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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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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창조론의 위치
2.1. 창조론은 과학의 영역 안에 있는가?2.2. 창조론은 자연과학 연구를 존중한다.
3. 성경에 나타난 '창조'
3.1. 창세기에 나타나는 '창조'에 관하여3.2. '창조'에 대한 해석
4. 교부 시대에 나타난 '창조'
4.1. 아우구스티노의 창조론
5. 신학에 나타나는 '창조'
5.1. 현대의 해석
6. 관련 문서

1. 개요

"성부는 온전한 영으로써 물질의 중재(개입) 없이는 물질세계에 개입하지 않고 그렇기에 물질의 중재 없이는 창조도 하지 않으신다. 그러면 창조가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성부와 물질 사이를 중재할 성부와 같은 참하느님이며 동시에 물질인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성자(예수)는 영원 이전부터 참하느님이시며 참인간(물질)이셨기에 성부를 물질계와 매개하여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다. 그럼 물질계를 창조하기 전이면 인간도 없었을 것인데 성자는 어떻게 인간이었냐고? 시간조차도 하느님의 피조물이므로 하느님은 시간에 종속되지 않고 모든 것이 현재이기에 성자는 인간으로 태어나기 전, 세상 창조 전부터 인간이셨다"
-라는 식의 골치아픈 철학적 담화
장난이 아니라 실제로 가톨릭 신학에서 "창조가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라는 것에 대한 대답이다. 하지만 밑에서 다루는 것은 신학적 인간학으로서의 창조론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방금 말한 건 나오지 않고, 끼어들 데도 없다.

신학적 인간학의 한 부분으로서의 창조론에 대한 항목이다. 아래에 진술되는 내용은 그리스도교 인간학, 즉, 신학적 인간학에 대한 관점을 담고 있으며, 그리스도교, 정확히는 가톨릭교회의 관점을 중심으로 작성된다.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창조란 사람이 체험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표지이다. 이는 "세상의 것이 왜 없지 않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신학적인 숙고의 결과이다. 결국 창조론을 통하여 논하여지는 관점은 첫째로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 대한 해석이 우선시 된다. 그 뒤로 그것을 후대의 해석함에 따라서 조금 더 내용이 변화하기 시작하여 시대의 질문에 답을 하는 학문으로 변화한다.

본래에 신론의 일부로 다루어지던 창조론은 "신학적 인간학"을 주창한 칼 라너 이후로는 신학적 인간학의 일부로 논해지고 있다.

신학적인 논의로 되는 주제는 2가지이다. 하나는 만물에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신 하느님, 다른 하나는 그러한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이 그것이다. 전자는 교부시대 이전부터 논의되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우구스티노나,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여 확정된 이후로 관심을 받지 못하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후로 주목을 받으며, 오늘날 가장 큰 주제로 삼아지고 있다.

참고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했을 진화론과의 관계를 미리 명시적으로 서술하면, 가톨릭은 진화론을 과학이론으로서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다. 이에 대한 서술은 진화론 항목의 1.5 종교와의 관계를 참고하길 바란다.

2. 창조론의 위치

2.1. 창조론은 과학의 영역 안에 있는가?

창조론은 과학의 영역에 있지 않다. 그러나 과학의 결과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교황 비오 12세의 회칙 <인류>에서 그 기저가 드러난다.
교회의 가르침은 진화 이론이 인간, 특히 그 육체가 이미 존재하고, 또 살아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기원한다는 것을 추구하고, 또 인간의 현실적 학문들과 거룩한 신학의 현 상태를 존중하며 양편의 전문가들이 이를 연구하고 논의하는 한 진화이론을 금지하지 않는다. 또한 가톨릭 신앙은 영혼이 하느님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견지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한다.
- 비오 12세 회칙 <인류(Humani Generis)>에서

창조론은 과학의 영역을 존중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3-1965)에서는 진화론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는 않지만 공의회 문헌을 통해 명백히 하고 있는 인간과 인간행위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들은 현대과학의 연구 성과들에 대한 교회의 발전된 입장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공의회의 이러한 입장은 사목헌장(Gaudium et Spes)[1] 36항에서 두드러지는데 여기서는 만물에게 부여된 자연법칙과 질서를 존중해야 하며, 자연과학의 고유한 방법을 인정하고 이를 통한 독자적인 진리 탐구에 적극 동의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분야의 방법론적 탐구가 참으로 과학적인 방법으로 도덕규범에 따라 이루어진다면 결코 신앙과 참으로 대립할 수 없을 것이다."
창조론은 과학적인 숙고의 결과물인 진화론을 존중한다.

