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23:56:52

짜장면/역사

1. 개요2. 중국작장면3. 전래4. 정가제와 식품위생법의 도입5. 한국식 짜장면의 등장6. 관련 문서

1. 개요

짜장면의 역사에 대해 다루는 문서.

2. 중국작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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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래

1880년대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파견된 청나라 군대의 보급을 위해 들어온 쿨리(중국인 노동자)들은 거리가 가까운 산둥성에서 주로 왔는데 이들이 인천항 인근 (현재의 차이나타운)에 처음으로 한국의 화교 공동체를 이루었고, 원래 산둥성의 가정식이었던 작장면을 1890년대 인천항의 중국인 부두 노동자들에게 판 것이 시초이다. 이때는 정식 식당이 아니라 부두 한켠에서 솥단지를 걸어놓고 노점 장사를 하였고, 면도 수타면이 아닌 칼국수였다.

이후 화교 공동체가 자리를 잡아 감에 따라 정식 청요리집도 생겼고, 서민 음식이었던 짜장면을 정식 청요리집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이 늘자 중국 산둥지방의 복사라는 지역에서 본토의 수타 기술자를 불러와서 짜장면은 수타면으로 바뀌게 된다.[1] 이렇게 1900년대 이전에 이미 인천의 개항장 일대, 차이나타운의 여러 식당에서 짜장면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그 후에 공화춘의 짜장면이 이름이 알려져서 짜장면의 원조로 잘못 알려지게 되었다. 1세대 화교 출신 요리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공화춘이 생기기 이전에 이미 여러 청 요릿집들에서 짜장면을 판매하고 있었고 누가 원조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고 한다. 화교촌에서 자연스럽게 현재는 요리 자체의 원조 여부보다는, 최초로 "짜장면"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에 대한 원조로 인정하는 것이 중론.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초창기 짜장면은 지금과 같이 면을 짜장에 비벼 먹지 않고, 면 위에 얹힌 짜장을 면에 살살 묻혀 가며 먹었다.

4. 정가제와 식품위생법의 도입

1960년대 중반 정부에서 경제 시장의 형태를 조율하기 위해 정가지정제도(정가제)를 시행하게 된다. 이 시행으로 폭리를 취하는 형태의 상거래가 대대적으로 단속되었으며 외국 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일부 산업도 단속 대상이 된다. 당시에는 화교들을 중심으로 운영된 중국 요리점들은 기본적인 재료를 수입해왔기에 외화 유출을 빌미로 특히나 심한 제재를 받았다.

이에 수지타산을 맞추기 위해 한국 내에 농장을 개설하거나 양념 공장을 개설하는 형태로 한국산 재료를 활용하는 한국식 중화요리의 개발이 이루어졌으나, 1967년 식품위생법이 제정되면서 화교들이 전통 방식을 고수하여 가내수공업 형태로 만든 조미료와 가공재료들이 식품위생법 조항 중 '개인 가정을 제외한 판매와 요리를 목적으로 하는 장의 제조에 허가가 필요'에 위배되어 단속의 주요 대상이 된다.

결국 이를 받아들인 화교 음식점에서도 조미료 가공 공장을 차리거나 시판되는 한국식 면장을 구매하는 식으로 변화하였고, 이 시기에 시판되는 한국식 면장(춘장)을 사용한 검은 짜장면이 나타난다.

물론 일부 화교들은 연합하여 가공 공장을 세워 운영하나, 당시 동남아의 여러 국가들처럼 화교들이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에 대해 상당한 경각심을 갖고 있던 정부에서는 화교들의 사유재산을 동결하고 거주지, 사업장은 일정 이상 늘릴 수 없도록 묶어버렸다. 한국인을 바지사장으로 내세워 공장을 운영하는 편법도 사용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회사 중 대표적인 것이 영화장류인데, 영화장류에서 판매를 시작한 사자표 면장은 중국 요리집을 운영하던 화교들에게 공급되어 갈색 면장 짜장면이 부활하게 된다. 당시 경찰은 철저히 이를 적발하고 사설 유통망을 없애는 데 주력했다.

결국 일반인을 상대로 한 유통이 회사의 명운을 좌지우지하게 되었고 짠맛을 기반으로 한 면장의 판매가 지지부진하여 짠맛을 순화시키기 위해 조미료를 추가하게 된다. 이후 경쟁 과정에서 면장이 검은 것이 더 잘 익은 것이란 인식을 퍼트린데다가[2] 일선 중국집 입장에서는 캐러멜 색소를 첨가해 검은색이 된 면장은 원래의 황갈색 면장에 비해 물을 타도 별로 옅어보이지 않기 때문에, 원가절감으로 이윤을 많이 남기려는 이유로 더 많이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검은색 춘장이 유행하자 원래의 갈색 면장은 도태되었다. 한국식 면장인 춘장의 색이 검은 것은 이 때문이며 검은색 짜장면이 나타나게 되면서 황갈색 짜장면은 사라지게 되었다. 즉, 캐러멜 색소 첨가는 사실 업계의 이기로 생겨난 불필요한 과정인 것.

