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일급상장 중화민국 군사참의원원장 천댜오위안 陳調元(진조원) | Chen Diaoyuan | |
<colbgcolor=#458B00> 이름 | 천댜오위안 진조원 | 陳調元 | Chen Diaoyuan |
자 | 설훤(雪暄) |
별명 | 바보(笨蛋) |
출생 | <colbgcolor=#FFF,#2d2f34>1886년 11월 12일 |
청나라 허베이성 (現 중국 허베이성 바오딩시 통커우) | |
사망 | 1943년 12월 8일 (향년 57세) |
중화민국 충칭시 베이베이구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학력 | 북양속성무비학당 |
직업 | 군인, 정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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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 북양정부 직예군벌의 장군. 제2차 직봉전쟁 이후 국민정부로 전향한다.특이하게도 별명이 바보였는데, 나쁜 의미가 아니라 군벌이 할거하던 시대에 몇 안되게 인성이 좋은 인물이라 이런 별명이 붙었다.
2. 일생
2.1. 초기
천댜오위안은 오늘날의 허베이성 바오딩시 통커우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누나는 그를 북양속성무비학당에서 공부시키기 위해 짚으로 돗자리와 바구니를 만들어서 그를 뒷바라지 했다. 졸업 이후에는 후베이성 우한시 우창구의 육군 제3사관학교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허잉친과 탕성즈도 이 학교의 제자여서 그를 만나면 꼬박꼬박 '선생님'이라고 불렀다.2.2. 신해혁명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우창봉기가 발생하고 천댜오위안은 청 조정이 사관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을 징집해서 끌고가는걸 피하기 위해 직책을 버리고 베이징으로 도망갔다. 그는 당시 육군에서 자문 과장으로 일하던 친구 리빙즈(李炳之)의 집에 숨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 정부가 혁명군 진압을 위해 대규모 군대를 조직했는데, 지휘관인 돤치루이(段祺瑞)와 펑궈장(馮國璋)이 육군부에 참모 인재를 요청했다. 그러나 육군대신 재타오(載濤)가 사람을 추천할 수 없어 난처해하던 상황에서 리빙즈는 그를 인재로 추천했다.중화민국이 성립된 이후, 펑궈장이 장쑤성 도독으로 임명되자 천댜오위안은 그를 따라다니며, 30세도 되지 않아 난징 헌병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펑궈장에게 건의해 장쭝창이 등용되었고 그 뒤로 둘은 각별한 친구가 되었다. 천댜오위안은 키가 크고 항상 친근하고 소탈한 외모로 "천바보(陳傻子)"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언변이 뛰어나고 사교에 능했다. 펑궈장은 그를 외교 대표로 삼아 쑤저우와 상하이 일대의 군정 인사, 재계 거물, 폭력 조직과 폭넓게 교류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천댜오위안은 위안스카이 사후 직예군벌에 가담하게 된다.
2.3. 안직전쟁
1920년, 리춘이 장쑤성 도독으로 임명되자 쉬하이 진수사가 되어 안휘군벌과 맞서 싸웠다. 리춘이 자살한 이후 같은 북양속성무비학당 동창인 치셰위안이 도독으로 임명되며 그를 신뢰했던 치셰위안은 그를 중국 장쑤성 쉬저우 4성 토벌총사령으로 임명했다.2.4. 제2차 직봉전쟁
제1차 직봉전쟁(直奉戰爭)에서 패배한 후, 봉계 군대는 관외(關外)로 철수했지만, 장쭤린은 여기서 물러서지 않고 곧바로 제2차 직봉전쟁이 시작되었다. 1924년, 제2차 직봉전쟁이 발발하고 봉천군벌에 가담한 장쭝창이 쉬저우로 진군하자, 천댜오위안은 5월에 쉬저우를 내주고 봉천군벌에 그대로 항복하게 된다. 이 선택으로 천댜오위안은 사단장으로 진급하고 장쑤 군무방판에 임명되었지만 그의 직속 상관이었던 양위팅은 투항으로 승진을 한 그를 못마땅해 했고 그를 제거할 기회를 엿봤다. 하지만 천댜오위안이 병력을 철저히 경계 태세로 유지해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천댜오위안은 겉으로는 단순하고 둔한 사람인 척하며 "한나라의 대장부는 정직하다"고 자칭했지만, 실제로는 매우 영리한 인물이었다. 그는 높은 지위까지 오르기 위해 천부적인 참을성과 은신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양위팅의 의도를 명확히 알았으나 여전히 웃으며 공손한 태도를 유지했고, 양위팅이 자신을 무능하다고 착각하도록 만들었다. 천댜오위안은 뒤로는 직계의 마지막 세력인 쑨촨팡과 비밀리에 접촉해 힘을 합쳐 양위팅을 몰아내고 봉계에서 이탈하기로 약속했다.
