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택의 역임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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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前 축구 감독 | ||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최은택 崔殷澤 | Choi Eun-Taek | |
출생 | 1938년 1월 1일[1] | |
황해도 재령군 | ||
사망 | 2007년 2월 5일 (향년 69세)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축구 선수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교수 | |
학력 | 연천중학교 (중퇴) 송도중학교 (졸업) 한양공업고등학교 (졸업) 신흥대학교 (중퇴) 한양대학교 체육대학 (체육학 / 학사) 한양대학교 대학원 (체육학 / 석사[2]) 건국대학교 대학원 (체육학 / 박사[3]) | |
경력 | 前 한양대학교 체육학과 교수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대한중석 축구단 |
감독 | 한양대학교 (1967~1971) 대한민국 U-20 대표팀 (1972) 대한민국 대표팀 (1982) 포항제철 아톰즈 (1985~1986) 옌볜 현대 (1997~1998) | |
코치 | 대한민국 대표팀 (1973~1974) 대한민국 대표팀 (1979~19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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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출신 감독, 교수. 1997년부터 1998년까지 옌볜 푸더팀[4] 감독을 맡았다.별명은 교수님[5]이다.
2. 생애
1938년 1월 1일 황해도 재령군에서 태어났다. 이후 강원도 통천군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국민학교에 입학해 학교 대표 축구선수로 활약하다가 그해 8.15 광복을 맞았다.1947년 부모님을 따라 월남했고, 경기도 연천군으로 이주했다. 연천중학교 1학년 재학 중이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해 피난길에 올랐으나, 피난길에서 길이 엇갈려 가족들과 헤어져 경상북도 대구시(現 대구광역시)까지 흘러갔다. 미군부대의 하우스 보이를 전전하며 살다가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북진하는 미군을 따라 경기도 인천시까지 올라오게 되었고, 운 좋게도 그곳에서 부모님을 다시 만나게 된다.
2.1. 클럽 경력
인천 송도중학교, 한양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흥대학교에 진학했으나, 한양대학교에 축구부가 신설되자 신흥대학교를 중퇴하고 한양대학교 체육학과에 편입했다.졸업 후에는 육군 헌병감실 축구단에 입단해 병역을 해결했고, 이후 대한중석 축구단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이 시기 청소년 대표 및 국가대표 상비군 등으로 활동했으나 빼어난 활약을 펼치지는 못했다.
1967년 현역에서 은퇴 후 1968년부터 모교인 한양대학교에서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2.2. 지도자 경력
1971년 고교대표 상비군이 창설되면서 초대 감독으로 부임했다.1973년부터 대표팀 코치로 활동하여 FIFA코칭 스쿨과 2년 동안의 독일 유학 등을 통해 당시로서는 드문 선진형 지도자였다.
1979년 당시 최연소 41세의 나이로 KFA 리사에 선임되었고, 한양대에 교수로도 임용되었으며, 1982년에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
1984년 K리그 포항제철 아톰즈[6]의 감독을 맡아 1986년 K리그 우승을 이끌었으며,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1997년 10년의 공백을 깨고 중국의 연변에서 조선족들로 구성된 연변 오동팀을 맡아 중국 프로축구 감독으로 복귀했다. 최은택 감독은 수비위주의 실리축구가 판을 치던 중국 축구계에 고급스러운 공격축구를 선보였다. 덕분에 연변팀은 중하위권에서 상위권으로 비약하여 일약 4위를 차지했고 최은택 감독은 1997년 중국 축구 최고 발전상을 받아 중국의 외국인 감독 중 최초로 성공한 감독으로 평가를 받았으며, 이후 중국 축구계에서는 '최 교수님'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단, 1998년 14개 팀 중 11위로 시즌을 마감하며 사임했다. #
1998년 1월 21일 KBS는 수요 다큐멘터리에서 중국 프로 축구 리그에서 돌풍을 일으킨 최은택 감독의 활약상을 특별 취재하여 방송했다.
2007년 2월 5일 오전 3시 30분 폐암으로 작고하자, 시나닷컴 등 중국의 주요 포털 사이트에서 특집 기사를 마련하여 최은택 감독을 추모했다.
3. 기타
- 1980년 8월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체육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이어 1991년 건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체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한민국 축구계에서 선수 출신으로 박사 학위를 딴 것으로는 역대 두 번째 케이스이며, 현역 감독으로서는 최초이다. 첫 번째는 경희대학교 체육대학 교수를 지낸 최영근(崔永根)이다.[7]
- 한양대학교 체육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던 최은택은 1985년 시즌을 앞두고 포항제철 아톰스의 사령탑으로 부임하면서 세간을 놀라게 했다. 대학 교수직을 버리고 프로 축구단 감독으로 간 것도 놀라웠지만 향간에 계약금만 1억 원을 받았다는 얘기가 퍼지면서 관심은 더욱 증폭되었다고.. 이후 최은택 씨는 월간축구와의 인터뷰에서 박태준 회장과 한홍기 전 포철 감독과 대한중석 시절부터 인연이 있어 청을 거절하기 어려웠고 2년간만 포항제철 감독직을 수행 후 다시 한양대학교로 돌아가겠다는 약조를 받은 뒤 감독직을 수락한 것이라 설명하며 논란을 정리했던 바 있다.
4. 관련 문서
[1] 음력 1937년 11월 30일[2] 석사 학위 논문: 知能(지능)과 蹴球機能(축구기능) 및 體力相關關係(체력상관관계): dribbling, dash를 中心(중심)으로(1980. 8).[3] 박사 학위 논문: 漸增(점증) 및 變則運動(변칙운동) 負荷(부하)가 心肺持久力(심폐지구력)에 미치는 影響(영향)(1991).[4] 당시 옌볜 현대[5] 아스날의 그 분이 아니다. 실제로 한양대학교 체육대학 체육학과에서 교수직을 맡았다.[6] 현재의 포항 스틸러스[7] 1959년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男子中高等學校(남자중고등학교) 生徒(생도)의 體育運動(체육운동)활동에 대한 實態調査(실태조사)'라는 학위 논문으로 체육학 석사 학위, 1983년 동 대학원에서 '한국인의 체격에 관한 연구 : 체격, 체지방, 표준체중치, 비만을 중심으로'라는 학위 논문으로 체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