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방화 사건 崇禮門 放火 事件 Sungnyemun Arson Inciden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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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c002d> 발생일 | 2008년 2월 10일 20시 50분 D[dday(2008-02-10)]일 | |
발생 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40 | |
유형 | 화재, 방화, 테러 | |
원인 | 채종기의 토지에 대한 보상액 불만 | |
재산 피해 | 추정 불가[1] | |
동원현황 | <colbgcolor=#bc002d> 인원 | 128명[2] |
장비 | 32대[3] | |
처벌 | 문화재보호법 위반죄(형법상 방화죄의 특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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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olbgcolor=#000> 2008년 2월 11일자 MBC 뉴스데스크 |
2. 사건 경위
<colbgcolor=#000> 방화 하루 전인 2008년 2월 9일 촬영 |
방화 이후 심각하게 파괴된 숭례문 |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50분 즈음 원인 모를 불이 흰 연기와 함께 숭례문 2층에서 발생하여[5] 소방 당국은 신고를 받고 소방차 32대, 소방관 128명을 현장에 출동시켰고 불씨를 제거하기 위해 일부 현판을 잘라내고 물과 소화 약제를 뿌리고 화재 진압에 총력을 다했으나 2월 11일[6] 오전 0시 25분 즈음 2층 누각 전체가 불에 휩싸이고 화재 4시간 만인 오전 0시 58분 즈음 지붕 뒷면이 붕괴[7]되기 시작했으며 2층이 붕괴되었다. 이어 바로 1층에 불이 붙어 새벽 1시 55분 즈음에는 숭례문의 고주와 평주, 주심도리를 비롯한 기본 뼈대들과 누각을 받치고 있는 석반을 남긴 채 모두 붕괴된 다음 5시간 만에 1층 누각의 90%, 2층 누각의 10%가 소실된채 남겨졌다.
당시 숭례문을 관리하고 있던 업체의 직원은 퇴근하고 CCTV만 돌아가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초기에 화재를 발견하지 못했다. 방화범이 숭례문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현장을 지나가던 택시 기사가 목격 후 경찰에 신고하고, 용의자를 추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에서 대응을 하지 못하다가 시간이 조금 경과한 뒤에야 겨우 사태가 파악되었다. 방화 당시 쓰인 것은 겨우 시너 3통과 라이터 하나였다.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YTN, 헤럴드 뉴스, 소방방재청, 경찰청 보도 참고).
20:45 | 방화범이 사다리를 이용해 숭례문으로 진입 | |
20:47 | KT 텔레캅이 남대문에 설치한 센서에 뭔가 반응. 경찰서 및 소방서에 연락하지 않음. | |
20:50 | 화재 신고 | |
20:53 | 중부소방서 회현 소방파출소 도착. 화재 진압의 FM대로 해체하며 진화하기로 계획 | |
20:57 | 텔레캅 직원 도착. 현장에서는 진화 작업 중 | |
20:59 | 문화재청에 화재 통보. 국보가 훼손될 수 있으니 신중하게 진화하라고 답변함 | |
21:30 | 화재 진압된 것으로 결정. 잔화 처리. 발화점 미확인 | |
21:35 | 문화재청, '화재진압이 우선' 일부 훼손 승인 | |
21:55 | 화재 비상 2호 | |
22:32 | 화재 비상 3호 - 서울 소방재난 본부장 지휘 | |
23:10 | 숭례문 현판 회수 | |
23:20 | 화학식 소화제[8] 사용 | |
23:50 | 지붕 해체 개시 | |
00:25 | 2층 누각 전체 발화 | |
00:58 | 2층 붕괴 시작 | |
01:55 | 2층 90% 1층 10% 소실 |
사건 당일 밤에 보도된 숭례문 속보를 보고 '별일 없겠지'라고 생각하고 자다 일어났더니 숭례문이 전소되어 충격받은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3. 방화범
<colbgcolor=#000><colcolor=#fff> 채종기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생 | 1939년 2월 28일 ([age(1939-02-28)]세)[9] |
경상북도 칠곡군 |
채종기는 현장 검증 자리에서 당시 대통령에게 하소연해도 들어주지 않았다며 '노무현의 잘못이 99.9%, 내 잘못은 0.1%', '그래도 인명 피해는 없었잖아. 문화재는 복원하면 된다'는 망언을 하여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검증이 끝난 후 "문화재를 훼손해 국민들께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재판을 받은 채종기는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12년형이 구형되었으며 1심 판결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형이 과중함을 들어 항소했으나 2009년 8월 31일, 서울고등법원은 항소를 기각하며 징역 10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하여 복역하게 되었다.