교회가 부정하는 것은 모든 형이상학적인 차원을 부정하는 유물론적인 문제이다. 물론 진화론을 다루는 과학적 방법론 자체가 유물론적 성격을 지닌 것은 당연하지만, 유물론적 무신론자들이 방법적 차원을 넘어서 모든 형이상학을 부정한다.

창조과학지적 설계 운동은 적극적으로 진화론을 공격하여 소멸시켜 버리려는 의도로 등장한 근본주의적 사이비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가톨릭 교회는 이들을 사이비 과학으로, 또 마치 교회의 이론인 것처럼 가장하는 사이비 신학으로도 여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생물의 신비를 탐구하는 과학의 영역을 침해하는 행위 자체로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론 전개의 편협함도 간과할 수 없다. 만약 지적 설계론이 하나의 패러다임으로서 진화론과 경쟁하는 과학 이론이라면 이 둘은 동일한 기준을 가지고 비교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연 현상에 대한 설명력, 일관성, 예측 가능성 등의 기준을 가지고 비교해본다면 그들이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기존의 과학적 성과로 제시된 수많은 자료 가운데 의도적으로 일부만을 취사선택하고 정교하게 가공하는 방법은 용인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유대교, 기독교 적인 시각으로 과학을 전개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결정적인 근거로는 알량한 신학의 설명만을 주창하고 있으며, 설계의 깊이 속으로 파고드는 더 깊은 연구를 시작하기도 전에 성급하게 서두르고 있다는 의혹을 피하기가 힘들다.

즉, 과학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신학에는 찬성할 수 없다는 것이 교회의 근본적인 입장인 것이다.

2.2. 창조론은 자연과학 연구를 존중한다.

교회의 관점은 2008년의 교황청 과학아카데미(The Pontifical Academy of Sciences)주최 회의에서 잘 나타났다.

이 회의에서는 결론적으로, 진화라는 의미를 가진 'evolve'의 문자적 뜻은 책을 읽기위해 ‘두루마리를 펴다’ 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하면서, 이렇게 자연을 또 하나의 책으로 보는 입장은 그리스도교에서 기원하며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들에 의해 유지되어 내려온 방법으로써, 그 예시로 갈릴레오가 자연을 하나의 책으로 여기며 성경의 저자가 하느님이듯 자연이라는 책의 저자 역시 하느님으로 보았다는 점을 들었다. 그러므로 자연은 역사와 진화가 담긴 "책"이며 어떤 목적을 위해 현재에도 작성중인 하나의 책이라는 관점을 출발점으로 삼아 이 책의 저자로서의 초월적 존재를 전제하면서 과학의 다양한 접근 방법들을 활용하자고 제안하였다.[2]

3. 성경에 나타난 '창조'

성경에 나타난 창조에 관련해서 참고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창세기"이다.

3.1. 창세기에 나타나는 '창조'에 관하여

창세기는 지금의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 시대에는 대구법을 이루고 있는 서사시의 구조를 하고 있다.

창세기에서 나타나는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 그대로 되었다.
2. 하루의 완성 -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3]

또한 6일 창조라고도 부르는 6일간의 창조된 목록은 다음과 같다.

1일: 빛(어둠과 빛의 구분) - 시간의 시작
2일: 하늘과 바다의 구분
3일: 땅과 바다의 구분, 온갖 식물들의 창조 - 땅을 장식
4일: 하늘에 태양과 달 그리고 별의 창조[4] - 하늘을 장식
5일: 땅 위를 날아다니는 새들과 바다의 물고기 및 괴물들의 창조[5]
6일: 땅을 돌아다니는 집짐승, 들짐승의 창조, 사람의 창조, 사람에 대한 강복(모든 것에 대한 권리를 허락)
7일: 모든 것이 이루어졌으므로 휴식을 취하심.