춘장이 유통되던 시기 일부 화교들은 중화요리의 원칙을 내세우며 연합체를 결성, 바지사장이 아니라 공동업자로 한국인과 손을 잡고 정식으로 중국식 면장을 제조하였으나 정부는 외국인 자본이 기반이란 이유로 상표 등록을 불허하였다. 화교들은 정부의 방침에 반발, 정식 상표 등록을 하지 않은 채 유통을 시작했고 정부는 이들을 밀조업자로 판단, 공장을 폐쇄시켰다.

5. 한국식 짜장면의 등장

면장 제조가 금지되어 결국 춘장을 사용하게 된 화교들은 50여년 간 천대해 온 한국식 중화 요리 개발에 착수하게 되었다. 육수를 섞어 볶은 장이 호평을 받자 면장을 볶는 과정에서 육수녹말가루를 풀어 양을 늘리는 방법이 보급되었고 이후 이 방식이 전국적으로 정착하여 한국식 짜장면이 정착된다.
파일:1970년대_짜장면.png
1970년[3]대 한 음식점에서 짜장면을 먹고 있는 학생들.
이 과정에서 화교들에 대한 단속이 심해져 자본적으로 쪼들리게 된 요리사들은 원가 절감을 위해 장을 볶을 때 넣는 고기를 줄이고 야채를 섞어 밥반찬과 같은 형태로 만들거나 뼈를 고아 만든 고기 육수를 넣어 국과 비슷한 식으로 양을 늘리는 중화 요리한국 요리의 기법이 융합된 방식을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밥반찬으로 사용하던 재료는 볶음밥이나 탕수육 등의 튀김요리에 곁들여 먹는 소스의 형태로 정착하였으며 국 형태로 먹던 음식은 밥을 비벼 먹는 형태의 자장밥으로 변화하였다.

1990년대 일본에선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소개된 바 있다. 짬뽕처럼 중국이 고향이지만 한국에서 독창적으로 개량했으며 중국에서 먹는 자장몐은 한국 짜장면과 확실히 다르다고 상세히 다룬 적도 있다. 실제로 중국인들이 한국 짜장면을 배워가는 경우도 적잖다.[4] 더불어 중국 원조 자장몐이라고 중국인 주방장 불러와 크게 홍보하던 상당수 중국집은 되려 사람들이 맛에 낯설어 하는 통에 손해를 보는 사례도 있었다. 그렇긴 하지만 일본에도 짜장면이 있긴 있다. 이름은 자자멘(ジャージャー麺)이라고 쓰는데[5] 면 맛이나 소스 맛은 짜장면보다는 막국수 같다는 느낌. 사실 자자멘은 짜장면이 아닌 작장면에서 와서 맛이 다를 수밖에 없다. 또 모리오카시의 모리오카 자자멘(盛岡じゃじゃ麺)도 지역 별미로 유명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가장 흔한 미국식 중화 요리인 로메인/로미엔(라면) 이라는 면 요리가 묘하게도 한국식 짜장면과 매우 흡사하다. 볶음짜장 내지는 짜장볶음면 정도의 맛이다.[6] 한국에서는 미국식 중화체인이 아닌 홍콩의 완탕면 가게인 청키면가가 한국에 진출하면서 자장로미엔이란 이름으로 팔고 있다. 또 lo mein 이외에도 soy sauce chow mein/chow mien으로도 불린다. chow라는 말은 (초면炒麵) 기름에 볶았다[7]는 말이다. 참고로 차오몐에는 짜장면 같은 볶음면 이외에도 한국의 잡채 비슷한 볶음면도 있는데, 이런 경우 로몐과 차오몐을 다르게 쓴다. 참고로 이것도 한국에서는 미국 체인이 아니라 중국의 산동교자가 한국에 진출해서 차오미엔이라고 팔고 있다. 로미엔은 간장베이스의 짜장면 같은 시커먼 볶음면이고, 잡채 같은 볶음면이 차우미엔으로 불린다.

6. 관련 문서



[1] KBS 한국인의 밥상 출처[2] 영화식품의 명예회장은 SBS와의 인터뷰에서 이 건에 대해 "경쟁사가 이런 식의 악소문을 냈고 그 때문에 매출이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라고 2009년 증언했다.[3] 당시 100원→1985년 500원→1988년 700원[4] 중국인 요리사가 '정통 중국 음식'을 모토로 세운 모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팔지 않으니 장사가 안 돼서 중국인 주방장이 한국인에게 한국 짜장면 만드는 법을 배우기도 했는데, 그 중국 주방장 왈 '짜장면 만들기 너무 어려워요~'라고.[5] 가끔 자장멘(ジャージャン麺)이라고도 쓴다.[6] 사실 로몐의 정식 명칭은 자쟝로몐이다.[7] deep fried가 아니라 stir-fr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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