 보았다는 점, 팀 운영과 관련해 주훈이 확립한 엔트리, 빌드, 타이밍 거기다가 드래프트 세대들의 등장 등이 경기 등을 통해 타 팀이 벤치마킹해갔다는 점 등으로 점점 프로리그는 상향평준화가 되어갔다. 게다가 기존의 게이머의 기량까지 쇠퇴까지 더 해졌으니 이러한 자만은 치명적이었다. 임요환이라도 있었으면 분위기라도 나빠지지 않았을 텐데 임요환이 군대에 가서 없으니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되었다.[27] 이후 김성제는 주훈의 퇴진 이후 팀 내부에서 정치싸움이 시작됐고 자신이 대권을 잡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 코치는 김성제를 비욘세의 콘서트 관람을 보러갔다는 헛소문에 숙소 무단 이탈했다는 언론기사로 매장시키려 했고 팀 내부에서 차마 밝힐 수 없는 큰 사건으로 코칭스태프 전원 경질 결정을 내린 거라고 한다. 이 당시 최연성과 박용욱은 뜬금없이 서로 갈등을 빚었으며, 김성제는 만약 임요환이 팀에 있었으면 이런 일들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사족으로, 김성제는 이 당시에 자신을 매장시키려고 했던 모 코치는 박용운 코치가 아니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름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이었다고만 밝힌 것은 덤.[28] 다만 최연성은 이후 손목 부상의 여파로 얼마 안 가서 은퇴를 선언했었다. 이후에 은퇴를 번복하고 다시 플레잉 코치로 돌아갔다가 결국 다시 코치에만 전념하게 되었지만... 이게 가능했던 것은 당시 최연성은 협회에서 은퇴 공시가 되지 않았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협회에서 은퇴 공시가 될 경우엔 1년간 자격을 재취득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29] 당시 T1은 박용운 감독 대행으로 부임한 첫 시즌인 2008 상반기 시즌에는 2008 시즌 시작 전이었던 2008년 2월에 리빌딩을 목적으로 핫플레이어였던 김택용을 2억에 현금 트레이드를 할 정도로 선수 영입에 크게 무게를 두었지만, 김택용은 당시 7승 8패로 이름값에 걸맞지 않은 모습을 보인 데데다 개인리그에서도 Arena MSL 2008은 조별리그에서 1승 2패로 광탈, 박카스 스타리그 2008에서는 4위, EVER 스타리그 2008에서도 16강 조별리그에서 광탈하는 등 프로리그와 개인리그 모두 저조했고, T1의 정규시즌 성적은 2위로 마무리되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온게임넷 스파키즈에게 에이스 결정전 끝에 패배하여 광안리 직행에 실패하였고, 처음 1년 단위 리그로 시즌이 진행된 신한은행 프로리그 08-09에서는 시즌 초반 최악의 부진을 보이며 공군 바로 윗순위인 11위로까지 쳐졌지만,[37] 그 직후에는 위너스 리그 기간 동안의 T1의 영원한 정신적 지주이자 e스포츠의 아이콘인 임요환의 제대 이후 팀 합류로 시너지가 점점 살아나기 시작하면서 시즌 막판 정규시즌 1위를 탈환하여 광안리 직행 성공 및 3년 만에 광안리 제패에 성공하게 된다. 앞서 김성제가 당시 T1이 부진하였을 당시 분위기를 언급하였을 때 임요환이 팀에 있었으면 선수단과의 불화 및 감독 및 코칭스태프와 선수들과의 융합 문제가 일어나지 않고 원활히 잘 이끌어나갔을 것이라고 언급했었는데, 실제로 임요환이 친정팀인 T1에 복귀한 이후로 성적 면에서 점점 살아나는 모습을 보이다가 끝내 5시즌 만에 프로리그 우승에 성공하면서 임요환은 T1의 핵심 선수뿐만 아니라 감독 및 코칭스태프와 선수단의 중심에서 분위기 조율 및 중심을 잡아주는 정신적 지주 그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을 아주 잘 보여준 결과인 셈이다.[30] 한국의 KBO 리그도 마찬가지 관례가 있으며, 선동열이 삼성 라이온즈에서 해임되었을 때, 삼성 측에서는 계약기간(5년인데 1년만 마치고 삼성그룹에서 이학수 라인 숙청 당시 김응용과 함께 해임됨)동안 연봉을 지급하다가, 선동열이 KIA 타이거즈 감독으로 부임하자 중단한 바 있다.[31] 4인용 맵인 알카노이드로, 지상으로 공격을 가려면 상대 진영으로 도달하는 길목을 막고 있는 중립 건물들을 파괴해야 한다.[32] 그런데 솔직히 머리가 별로 없긴 하다. 예전에 2007년 후기 시즌 중반에 SKT T1이 하도 심하게 부진해서 사정이 있었던 전상욱을 제외하고 단체 삭발을 한 적이 있는데, 다른 팀원들이 다 삭발하는 와중에 혼자서 머리가 없다는 굴욕까지...[33] 우연하게도 이 게임단은 아이디얼 스페이스하고도 연관이 있다. 일단 영입된 선수들이 아이디얼 스페이스에서 갈라진 화승 오즈, 위메이드 폭스 출신이고, 주훈 감독 또한 SKT T1 창단 이전에는 이 팀에 있었으니...[34] 특히 염보성이 계속 프로토스만 만나서 날빌의 희생양이 되며 연패를 찍었다. 그런데 나중에 아듀 MBC 게임에서 의도적으로 토스를 만나게 했는데 이렇게까지 질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당시 테프전의 양상이 변화하면서 염보성, 신상문, 박상우와 같은 선수들의 테프전 승률이 폭락한 걸 감안하면 확실히 트렌드를 못 읽은 걸 수도 있다.[35] 최연성, 이창훈 같은 거구를 포함해서! 결국 그 차는 퍼졌다고 한다.[36] 정확히는 네이밍 스폰이지만, 넥센이 히어로즈 지원해주는 것처럼 꽤 잘 지원해준다고 한다. 그러나 롤 팀을 보면 알겠지만 복지는 몰라도 자금적 지원은 형편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