화재 사건 이후 세간에서는 전통 문화를 무시하고 외면하는 철없는 젊은 자식이나 어린 놈이 장난쳤거나 구식 문화에 혐오감 등을 가져서 불을 질렀다고 추정했지만 뜻밖에도 범인이 60대 후반의 노인이었다는 사실에 경악과 충격을 금치 못했다. 세간에는 노인들이 전통과 옛 것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이미지도 있었는데 이를 배반하듯 노인임에도 나이값도 못하고 밑도 끝도 없는 분노에 눈이 멀어서 문화재를 불태웠다는 흉악범죄를 두 번이나 저지른 사실에 사람들은 경악했다.[11]
채종기는 범행 2년 후인 2010년 2월 복역 중 처음으로 인터뷰를 가졌는데 2년 전 사건에 대해 묻자 '내가 그때 바보짓을 했다'며 뒤늦은 후회를 했다(#). 10년 뒤 2018년 2월에 만기출소했다(#).
4. 화재 진압 평가
4.1. 진화가 비효율적이었다
화재 신고는 비교적 일찍 되었지만 진화 과정이 상당히 비효율적이었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소방 인력의 전통 목건축 구조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진화를 위해 노력했던 소방관들 개개인의 잘못이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대부분의 건축물이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진 21세기에 제도적으로 전통 목건축에 대한 소방 인력 교육이 부족했던 것이다.당시 소방관들이 돌입하기에는 너무 위험했기 때문에 밖에서 소방차 32대로 물을 퍼부었지만 지붕이 완전 방수라[12] 2층의 지붕 내부에 붙은 불을 끌 수가 없었다. 목건축은 나무가 물에 닿으면 썩으므로 지붕 방수에 엄청 신경쓰기 때문이다.[13] 그래서 전문가들은 기와를 걷든가 서까래에 구멍을 뚫든가 해서 불이 붙은 부분에 직접 물이 닿게 했어야 한다고 했지만 당시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들은 물론 경찰, 서울시, 현장 생중계를 하던 방송사 등 아무도 이를 몰랐다. 문화재청의 전문가들은 너무 늦게 도착해서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소방방재청에선 이런 고건축물 화재에 대비한 훈련을 전혀 한 적이 없어서 소방관들은 지붕이 완전 방수라는 걸 몰랐다고 한다. 황평우 문화재연구소장 등 몇몇 민간 문화재 전문가가 TV 중계를 보고 급하게 연락을 시도하고 현장에 나왔으나 너무 다급한 상황 탓에 모두 무시당했다고 한다. 당시 전국의 수많은 유적지에도 소화기만 비치되어 있었지 화재 상황에 대비한 구체적인 매뉴얼 따위는 전혀 없었다고 한다.
또 소방관들이 내부에서 천장에 구멍을 뚫고 물을 뿌리려고 했으나 붕괴 위험이 있어 포기했다고 한다. 전통 목건축물은 나무를 겹겹이 쌓아서 만들어진 것이고 무거운 지붕의 무게로 기둥을 누르는 구조이기 때문에 기둥 등 구조체가 타게 되면 붕괴하기가 쉽다는 이유였다.
사실 목조 건축물이 5시간 이상 버틴 것도 기적이다.[14] 전근대 화재 진화는 연소(延燒)의 방지에 중점을 둔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건물에 붙은 불을 끄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불이 붙은 건물은 포기하고 그 옆의 건물을 부숴 불이 더 이상 번지게 하지 않는 방법[15]이다. 산불이 났을 때 맞불을 놓아 불이 더 번지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원리다.
숭례문은 국보의 지위를 유지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숭례문이 '국보 1호'[16]라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개요 문단에서 보듯이 완전히 소실되지는 않았다. 물론 막대한 피해를 입어 예전과 같은 가치는 회복하기 힘들다. 2005년 양양 산불로 종각이 전소되어 소실된 낙산사 동종은 종각이 탔다고 해제된 게 아니라 종 자체가 녹아서 구릿물로 변해 사라졌기 때문에 그해 7월 7일 보물에서 지정 해제되었다.