쑨촨팡은 단 5일 만에 번개 같은 공격으로 동북의 봉계 군대를 동남 지역에서 몰아냈다. 천댜오위안은 태도를 바꿔 우디르급 태세전환으로 , 패퇴한 양위팅에게 거액의 자금을 내놓으라고 강요했다. 이어 병사 한 대대를 우이(烏衣) 기차역에 매복시켜 양위팅의 열차를 습격해 그를 제거하려고 했다. 양위팅은 이를 눈치채고 간신히 도망쳤으나, 부유한 강남에서 모은 수십만 위안의 재산은 모두 약탈당했다.
이 병변에서 천댜오위안은 막대한 금액을 챙겼을 뿐 아니라 한 사단의 무기를 노획해 군대를 확장했고, 그 세력은 크게 증가했다. 그러나 이 시기 쑨촨팡(孫傳芳)은 저장, 푸젠, 장쑤, 안후이, 장시 등 다섯 성을 아우르는 연합사령관으로 불리는 대규모 군벌이었고 우페이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직계의 거물로 자리 잡았다.
천댜오위안은 상황을 정확히 읽는 능력이 타고났다. 중국 역사의 요충지인 난징을 장악하고 있던 쑨촨팡은 의기양양하며 다른 세력이 이곳에서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에 천댜오위안은 현명하게 스스로 양저우로 주둔지를 옮길 것을 요청했고, 난징을 순순히 내주었다. 쑨촨팡은 기뻐하며 천댜오위안이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며 그를 안후이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2.5. 국민당의 1차 북벌
1926년 4월, 우한을 점령하여 우페이푸를 순식간에 무너뜨린 중국 국민당 북벌군이 장시성으로 진군했다. 쑨촨팡은 휘하 다섯 성의 총사령관들을 동원해 다섯 개의 방면군을 조직했다. 그러나 천댜오위안이 이끄는 안후이 군은 국민당 북벌군의 기습을 받았다. 그의 주요 장수인 셰수쉰(謝樹勛)은 두 다리가 모두 폭발로 절단되었고, 이로 인해 군대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곧이어 쑨촨팡이 주둔하던 중추 요지인 주장시마저 북벌군에 점령당했다.천댜오위안의 상관 왕푸의 방어구역이 최전선이 되었지만, 왕푸는 무능한 인물이었다. 북벌군 사령관 만야오황(萬耀煌)은 이렇게 회상했다.
"안후이 북쪽의 병사들은 매우 용감했지만, 왕푸는 쥐 한 마리에 불과했다. 쥐가 호랑이를 이끄니 어찌 승리할 수 있었겠는가?"
예상대로 전투가 시작되자 왕푸는 버티지 못하고 부대를 이끌고 패주했다. 왕푸는 도망치는 데에만 능했는데, 자신뿐만 아니라 후방의 부대까지 휘말리게 하여 전군이 홍수처럼 무너져내렸다. 결국 대패는 확정적이었다. 진조원은 장쭝창에게 다시 투항하여 안칭에 주둔했다. 1927년 1월 3일, 진조원은 쑨촨팡 군의 제1방면군 총사령으로 임명되어 안후이 서부에서 장시로 진출했다. 3월 1일, 장쭝창과 쑨촨팡은 천댜오위안의 태도가 불명확하다고 판단하여 그의 부대를 뱅부(蚌埠)와 푸커우(浦口)에서 무장해제시켰다. 이에 진조원의 부대 여장(旅長) 쑨둥윈(孫東雲)은 쉬저우로 도망쳤다. 3월 4일, 진조원은 안칭에서 우후로 이동했다.
천댜오위안은 이미 북벌군과 은밀히 접촉해 투항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는 군수처장 리하이추(李海秋)에게 주장의 은행에서 40만 위안을 긴급히 인출하도록 지시하며 말했다.
"국민당 쪽의 주장 경비사령관 허야오쭈(賀耀祖)는 나의 옛 제자다. 얼마 전 대표를 보내 접촉했더니 우리와 통하는 점이 많더군. 만약 인출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를 찾아가 보게."