1-3일은 구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4-6일은 본격적인 생물의 창조를 통한 장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또한 해와 달, 땅과 바다, 하늘을 제외하고는 어떤 생물에게도 이름을 붙이지 않으신다. 그것은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6] 또한 살펴봐야 하는 것은, 7일에는 휴식을 취했다는 언급이 있다. 이것은 안식일에 대한 근거가 되며, 하느님께서 쉬심은 모든 이들이 함께 쉬도록 초대하기 위함이다. 동시에 하느님의 창조는 절대적인 호의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어떤 의무감이나,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즉, 저자에 의하면 창조는 하느님 보시기에 참으로 좋은 행위이며, 그것은 당신의 마음에 드는 모습이다. 즉,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의 호의와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세상의 어떤 것도 악하거나 필요없다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은 과거의 선과 악에 대한 철저한 구분으로 이루어지는 기존의 신화와는 아예 다른 길을 걸어가는 것이며, 그 자체로 그 시대에 그 자리에서 나올 수 없는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2. '창조'에 대한 해석

신학으로서 나타나는 창조는 2가지의 방향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하느님의 일로서 창조",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이 그것이다. 이 모두는 창세기를 바탕으로 하는 사유의 연장선에 있는 학문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우선적으로 봐야 하는 것은 창조가 창세기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이다.

창조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비판할 여러가지 부분들이 있다. 어째서 6일 창조인가? 누가 그것을 보았는가? 사람이 창조되기 이전의 사실을 사람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모두가 정당하게 할 수 있는 의문이며, 비판이다. 그러나 성경은 사실(Fact)을 말하지 않는다. 신앙을 통한 진리(Truth)를 말하는 책이다. 또한 오늘날에도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 아주 큰 영향을 받아서 편집된 책이다.[7] 그러므로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보아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전술한 바와 같이 삶의 자리를 기초로 살펴본다면, 그때에는 신에 관하여 논하는 것은 그 민족의 위치를 표현하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바빌로니아 제국의 융성은 바알 신앙에 패배한 야훼 신앙이 아예 사라질 것 같은 위기로 다가오게 되었다. 하느님의 침묵, 하느님의 무력함에 대한 해석이 필요했다. 신앙에 대한 의미가 없다면 그들이 유대 왕국의 백성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바빌론의 엘리트로 사는 것이 더 편했기 때문이다.[8] 그들에게 현재와 미래에 대한 확신을 주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시원점, 그들의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현재의 것이 아니라, 시초의 것을 보려는 것은 바빌로니아의 창조설에 큰 영감을 받은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은 신앙의 원체험(그들이 신앙을 가지도록 이끈 결정적인 계기)을 출애굽 사건에 두는 유다인들의 신앙에 큰 변화를 주었다. 즉, 한 가족의 수호신에서 온 세상의 창조주, 세상 모든 것의 절대적인 주권자로 체험하게 된 것이다. 출애굽 사건을 통한 해방체험이 그것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하느님의 개입 하느님의 창조로 변화한 것이다. "이미" 개입했었고, "새롭게" 개입한 것이 출애굽 사건으로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언제든지 새롭게 개입하여, 그들의 유배생활에서 해방시켜주리라는 신앙이 그들이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가지도록 이끈 계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창조주 신앙, 창조라는 신앙항목은 철저한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의 일환이며, 세상의 의미, 그리고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기억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4. 교부 시대에 나타난 '창조'

이 시대에는 성경주해의 차원으로 창조에 대한 언급이 나타난다.

교부들마다 해석하는 방식이 다르고, 아직은 정리되어 가는 과정 중에 있었기 때문에 많이 어수선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교부들의 수장이라고 불리는 아우구스티노의 창조에 대한 해석은 뒤에 이어지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영향을 주기도 한 것으로 나타난다.

4.1. 아우구스티노의 창조론

아우구스티노 시절에는 기본적으로 신학(Theologia)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아직 그때까지 신학은 '가르침(Doctrina)' 수준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특별한 철학적인 지식보다는 신앙적인 묵상 위주로 작성된 그의 글에서 이러한 확실한 것을 찾기는 어려우나, 주로 그의 저서 '고백록'에 나타난 것을 바탕으로 그의 주해를 참고할 때에 어느 정도 윤곽을 찾아볼 수는 있다.