사고 이후 서울소방에서는 초동진화에 실패한 것이 상당한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2010년 16억 원의 예산을 투자해 오스트리아 로젠바우어에서 MAN TGS 차대 무인 파괴 방수탑차를 도입했다. 중부소방서 본서(무학 119안전센터)에 가 보면 구경할 수 있었다.[17] 하지만 2022년에 한국산 특장사인 진우SMC의 무인파괴방수차로 교체되었다. 전임 차량은 광나루 안전체험관에 가면 구경할 수 있다.[18]
4.2. 반론
소방 인력은 전통 가옥 화재에 대처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숭례문과 같은 문화재를 제외하더라도 일선 소방관들에게 화재에 취약한 전통 가옥 화재는 익숙한 화재다. 그런 소방관들에게 전통 가옥 화재는 지붕을 뚫어 위에서 아래로 방수한다는 사실은 기본 중의 기본이며 소방관들이 잘 몰라서 대처가 늦어진 것이 아니다. 서울과 같은 도시에도 전통 가옥이 존재하며 실제로 전통 가옥 화재도 간혹 발생하기 때문에 일선 소방관뿐만 아니라 일선에서 뼈가 굵은 화재 진압 지휘관이라면 전통 가옥 화재 진압 방법을 모를 수 없다.일반적인 전통 가옥 화재 진압 시에는 가장 먼저 지붕을 뚫는다. 그러나 숭례문은 일반 가옥과 같이 출동 후 곧바로 지붕을 뚫을 수 없었다. 지붕을 뚫어야 제대로 화재를 진압할 수 있음에도 바로 지붕을 뚫지 않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숭례문의 지붕을 바로 뚫지 못한 이유는 숭례문이 국보 1호 문화재였기 때문이다. 화재 진압 초기 서울 소방본부가 대전 문화재청에 화재 진압 방식을 논의했는데 문화재청은 문화재가 손실되지 않도록 신중하게 불을 꺼 달라고 당부하였고 이에 서울 소방본부는 초기에 적극적으로 진화에 나서지 못했다. 기사 초기 진화로 화재가 잡히지 않자 소방 관계자는 지붕을 뚫어 진화하기 위해 문화재청과 협의[19]하고 있었다. 소방 인력이 전통 목구조 건축물의 구조를 몰라서 지붕에 물만 뿌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불길이 잡히지 않자 문화재청은 파괴를 허가했고 소방 인력이 숭례문의 지붕을 뚫으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숭례문의 지붕이 일반 전통 가옥의 지붕보다 훨씬 단단했기 때문에 지붕을 뚫지 못했다. 일반 전통 가옥은 소방차량의 장비로 비교적 쉽게 지붕에 구멍을 뚫을 수 있지만 숭례문의 지붕은 예상 외로 훨씬 강력한 도구가 필요했다. 결국 붕괴 위험으로 소방 인력은 누각에서 먼저 철수하고 지붕에서도 철수하였으며 이후 지붕이 붕괴하였다.
이처럼 소방 인력이 전통 가옥의 지붕 구조를 잘 몰랐다는 식의 비판은 문화재 전문가들의 억측에 불과하며 소방 관계자의 반론 없이 이를 급하게 받아쓰고 베껴쓴 언론 기사들에 기인한 것이다. 문화재라고 하더라도 화재 진압을 최우선으로 지붕을 바로 뚫었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화재 진압을 위한 문화재 파괴에 대해서 소방에 완전 면책을 주도록 개선해야 한다거나, 문화재청이 좀 더 일찍 파괴 허가를 내 주어야 했다거나, 일반 전통 가옥의 지붕보다 훨씬 단단한 숭례문의 지붕과 같은 단단한 지붕을 뚫기 위한 장비와 파괴 훈련이 있었어야 했다는 식의 비판이어야 건설적인 비판일 것이다.
5. 복구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예 사라지다시피 한 2층과 달리 1층 누각은 전부 불탔을지언정 상당 부분이 구조를 유지[20]하고 있었다는 점과 숭례문 안에 있던 가치 있는 문화재의 상당수는 1960년대에 해체, 보수할 때 꺼내서 누각 안에 보관하고 있다가 몇 년 전에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서 무사하다는 점이다.<colbgcolor=#000> 붕괴 이후의 현판 모습 |
양녕대군이 썼다고 알려진 현판은 떼낼 시간이 없어서 연결 부분을 톱으로 절단하여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바람에 약간 파손되긴 했지만 지켜냈다. 현판을 떼어낼 당시 조심스럽게 떼지 않고 바닥에 떨어뜨려 약간의 논란이 있었으나 현판의 엄청난 무게로 인해 몇몇 사람의 힘으로는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21] 어쩔 수 없었음이 알려졌다. (블로그 글)
복구까지는 짧게는 1년 반에서 2년 정도로 예상되었지만 치명적인 문제는 광화문을 보수하느라 목재로 사용 가능한 정도의 수령(樹齡)이 된 여분의 한국산 소나무가 존재하지 않았다. 건축에 쓰이는 목재는 크기가 적당한 나무도 있어야 하지만 벌목 후 수년 동안 건조를 시켜야 하기 때문에 바로 조달할 수 없다. 그래서 광화문을 다 분해해 놓은 상태에서 거기에 쓰일 목재를 숭례문으로 돌려서 썼다고 한다. 목재가 부족한 이유는 6.25 전쟁 때문에 한국에서 목재로 쓰일 만한 소나무 씨가 말라 버려서이다. 다행스럽게도 태조 이성계의 5대조가 안장된 준경묘(濬慶墓) 경역의 금강송 20그루를 숭례문과 광화문 복원에 사용하는데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동의해 이를 벌채한 것[22]을 비롯하여 곳곳에서 소나무를 기증하겠다는 고마운 시민들 덕에 재목 충당에는 문제가 없었던 듯하다. 한편 자재를 뺏긴 광화문이 먼저 복원되었다는 점이 미스터리로 얘기가 간간이 나온다.
