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20 19:16:13

진헌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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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대

열공
삼진분립
제39대

환공
40대

정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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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80> 진(晉)나라 19대 국군
헌공
獻公
희(姬)
진(晉)
궤제(詭諸)
아버지 진무공(晉武公) 칭(稱)
아내 여희(驪姬)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651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676년 ~ 기원전 651년

1. 개요2. 생애
2.1. 즉위 이전2.2. 재위 초기2.3. 공족 숙청2.4. 대외 확장2.5. 여희의 난
3. 사후

[clearfix]

1. 개요

진(晉)나라의 19대 군주. 진무공의 아들, 태자 신생, 공자 중이, 공자 이오, 해제, 탁자의 아버지. 곡옥백의 방계 자손들을 숙청하여[1], 진후의 권위를 확립하였다.[2] 곽(霍)나라, 우나라, 괵나라를 멸하여 진나라의 세력을 크게 떨쳤으나 말년에 여희의 아름다움에 빠져 여희 소생인 해제를 총애하여 태자 신생을 죽이고 중이와 이오를 내쫓는 등, 진문공이 즉위할 때까지 나라가 혼란해지는 원인을 제공했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그는 즉위 전 당시 춘추오패로 군림하던 제환공의 딸인 제강(齊姜)과의 혼인이 약조되어 있었으나 아버지인 진무공이 차지해버렸다. 하지만 진 무공은 이미 늙어 제강을 제대로 데리고 있을 수 없어 원래 혼인하기로 한 그와 정을 통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장남 신생을 얻는다. 그리고 적족 여자인 호희(狐姬)와 결혼하여, 훗날 진문공이 되는 중이를 얻었다.[3]

2.2. 재위 초기

진 헌공 원년(기원전 676년), 진 헌공은 진 무공의 뒤를 이어 진후가 되었다.

진 헌공 5년(기원전 672년), 이때는 진 헌공이 곡옥의 공족들을 숙청하여 자신의 권위를 다지기 전이라서 먼저 기초를 쌓기 위해 이민족 정벌에 나섰는데, 여융을 정벌해 여희[4]를 차지했다.

2.3. 공족 숙청

진 헌공 7년(기원전 670년), 유씨의 자손들을 제거했다.[5]

진 헌공 8년(기원전 669년), 《사기》의 기록에는 사위(士蔿)[6]의 설득을 받아 공족들을 숙청하고 취(聚) 땅에 성을 쌓아 그 이름을 강(絳)이라고 했다.[7]

그런데 《춘추좌씨전》에서는 《사기》보다 기록이 자세한데 진 헌공은 즉위 초부터 환숙장백의 후손인 친척들을 숙청하고자 마음먹고 있었다. 그 숙청은 진 헌공 6년(기원전 671년)부터 시작되었다. 진 헌공은 심복인 사위에게 그 일을 맡겨, 그들 중 강한 부자(富子)[8] 군공자들을 숙청했다.

2.4. 대외 확장

진 헌공 9년(기원전 668년), 공족들을 숙청한 사위의 공을 기려 그를 사공에 봉했다. 같은 해에 공족들 중 일부가 괵으로 달아나자 괵공은 이들의 원수를 갚아준다는 명분으로 진을 공격했으나 헌공은 이들을 능히 막아냈다.

진 헌공 10년(기원전 667년), 괵나라의 행위에 분노한 진 헌공은 괵을 치려 했으나 사위가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한편 극숙호(郤叔虎)라는 자가 적사국의 어지러움을 사위를 통해 토로하자 진 헌공은 괵나라 대신에 적사를 쳐서 이겼다.

진 헌공 12년(기원전 665년), 진 헌공은 여희에게서 아들인 희해제를 보게 되었다.

진 헌공 16년(기원전 661년), 진 무공이 1군을 허락받은 후 처음으로 2군을 창설하여, 상군은 자신이, 하군은 자신의 태자 신생에게 주었다. 그리고 신생에게 명하여 곽(霍), 경(耿), 위(魏)를 정벌하고 경나라 땅은 조숙[9]에게, 위나라 땅은 필만[10]에게 주었다. 그런데 그 해에 가뭄이 들었으므로 곽나라 군주였던 곽공 구를 불러 곽나라의 제사를 다시 잇도록 허락했다.

진 헌공 17년(기원전 660년), 신생에게 북적인 고락씨를 치게해 그들을 직상 땅에서 격파했다.

