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전주 최씨 |
출생 | 1892년 1월 24일 |
경상도 고성현 구만면 내원리 (현 경상남도 고성군 구만면 화림리 화촌마을)[1] | |
사망 | 1922년 5월 3일 |
경상남도 진주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395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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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2년 1월 24일 경상도 고성현 구만면 내원리(현 경상남도 고성군 구만면 화림리 화촌마을)에서 태어났다.그는 1919년 3월 20일 고성군 구만면에서 나팔소리를 신호로 하여 시위군중이 국천(菊川)장터에 모여들자, 마련된 단상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회화면 배둔리 장터로 향하며 행진할 때 시위 정보를 입수한 일제 군경은 도로에 저지선을 구축했다. 일본군은 말을 타고 시위 행렬 가운데로 돌진해 군중을 짓밟았고, 총칼로 위협했다.
하지만 시위대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격분한 시위대는 말을 탄 헌병을 포위해 크게 꾸짖고, 나팔수는 달려드는 말의 귀에 대고 나팔을 불어 말을 날뛰게 만들었다. 시위를 주도했던 최정원이 총부리 앞에서 가슴을 열어젖히며 “쏠 테면 쏴 보라”고 맞서자 그의 기세에 눌린 일본군은 물러섰다.
구만면 시위대는 일본군의 저지선을 돌파해 배둔시장에 도착했다. 시장에는 전날 밤 연락받은 회화면 시위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700∼800명의 시위대는 해방이 된 것처럼 만세를 불렀다. 일제 군경이 주동자들을 체포하려 하자 최정주(최정원의 동생)가 나서 헌병 오장의 엄지손가락을 꺾어 붙잡힌 동지를 구출해냈다. 결국 이날은 아무도 체포되지 않았고, 시위대는 자진 해산했다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90928/97627409/1
그날 밤 무사 귀가한 그는 이튿날인 21일에는 고성면에서 동지들과 함께 「한인관리 퇴직권고문」을 작성해 경상남도 관내 각 군·면에 발송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얼마 뒤 앞선 만세시위 주동자들을 색출할 때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출옥 후 1920년 10월 서로군정서에서 비밀리에 파견된 윤영백(尹永百)으로부터 군자금 모집 활동에 가담할 것을 권유받았고, 진주군 진주면 평안동(현 진주시 평안동)으로 주소지를 옮기고 만세시위 당시 동지였던 허재기와 함께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다가 1921년 2월 산청군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체포 당시부터 그는 서로군정서군의 정보를 캐내려는 일본 경찰의 끈질긴 추궁을 받게 되었다.그러나 전혀 협조를 하지 않자, 전기고문과 손발톱 뽑히기 그리고 거꾸로 매달려 코에 물 붓고 몽둥이 타작을 당하는 것과 같은 참혹한 고문을 받았다.
1921년 4월 7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고문의 여독으로 1922년 5월 3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고, 이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그의 유해는 2011년 6월 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