5.1. 복원 문제점들
- 말이 많은 대목장인 신응수부터 시작해서 문제점들이 꽤 있어서 복원에 대해 우려가 있었다. 전통 방식으로 복원하겠다고 했지만 일제강점기의 시멘트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굴착기나 그라인더를 이용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재미교포 건축가가 실측 자료를 주겠다고 했는데도 붕괴 3년 후에야 실측 도면을 찾은 사례도 있었다. 다만 실제 복원 공사는 2010년부터 진행했기 때문에 공사 시작일로부터 계산하면 1년이다.
- 또 복구 공사가 전통 기법에 기반을 두지 않은 설계에 따라 진행되어 원형 훼손의 우려가 있다는 감사원의 감사 결과가 공개되었다. 일단 복원 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최대한 전통 방식을 따르긴 했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어서 전통 안료의 경우 도저히 복원에 쓰일 양과 질이 충분히 되지 못해서 상당 부분 일본산 안료를 사용했다고 한다.. 한반도 땅에서 나는 원료 자체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일본산을 많이 사용했었다고 한다[출처필요]. 또한 이 당시 복원을 공장제 기와로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추후 재시공할때 기와도 싹 갈아엎게 만든 문제점도 있었다.
<colbgcolor=#000> 복원(방화) 전 | <colbgcolor=#000> 복원 후 |
- 숭례문의 벽화 복원이 논란이 되었던 적이 있었는데 숭례문에 그려진 벽화가 화재가 나기 전에 있었던 모습과 너무 달라서 네티즌들은 원래의 용 그림을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용처럼 만들었다며 비난했다. 역사학자 전우용도 자신의 트위터에 단가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라고 하여 논란을 부추겼다.[트윗] 그러나 단청장[25] 의 아들 측은 화재가 나기 전에 있었던 그림은 1963년 복원 공사 때 그려진 것이고 현재 그려진 그림이 오히려 원판에 가깝다고 밝혔으며 문화재청에서도 1963년 복원 공사 당시의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한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26]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전우용도 관련 트윗을 삭제하고 사과문을 올렸다. 사실 조선 시대의 용 그림을 보면 의외로 지금 애니메이션에 나올 것처럼 희화화된 용이 많다. 용을 희화화하는 것은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유행했던 것으로, 한나라 시기부터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 왔다.
- 2013년 2월 가림막 철거 후에는 좌우 성벽 복원 부분이 논란이 되었다. 물론 원래 성문이었고 서울특별시가 한양 성곽 복원 사업을 진행하면서 성벽 복원 자체는 합당한 일이긴 한데 아무리 주변 도로 문제라고 하지만 성벽의 좌우 비대칭이 그러려니 하기에는 너무 심한 비대칭인 것이었다. 화재 이전 성벽 없이 숭례문 단독으로 서 있었을 때의 장엄한 대칭미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소수이지만 오히려 이런 비대칭미가 낫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수원화성은 도로 위로 성벽을 육교 형식으로 만들어 복원한 사례가 있고 한양도성의 성곽들 역시 전체적으로 복원 중이라 숭례문 서쪽 성곽도 곧 복원될 가능성이 높다. 그 외에 상세한 복원 공사 내용은 KBS 다큐멘터리 '숭례문 1911일의 기록'을 참고.
- 2013년 10월 숭례문 단청 20여 곳이 벗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문화재청에서는 색을 밝게 하기 위한 일종의 배경색인 호분(흰색)을 너무 짙게 발랐고 또 그 위에 주색을 칠했더니 무거워져 전통 안료인 아교로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박락[27] 현상이 일어난 것이라고 밝혔다. 아무래도 아교가 합성 안료보다 약해 일어난 현상으로 보인다. 합성 안료의 경우 녹색 위에 바로 주색을 칠해도 색이 잘 나오지만 전통 안료는 잘 나오지 않는다. 아마 이런 자잘한 사고는 앞으로도 자주 일어날 것으로 보이는데 전통 기법으로 복원하는 것이 옳긴 하지만 이미 전승이 끊긴 방법으로 무리하게 복원한 측면도 있다. 일례로 문화재청에서는 녹색 안료의 원석인 공작석을 힘들게 구해 왔다고 홍보했지만 공작석을 받아든 단청장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며 오히려 신기해했다고.
- 이 항목 본문에 언급되어 있는 문화재 전문가 황 모 씨는 라디오에서 전통 기법이었으면 안료가 나무에 스며들어 떨어지지 않는데 일본식 안료를 써서 그랬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위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채색 기법은 기본적으로 광물성 안료를 붙이는 것이다. 다만 그 안료나 붙이는 데 사용하는 재료가 무엇인지(예를 들어, 아교나 계란 노른자)에 따른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항목에 언급된 것처럼 전승이 제대로 되지 않은 기술들을 전통에 집착해서 무리하게 적용하다가 생긴 불상사인 것이다. 숭례문 부실 복원 논란이 한창 거셀 때의 일로 사실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고 논란을 만들어낸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 기타 부실 복구 사항에 대해서는 재시공 통보 문단 참고.