이 교부의 창조론에 나타나는 특징 중에 하나는 플로티노스의 유출설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창조론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거기에 선과 악의 싸움을 말하는 마니교의 창조론을 부정하면서, 절대적인 하느님의 호의로만 나타나는 것이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창조는 기본적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업적으로 있다.[9] 동시에 이러한 창조는 철저한 하느님의 호의로 있다. 이것은 그의 저서 <신국론>에서 확실하게 나타난다.
"모든 것을 가리켜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는데, 하느님의 창조 예술, 하느님의 지혜에 따라 당신의 작품을 선하다고 인정하는 말씀이 아니라면 뭐라고 이해하겠는가? 하느님은 창조를 하고 나서야 무엇이 좋은지 배운 분이 아니다. 하느님께 알려지지 않았더라면 아무것도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느님이 보니깐 좋다. 그 사물들이 생기기 전에 하느님이 보지 않았으면 물론 생기지도 않았다. 왜 만들었냐고 묻는다면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답한다. 하느님보다 더 훌륭한 제작자가 없고 하느님의 말씀보다 더 훌륭한 제작 기술이 없고 선한 하느님으로부터 선한 것이 창조되는 것보다 더 좋은 제작 이유가 없다. 플라톤 역시 선한 하느님에 의해 선한 작품이 생긴 이것이야말로 세계를 창조하는 가장 정당한 이유라고 말한다." <신국론> 11권 21항
그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창조는 한처음에 이뤄진 일순간의 행위이다. 성경말씀에 그렇게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동시적 창조를 설명하기 위해 “종자 형상” (ratines seminales)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그는 그 개념을 사용한 여러 철학자들이 하지 못했던 체계화를 이루어 냈다. 하느님은 수많은 자연물의 종들이 뒤늦게 드러나도록, 그것을 잠재적인 씨앗으로 창조한 것이다. 그는 시대적 한계로 인해 진화라는 개념을 몰랐으나, 다양성의 근원 또한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자 이런 방식을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방식으로 하느님은 모든 것의 창조자가 된다.

아직까지는 성경에 의거한 묵상위주의 방식이며, 성경주해와 크게 다르지 않으나, 중요한 것은 선과 악의 구별이 없다는 것[10], 그리고 모든 것의 절대적인 주권자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설명이 이뤄진 것이라 하겠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조의 요소에는 '시간'도 포함하며 따라서 "창조 '이전'에는 어떤 일이 있었느냐"와 같은 질문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하였다. 흔히 이 질문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느님은 그런 의문을 품는 자들을 위한 지옥을 만들고 계셨다."라고 주장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건 아우구스티누스가 한 농담이 와전된 것이다.

5. 신학에 나타나는 '창조'

5.1. 현대의 해석

유신론적 진화론 참조.

창세기에는 하느님이 6일 동안에 우주의 창조 업적을 마치고, 7일째 되는 날에 쉬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창세기의 저자가 성경의 독자들인 유다인들에게 한 주간의 개념을 명백히 가르쳐 줌으로써 일곱째 날의 안식일 준수를 강조하는 전례적 의미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성서학자들은 해석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6일만에 우주 창조를 완료했다는 성경의 표현은 과학적 사실과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11]

가령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신학자인 테드 버지(Ted Burge)는 성경의 창조론이 자연과학의 진화론과 모순이 되지 않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한처음에 하느님은 무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지극히 작고 뜨거운 점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완벽한 균형과 정밀성을 갖춘 물리학의 통일장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진화의 시발점이며 창조의 첫 단계였다.

그 작은 점이 폭발하자 팽창이 시작되었고, 우주 속에서 완벽히 조율된 하느님의 법칙에 따라 여러 종류의 무수히 많은 입자가 탄생했다. 그 후 약 백만 년 동안에 각종 원자가 탄생하였다. 여기서 창조의 제2단계인 우주의 진화가 시작됐다.

원자와 분자를 기본 요소로 하여 중력이 작용하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약 10억 년 후에 최초의 별들과 은하들이 형성되었다. 이것이 창조의 제3단계였다.

각각의 별은 중력으로 인해 수축되고 뜨거워져 핵융합이 시작되었고, 새로운 원소들이 탄생했다. 그로부터 약 100억 년이 지나자 어떤 별은 초신성의 모습으로 폭발하여 현존하는 모든 원소를 우주 공간에 쏟아냈다. 이것이 창조의 제4단계였다.

이제 모든 원소가 나타났고, 중력이 제2세대의 별을 만들어냈고, 그중 일부는 행성계와 위성도 갖추었다. 우리 은하 속의 태양, 지구 그리고 달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이것이 진화의 제5단계였다.

또 10억 년이 지난 후, 지구는 생명이 탄생하기에 적합한 환경이 되었다. 이것이 진화의 제6단계였다.

최근 30억 년 동안 생명은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진화해 왔으며, 무수한 탄생과 생존, 번식, 죽음의 순환 과정을 통해 동식물의 생물 종들은 번성하고 발전했으며 어떤 종은 멸종하기도 했다. 그리고 30만 년 전에 하느님을 닮은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했다. 그는 선택할 능력이 있었고,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으며 선과 악, 기쁨과 고통 등을 알았고, 자연의 지배자로서의 긍지도 갖고 있었으며, 죽음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이리하여 우주는 '인류의 시대'로 들어섰다. 인간은 신체적으로 지난 4만 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이것이 진화의 제7단계였다.