한편, 직계와 봉계 군벌은 북벌 혁명군의 압력에 직면해 화해를 이루고 손을 잡아 북벌군에 대항했다. 장쭤린은 장쭝창 부대를 남쪽으로 보내 쑨촨팡의 반격을 지원했다. 장쭝창과 천댜오위안은 과거 참모 시절부터 함께 밥을 먹고 자던 "개고기 친구" 사이였다.
장쭝창은 천댜오위안이 북벌군과 내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를 보내 충고했다.
"장제스가 널 이용하는 것도 잠깐일 뿐이야. 우리는 형제 같은 사이니 함께 죽고 함께 망하는 게 낫지 않겠어?"
천뵤위안은 손뼉을 치며 하늘을 가리켜 맹세했다.
"절대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북양의 동료들에게 죄를 짓는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맹세와 동시에 투항 준비를 서둘렀다, 조건이 협의되자 군복을 갈아입고 국민혁명군 제37군 군장 겸 북로군 총사령관으로 변신했다.
"우리 북쪽 친구들은 대개 굽히기보단 부러지는 걸 택하지만, 나는 굽히더라도 부러지지 않겠네. 시대를 아는 사람이 영웅이고, 시대를 모르면 실패할 뿐이야."
2.6.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중국국민당이 정치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판단한 천댜오위안은 국민정부에 귀순한다는 선언을 발표하고 이로 인해 쑨촨팡의 부대는 결국 분열되었고, 북벌군 제7군 등이 안후이성을 순조롭게 점령했다.한 전투에서 그는 쑨촨팡의 부단장 우야오환(武堯寰)을 포로로 잡았다. 그는 우야오환을 열심히 회유하며 쑨촨팡 군대의 고위층을 설득할 다리를 놓으려 했다. 천댜오위안 앞에서는 일단 겉으로는 충성을 맹세했다.
천댜오위안은 청천백일기를 걸고 투항한 뒤, 진정성을 보이기 위해 국민당 총사령관 장제스에게 독일제 크루프 야포 12문과 산포 16문을 선물로 바쳤다. 산포는 그렇다 쳐도, 독일 크루프 대포는 당시 국내 전장에서 보기 드문 강력하고 최첨단 무기였다. 장제스는 이를 높이 평가하며 천댜오위안과의 관계를 돈독히 했다.
그러나 이후 장제스는 내부 갈등 속에서 사직했다. 천댜오위안은 상황을 예리하게 판단하며, 이 시대에 야심과 능력을 갖춘 인물들 중 장제스를 당할 사람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장제스에게 모든걸 베팅하기로 결심하고, 장제스가 실각한 동안에도 그와 관계를 유지했다. 천댜오위안은 장제스의 고향인 펑화를 여러 번 찾아와 충성을 표하며, 10만 은원을 선물로 보냈다. 장제스가 다시 권력을 잡자 장제스는 천댜오위안을 특별히 신임하게 되었다.
장제스와 탕성즈의 대전이 임박했고, 천댜오위안은 구이저우의 왕톈페이(王天培) 부대와 함께 명령을 받아 양쯔강 북쪽을 방어하고 있었다. 그들은 장제스의 군대를 막기 위해 화살받이가 되었지만, 장제스는 각 성의 주석을 분배할 때 천댜오위안은 배제되었다.
어느 날, 허야오쭈가 연 술자리에서 천댜오위안은 술김에 공개적으로 불만을 터뜨렸다.
"바이충시(白崇禧)는 광시를 가지고 있고, 허잉친(何應欽)은 구이저우를 장악하고 있어. 허야오쭈 너는 후난의 왕이지! 하지만 나는 내 땅이 없어. 앞으로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
그 말에 자리는 싸늘해졌고, 허야오쭈가 농담으로 상황을 넘겼다. 그러나 이후 천댜오위안은 중앙 정부에 대해 불만과 이탈 의사를 자주 드러냈다.
이를 목격한 팡전우는 장제스에게 반란을 일으키자며 제안했지만 천댜오위안은 팡전우의 계획을 듣고 팡전우는 장제스와 비교할 수준이 아니며, 승산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겉으로는 동의하는 척 하고 곧바로 난징에 고발했다.
장제스는 "가짜 회의"를 빙자해 팡전우를 체포했고, 그는 거의 총살당할 뻔했다. 한편, 천댜오위안은 고발의 공로로 승진하며 안후이성 정부 주석 자리에 올랐고, 이어 산둥성 주석으로 전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