6. 사건의 파장
정치권에서는 책임 공방이 벌어졌다. 당시 민주당 측은 실질적으로 관리한 서울특별시[28]와 중구청에 책임이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오세훈 서울시장은 숭례문 소실에 책임 통감하다며 대시민 담화문을 발표해 서울시의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를 했다. # 이후 숭례문 복원에 참가해 광화문 복원 자재를 사용하겠다고 검토했다. #
당시 문화재청장이었던 유홍준은 이 일로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문화재청에서 직접 관리하는 문화재의 수는 극히 적다(궁궐과 왕묘 정도). 문화재청 예산이 4천억 원 정도고 대한민국의 문화재 개수는 다 합치면 대략 2만 여 개다. 그래서 문화재청은 각 지자체에 보호 계획을 짜 주고 지자체에서 비용을 대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곳에 누가 돈을 쓰고 싶을까. 하다못해 서울시장 즈음 되는 큰 사람은 문화재청장보다 사실상 강한데... 그래서 유홍준은 문화재청장으로 있던 당시 1문화재 1지킴이 운동을 벌이고 스폰서로 KT를 써서 전국 문화재에 무인 경보 시스템을 돌렸다. 그러나 특별 대우는 하지 못했고 그리하여 결과는...
사건 당시 파장이 엄청났다. 모든 언론의 탑기사로 숭례문 화재를 내세웠으며 외신에서도 비중 있게 다뤘을 정도였다. 전소 당시 주변의 시민들이나 언론사에서 찍은 동영상을 보면 붕괴됐을 때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데 이건 무섭거나 놀라서가 아니라 진짜 안타깝고 아쉬워서 내는 소리였다. 심지어 현장에서 우는 사람들도 있었고 뉴스를 보며 눈물을 흘린 사람들도 많았다. 전소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는 등 웬만한 유명인 추모 현장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또 시골에서 유림들이 상경해서 의관을 정제하고 엎드려 대성통곡하는 일도 있었으며 그 로터리를 지나가는 차량들이 짜증을 내면서 경적을 울려 대거나 창 유리를 내리고 나라 욕을 퍼붓는 운전자들도 종종 보였다. "지못미", 즉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도 당시 숭례문 붕괴 현장에서 다시 유명해진 유행어였다.
뉴스 방송사 YTN은 사옥이 숭례문이 내려다 보이는 위치에 있어서 어느 언론보다 빨리 사건을 보도할 수 있었다. 다른 뉴스를 보도하는 와중에도 박스로 계속 숭례문 화재 현장을 보도했을 정도. 덕분에 YTN의 최고시청률은 사상 최고인 7.37%을 기록했다.[29] 대신 이후에는 숭례문의 잔해가 보이는 배경을 화면에 비추기 애매해져 버렸다. 이 때문에 제대로 된 가림막을 설치하기 전까지 숭례문을 비추지 않았다.
일본의 아사히 신문은 2월 14일 "남대문 화재-한국의 슬픔을 생각한다(南大門炎上―韓国の悲しみを思う)"는 사설을 게재했다. 1950년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복원한 교토의 금각사(킨카쿠지)를 생각하면 남의 일 같지 않으니 이웃 나라의 슬픔에 마음을 담아 협력할 방법을 찾아보자는 내용이다.
MBC 무릎팍도사에서 당시 문화재청장이었던 유홍준 교수(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가 나와서 "숭례문의 운명과 나의 운명은 오버랩이 됐다. 내가 아무리 문화유산에 대해서 잘했다고 할지라도 국보 제1호 숭례문 화재 시절에 문화재청장이었다는 것은 죽고 난 다음에도 기록에 남을 것이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소방관들을 대신해 기와를 뜯어냈을 것이다."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
문화재청에서는 이 사건이 일어난 2월 10일을 문화재보호법을 통해 '문화재 방재의 날'로 지정하였다.
2018년 3월 9일 교통사고 보험금을 못 받았다고 43세 남성 장씨가 홧김에 흥인지문에 무단침입하여 불을 붙여 방화가 일어나 숭례문의 악몽이 재현될 뻔했으나 4분 만에 조기 진화되어 담벼락이 조금 그을렸을 뿐 큰 피해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이 사건이 일어난 날은 우연스럽게도 숭례문 방화범이 출소한 다음 달이다.