진 헌공 19년(기원전 658년), 괵 침공을 본격적으로 기획했다. 모사인 순식의 진언을 받아들여 우나라에게 뇌물을 주어 길을 빌리려고 했는데, 우나라의 대부인 궁지기가 '순망치한'을 말하며 반대했으나 우나라 군주는 듣지 않고 뇌물에 혹해 들어주었다. 그리고 진 헌공은 괵을 멸한 뒤 복귀하는 길에 우나라를 멸하였다. 이것이 바로 '가도멸괵'(假道滅虢) 일명 '차도멸괵'(借道滅虢)의 어원이다. 그리고 우공과 그 신하들을 진(秦)나라로 시집가는 딸 목희의 잉신으로 삼았다.

2.5. 여희의 난

여희는 태자 신생이 공을 세우는 것을 보고 크게 분개하여,[11] 신생과 헌공을 이간질했으나 헌공은 잘못이 없다는 이유로 신생을 치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비밀리에 사통하는 광대를 통해 이극에게 자신이 하는 일에 관여하지 않을 것을 권해 이를 성사시켰다. 또한 일부러 신생을 불러낸 뒤 옷깃에 꿀을 바른 뒤 꿀벌이 꼬이게 하여 당황한 신생이 벌을 쫒자 멀리서 이를 본 진헌공이 신생이 여희를 희롱한다고 생각해 진노하게 하는 꾀를 썼다.

진 헌공 21년(기원전 656년), 신생은 친어머니인 제강의 제사를 지내고 그 고기를 부친인 헌공에게 바쳤다. 그런데 여희는 헌공이 사냥 나간 사이에 고기에 독을 치고, 헌공이 오자 그의 눈 앞에서 개에게 먹여 개가 죽는 것을 보여주었다. 헌공은 크게 노하여 태부 두원관을 사형에 처하고 신생에게 자결을 명했다.

진 헌공 22년(기원전 655년), 진 헌공은 중이를 죽이라고 명했다. 중이는 진 헌공이 보낸 자객 발제에게 소맷부리가 잘리지만 겨우 살아서 적나라로 달아났다.

진 헌공 23년(기원전 654년), 진 헌공은 희이오마저 죽이려 하니 희이오는 양나라로 달아났다. 그리고 그해 법령을 만들어 국내에 공족을 남겨두지 못하게 했다.

진 헌공 25년(기원전 652년), 적을 공략했으나 소득을 올리지 못했다.

진 헌공 26년(기원전 651년), 제 환공이 주최한 회맹[12]에 참여하려고 했으나 가던 길에 제나라를 견제하던 주나라 왕의 신하를 만나 참여하지 말라는 조언을 듣는다. 결국 헌공은 말머리를 돌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자인 해제를 순식에게 맡기고 병사했다.

3. 사후

순식은 진헌공의 유언을 따라 해제를 옹립했으나, 이극은 해제와 그 뒤를 이은 탁자까지 살해했다. 그리고 이극은 중이를 옹립하려 했으나 중이가 거절하자 대신 이오를 옹립하니 그가 바로 진혜공이다.


[1] 곡옥의 소종이 익의 대종을 대신한 것처럼 곡옥환숙의 방계 후손들이 직계 후손의 자리를 찬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2] 시호와는 달리 진나라 군주의 작위는 후작이다.[3] 진 문공은 훗날 외숙부인 호언과 호모 형제의 도움을 받아 군주 자리에 올랐다.[4] 여융족의 여인이라는 뜻.[5] 이들 또한 공족으로 보인다.[6] 두백의 손자이자 사회의 할아버지이다.[7] 여기가 진나라가 2개 성읍이 남을 때까지 남은 성 중 하나다.[8] 돈 많은 부자가 아니다. 공족을 일컫는 명칭.[9] 조최의 아버지 또는 형이다.[10] 위주의 할아버지이다.[11] 사실 신생이 전장에 나가 싸운 것 자체가 여희의 공작이었다. 신생이 지면 패전을 구실로 벌을 줘야 하고, 이기면 재능이 범상치 않은 것이니 숙청해야 한다고 헌공을 꼬드긴 것. 여희가 늙은 헌공에 싫증이 나서 젊은 신생을 유혹했다가 차였다는 말도 있고, 그냥 자기 아들 해제가 진후가 되는데 방해가 되는 신생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는 말도 있다.[12] 이 때의 회맹이 그 유명한 규구의 회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