전남대학교 명예교수 김왕기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창세기의 천지창조를 과학적 관점을 접목하여 대폭발로부터 생명의 출현까지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추론하였다.
첫째,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라는 구약성경의 첫 구절은 창조의 방법과 과정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일반인들이 이해하고 있던 우주상에 따라 하느님의 우주 창조를 설명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둘째, 창세기의 한처음 이전에는 완전 신공상태의 공허와 무한무변의 암흑이었고 온도는 절대영도였다(-273도). 이 온도는 기체의 부피와 압력이 영이 되는 온도이다.

셋째, 물질과 에너지가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하게 된 것은 대폭발에서 비롯되었다. 상대성 원리에 따라 우주 창조 때의 시간(하루)과 지상의 시간(하루)은 매우 다르다. [창세기의 1일: 대폭발로 빛이 생김]

넷째, 우주는 대폭발 이후 팽창 과정에서 수천 억 개의 다양한 은하가 생겼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은하계 내에서도 수천 억 개의 별들이 있다. 우리 은하계 내에 있는 하나의 주계열성인 태양은 지구 부피의 약 130만 배이고, 태양의 지름은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의 4배이다.

태양계에서는 표면이 냉각된 상당수의 행성들이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고 있다. 그중 하나의 행성인 지구의 냉각 과정에서 지구 주위에 수증기층과 공기층이 생겼고, 많은 양의 수증기층은 지구의 물이 되었다. [창세기의 2일: 물의 분리와 창공의 형성]

다섯째, 지구의 물은 중력에 의하여 낮은 곳으로 흘러내려 육지와 바다가 되었다. 햇빛과 물과 공기로 인하여 생명체가 생겨났다. [창세기의 3일: 바다 및 육지의 분리와 생명(세균)의 출현]|

여섯째, 지구의 자전으로 인하여 낮과 밤이 되고 해와 달이 나타났다. [창세기의 4일: 낮과 밤이 분리되고, 큰 빛과 작은 빛은 각각 낮과 밤을 다스림]

6. 관련 문서



[1] '기쁨과 희망'이라는 뜻의 라틴어.[2] 이 회의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자연과학이 우주 안에서의 인간의 특별함에 대한 이해를 크게 넓혀 주었다고 말하면서 자연 과학자들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명하고, “신앙적 이해와 상반되지 않는 과학적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충만하게 완성된 하느님 계시의 이해를 위한 철학과 신학에 협력할 수 있다.”라고 말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견해를 인용하면서 본 회의가 인류의 이익과 진리추구의 중대한 상호적 강화가 되기를 기대한다며 기조연설을 마무리 지은 바 있다.[3] "보시니 참 좋았다"라는 구절은 단 2번 나온다. 한 번은 사람의 창조 이후, 다음으로는 모든 것을 창조한 이후로.[4] 기존의 신화와 다르게 창세기에 따르면, 태양과 달은 어떤 신의 상징이 아니라, '빛 물체'이다. 또한 빛이 먼저 창조되고, 그 빛을 담는 덩어리인 태양과 달의 언급이 있다. 즉, 기존의 신화에서의 탈출, 특별히 유다인들에게 반신반인과 같았던 이집트인들의 태양신에서의 탈출을 의미한다고도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5] 바빌로니아 신화를 생각하면 의미심장하다. 바다의 괴물과 싸워서 창조된 세계가 아니라, 그 괴물들조차도 하느님의 의사로 창조되었다고 한다.[6] 그때의 삶의 자리 안에서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것에 대하여 절대적원 권한이 있음을 말한다.[7] 창세기바빌론 유수 시절에 유배 생활로 신앙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린 유대 민족을 위하여 당신의 제관으로 짐작되는 이들이 작성한 책이고, 그것을 읽는 우리는 21세기 종교의 자유를 누리며, 삶의 지혜를 얻으려는 사람이다. 당연히 삶의 자리가 차이가 나므로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8] 유배에 끌려간 이들은 혈통이나 여러 모로 뛰어난 사람들이 대다수였다.[9] 모든 창조물에는 척도와 수와 무게를 가지며, 하느님은 이러한 삼위일체의 방식으로 하나의 창조물이 있게 하셨다.[10] 악은 선의 결핍일 뿐, 선과 다른 것이 아니다.[11] 실제로 성경에는 숫자로 표시되었지만 실제로는 비유적인 의미인 경우가 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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