6.1. 숭례문 괴담
숭례문 붕괴 이후, 조선의 정도전이 "숭례문이 전소하면 도읍과 나라의 운이 다한 것이니 멀리 피난을 가야 한다."는 말을 실록에 남겼다는 풍수 괴담이 돌아 사회 분위기를 흉흉하게 만들기도 했는데, 디시인사이드의 모 회원이 창작임을 밝히고 만든 짤방이 와전되어 퍼진 소문이다.일단 정도전의 생전 정치적 · 철학적 성향에 비추어 보면 저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 정도전은 철저한 현실주의 개혁가이며 풍수지리나 음양도 같은 미신과 괴력난신을 혐오하여 유학 이외의 가르침은 일체 배격했다. 당연히 땅의 기운이 어떻다느니 하는 얘기도 전혀 믿지 않았다. 이성계가 도읍을 옮기는 문제에 대하여 재상들의 의견을 물었을 때에는 "신은 음양술수 그런 거 모릅니다. 그러나 중국 역사를 살펴봐도 천도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나라를 다스리는 건 땅이 아니라 사람에게 달린 것입니다. 지기의 성쇠 어쩌고 하는 건 자기들이 생각이 있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옛날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겁니다. 술수하는 자 말고 선비의 말을 들어 헤아리십시오."라는 상소를 올려서 도읍을 옮기는 데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30] 다만 천도가 결정되자 정도전은 도시 설계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풍수상으로 숭례문이 광화문의 해태상과 숭례문 옆에 있었던 남지라는 연못[31]과 함께 경복궁의 화기를 막는 비보수단으로 만들어졌고 숭례문의 현판이 세로인 것도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서라는 게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남지는 도시계획으로 없어지고 해태상은 광화문 복원 작업으로 치우면서 숭례문까지 없어져서 관악산의 화기가 청와대로 바로 간다는 소리가 나오기는 했다. 여기서 화기(火氣)는 단순히 불의 기운이 아니라 전쟁이나 재앙과 같은 살(煞)을 의미한다고도 한다.
그런데 풍수고 뭐고 조선 왕조 시기에 도읍의 정문인 숭례문이 전소할 정도면 적성세력이 이미 도읍에 진입했을 상황이니 (아니면 런던 대화재 쌈싸먹는 재해가 벌어졌다든가) 멀리 피난을 가는게 정답이다. 즉, 괴담의 허구와 진실은 둘째치고 저 말의 의미 자체는 틀린 건 아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조선 왕조 시기에만 해당되는 말인 데다, 설사 조선 왕조 시기라고 해도 당연한 소리를 대단한 것처럼 말하는 시점에서 역시 실제로 말했을 가능성은 없다.
6.2. 복원 후
2013년 4월 29일 숭례문 복구공사가 완료되었고 같은 해 5월 4일부터 공식 개방되었다.화재 이전 숭례문, 화재 당시 모습, 복원 이후 숭례문의 모습 비교는 여기서 볼 수 있다.
복원 후에 심하게 훼손되어 국보 1호의 가치가 사라져 국보 2호나 보물 1호 혹은 불국사에게 그 자리를 넘겨줄 거라는 추측이 일각에서 나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국보의 번호는 크게 의미가 없는 것이, 그저 등재된 순서대로 번호가 매겨진 것이 국보의 번호였다. 그러나 숭례문을 소개할 때 굳이 '국보 1호'를 강조하는 그런 관행 때문에 일반 대중에게 상징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위치여서 이는 한때 여론을 불태운 적이 있었다. 이와 같이 국보 1호, 보물 1호 같은 숫자 타이틀에 대한 대중들의 그릇된 인식 때문에 결국 2021년 11월 19일부터 국보와 보물에 번호를 제외하기로 하였다.
사건 이후 숭례문과 함께 한양도성 일부를 복원하는 작업을 시작했으며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했다. #
복원이 끝나 개방되고 나서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보여주었다. 특히 주말에는 바글바글 사람들이 몰려와서 숭례문을 사진에 담고 숭례문 안내를 듣는 등 활기가 넘쳤다. 이후 숭례문이 복구된 이후로는 열기가 좀 가라앉은 편이지만 여전히 사람은 좀 있는 편이다.
복원한 숭례문의 기단을 보면 색깔이 서로 다른 돌들이 함께 있어서 뭔가 이질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는 숭례문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부재를 최대한 재활용하였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서 때가 쌓인 옛 부재와 새 것인 돌로 만든 부재가 함께 있는 것. 현대에는 문화재를 복원할 때 기존의 부속 부재를 재활용하는 방향이 대세인데 '테세우스의 배' 역설을 해결하기 위한 한 방법이다.
6.3. 숭례문 부실 복구 및 재시공 통보
복원된 지 5개월 정도 경과한 2013년 10월 초에 단청이 벗겨져 있는 것이 발견되어 부실 복구가 아니냐는 논란이 나왔다.좀 더 자세한 조사를 위해서 문화재청은 숭례문 종합점검단을 구성하여 종합적인 현장 확인을 하고 원인 분석 및 향후 대책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현장 확인 결과 단청의 벗겨짐뿐만 아니라 기와가 깨져 있고 현판이 금이 가 있는 등 다수의 하자가 발견되었다.
SBS 뉴스(캡처본)
단청에 제대로 된 아교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의혹이 나왔다(중앙일보).
덜 말린 부실 목재를 사용했다는 의혹도 나왔다(중앙일보).
결국 부실복구 특별조사에 감사원 감사청구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중앙일보). 대한민국 국보를 부실공사하다니 충격과 공포 그 자체. 변영섭 문화재청장은 부실복구에 대한 책임으로 전격 경질되었다.
숭례문 복원공사가 부실로 이어진 것은 “공기(工期)를 맞추기 위해 서둘러 공사를 진행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공기를 하루 초과할 때마다 1670만원의 지체금을 내야 해서 부실공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내용(중앙일보)이다.
한편 복원 과정에서 사용된 목재가 일부 빼돌려졌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이 의혹에 대한 경찰 수사가 시작되었다(헤럴드).
2014년 1월 18일, 숭례문 부실공사 관련 검증 조사를 했던 충북대학교 박원규 교수가 학과사무실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뉴스1). 경찰의 조사 결과 자살로 결론이 났다(KBS).
2014년 3월 4일, 숭례문 목재가 DNA 분석 결과 러시아산이 아니고 한국산이 맞다는 뉴스가 나왔다(연합뉴스).
2014년 5월 15일, 감사원이 감사결과 발표를 통해 복구 부실내역을 발표했고 문화재청에 재시공 통보했다(연합뉴스).
숭례문 원형 복원은 장기간 미완으로 남게 됐다(뉴스1).
2014년 9월 9일, SBS에서 전문가와 함께 내부를 점검했는데 재앙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숭례문 화재 10년을 맞이한 2018년에 단청이 떨어지는 박락 현상을 제외하면 문루 구조 변화, 목재 벌어짐 등은 발생하지 않아 전반적으로 큰 이상이 없는 것으로 파악했다고 밝혔다. 단청박락은 복원 이후 1년간 453곳에서 발견됐으나 지난 1년 동안 29곳만 확인되어 점차 나아지고 있다고 한다.
2019년에는 전통 아교를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엉터리 복원 숭례문 단청, 재시공할 전통아교 찾았다
2022년에는 숭례문 단청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천연안료가 아닌 흔한 화학안료와 접착제를 사용한 것이 밝혀졌다. 또한 이 과정에서 인건비 3억, 재료비 9억 가량을 전술한 방법으로 빼돌렸다가 드러난 혐의가 밝혀져 정부는 홍창원 단청장[32]과 그 제자인 한씨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하였고 총 14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숭례문 단청 부실공사' 단청장, 정부에 9억 배상 판결 '숭례문 단청 부실공사' 책임자, 정부에 14억 배상 판결
7. 매체
-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23년 4월 2일자에서 이 부분을 다루었다.
- 차트를 달리는 남자 395회 당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대형 사고편 7위 덴마크의 400년 역사를 지닌 건물 화재 사고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덴마크판 숭례문 방화 사건'이라고 언급됐다.
- 2024년 11월 21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에 다룰 예정이다.
8. 같이 보기
9. 둘러보기
[1] 600년의 역사를 가진 국보이기 때문에 재산 피해를 감히 어림할 수 없다.[2] 소방관 총 인원[3] 소방차 총 개수[4] 이전에 로터리 안의 섬처럼 되어 접근이 힘들었던 숭례문을 일반에 개방한 것은 이명박 서울시장이었고 비용을 이유로 야간에 경비 인원을 배치하지 않고 무인 경비 시스템만 가동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히 문화재 보호를 위해서는 정신병자 등의 돌발변수도 충분히 고려해야 했다. 이러한 고려가 부족했던 것이 실책으로 지적된다.[5] CCTV 영상을 보면 8시 44분 48초부터 2층 뒷면에서 흰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온다.[6] 그래서 당시에는 일본 건국 기념일에 불탔다'는 말이 돌았다.[7] 사실 전통 건축물에서 기와가 자연히 흘러내리면 사실상 붕괴된 것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있다. 기와가 흘러내린다는 것은 각재와 기와 사이가 화재로 상실되었다는 의미이고 이는 곧 건조물이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보통 기와가 흘러내리기 시작한 후부터 거의 즉시 건조물이 붕괴됨을 고려할 때 숭례문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화재를 버틴 것이라고 할 수 있다.[8] 거품으로 산소 차단.[9] 범행 당시 68세.[10] 다들 알다시피 종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11] 아래에 40대가 방화를 저지른 사건도 짧게 서술되어 있고 그 외에도 10대, 20대 등 나이에 관계 없이 문화재에 대한 방화 또는 훼손 시도는 많다.[12] 기사 자료 참조. 애초에 기와지붕이라는 것이 반영구적인 지붕 건축을 목적으로 고안된 자재인데다, 기와는 불에 구운 흙이기 때문에 수분이 쉽게 통과할 수가 없다. 게다가 자료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와 아래에도 바로 목재가 드러나는 게 아니라 석회와 마사 등을 섞어 발라놓았다. 이런 상황이니 지붕에 물을 백날 뿌려봤자 내부로 수분 침투가 불가능하다.[13] 비 오는 날 궁궐 등지에 가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아무리 비가 거세게 퍼부어도 기둥이 습기는 먹을지언정 절대 통로나 건물을 받치고 있는 기둥까지 비가 들어오지 않는다.[14] 2005년 양양 산불 당시 낙산사는 소방대원들이 제대로 진화작업에 나서기도 전에 전소되어 버렸다. 단청을 한 목재는 그렇지 않은 목재보다 내화성이 좋다.[15] 조선시대의 소방청인 금화도감의 금화군에게 지급된 물품 중에는 물양동이도 있지만 이들의 주요 장비는 쇠스랑과 도끼, 망치였다. 이들이 하는 일도 화재가 발생하면 최대한 빠르게 화재 중심지 근처에 있는 가연성 물질들을 때려부숴서 화재 현장에서 치워 버리는 일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소방관들이 힘세고 강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16] 국보 1호라는 명칭은 현재 국보로 대체되었다. 국보의 가치로 번호를 매기는 것이 아니라 관리번호라는 의미 때문이다.[17] 물론 마냥 순수한 이유만으로 도입했을 리는 없고 좀 더 좋은 장비를 도입하기 위한 예산을 타낼 구실로 이 사건을 이용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좋은 소방 장비가 생겨서 국민의 안전에 도움이 되면 되었지 나쁠 건 전혀 없기 때문에 좋은 결정인 셈이다.[18] 2022년 서울 남대문시장 화재 기사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기존 차량과의 다른 점은 천장과 벽의 파괴방식이 스팅어 HRET(High Reach Extendable Turret)가 아니라 그냥 뚫고 들어가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또 한국산이라 전임 차량과 비교하면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중앙119구조본부 시흥, 서산, 울산, 구미, 익산, 충주119화학구조센터에 한 대씩 배치되어 있다.[19] 소방 관계자는 "지붕을 뚫어서 진화하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나 숭례문이 문화재이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현재 문화재청과 협의해 지붕 일부라도 뚫어서 진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기사[20] 흔히 알려진 것과 다르게 2층은 10% 가량이, 1층은 절반 이상이 남았다. 다만 2층의 붕괴 및 화재의 열, 그리고 진화 과정에서의 피해로 안전상 다시 사용할 수 있는 부재는 제한적이었다.[21] 완성된 현판의 크기는 건장한 성인 남성보다 클 뿐더러 무게도 150kg을 우습게 넘긴다. 더구나 현판이 붙어 있는 2층이 불타고 있었으니 제대로 현판을 분리할 준비를 할 여유는 없었다.[22] 벌목 하기 전에 벌목자가 '어명이요!'라고 외치고 벌목을 시작하였다. 기사[출처필요] [트윗] "숭례문에 '복원'된 용 그림이 화제군요."라며 "용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건, 십중팔구 '단가'일 겁니다. 디즈니 캐릭터 같은 이 용이 '가격' 중심 문화의 상징인 셈이죠."라고 주장했다가 이후 그가 틀렸다는 것이 밝혀지자 "복원 기준으로 삼은 건 1963년의 용 그림이라는 데, 참고하세요. '단가' 관련 트윗들은 지우고 당사자에게 사과드립니다."라는 트윗을 올렸다.[25] 6.3에 서술된 바와 같이 숭례문 복원 당시 화학안료 및 접착제를 사용한 것이 밝혀져 2017년 단청장 보유자 자격을 박탈 당하였다.[26] 다만 1963년 복원 당시에 오류가 있었고 문화재청이 별다른 검증 없이 1963년 단청을 따르기로 했다면 오류 역시 그대로 답습한 것이란 점에서 문제가 있다. 위의 글대로면 1963년의 단청은 조선 초기를 기준으로 잡았으나 숭례문은 여러 차례 중개축을 거치며 조선 초기의 모습은 전혀 남지 않았고 단청 또한 중개축 과정에서 그 시대의 양식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27] 剝落, 나무 등에 새긴 그림이나 글씨가 오래 묵어 긁히고 깎여서 떨어짐[28] 오세훈이 서울시장으로 재임 중이었고 그 전임은 이명박이었다. 이명박은 2006년 3월 시민들에게 문화재를 직접 접하게 한다는 취지로 숭례문을 개방했다.[29] 이 기록은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이 일어난 2011년 3월 11일의 11.02%까지 3년간 최고 기록이었다.[30] 예로부터 유가에서는 '자불어 괴력난신'에 입각해 성명학, 풍수지리, 사주팔자 등을 잡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게다가 꼬장꼬장한 성정에 근본주의자였던 정도전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기실 이런 잡학들이 유행했고, 심지어 조선왕조실록에도 여러 번 등장한다. 정도전과 동년배 유학자들만 봐도 하륜은 잡학에 두루두루 능통한 편이었고 조준 또한 무인정사 당시에 집에서 점을 치면서 사태를 관망했다는 기록이 있다.[31] 서울역 인근 서울스퀘어 터에 있었다.[32] 전통 복원에 자신 있다고 문화재청에 밝혔지만 사실 전통 기법 경력은 1970년 스승의 공사에 참여한 게 전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