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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바 슈사쿠

千葉周作成政(치바 슈사쿠 나리마사)[1]

칸세이(寛政) 5년 1월 1일(1793년 2월 11일) ~ 안세이(安政) 2년 12월 10일(1856년 1월 17일)[2]

1. 개요2. 유년 시절3. 마츠도 이주4. 북진일도류 현무관5. 평가6. 기타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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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도 시대 후기의 무사, 검호이자 북진일도류의 창시자로서, 현대 검도의 원류에 해당되는 검성.

2. 유년 시절

1793년 아버지 치바 주자에몬 나리타네(千葉忠左衛門成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 쓰카코시 마타우에몬 나리미치(塚越又右衛門成道)는 후에 일도류에 입문하여 오카베(岡部) 번사가 되고, 동생 치바 사다키치 마사미치(千葉定吉政道)는 형이 창시한 북진일도류의 보급에 힘쓰며 후일 돗토리(鳥取) 번사가 되었다.

출생지에 대해서는 원래 무쓰노쿠니 구리하라군 하나야마촌(陸奥国栗原郡花山村 / 現 미야기현 구리하라시 하나야마촌) 출생설과 무쓰노쿠니 게센군 이마이즈미촌(陸奥国気仙郡今泉村 / 現 이와테현 리쿠젠타카다시 게센정) 출생설의 두 가지 설이 있었으나, 후일 형 마타우에몬과 동생 사다키치가 각 번에 사관하면서 제출한 신상서(身上書)에 '무쓰 게센군 게센누마촌(陸奥気仙郡気仙沼村 / 現 미야기현 게센누마시) 출생'으로 기록한 것이 밝혀져 현재는 미야기현 게센누마시 출생설이 정설이다.

슈사쿠가 5살 되던 해, 아버지 주자에몬은 게센누마에서 구리하라군 아라타니(栗原郡荒谷村 / 現 미야기현 오자키시 후루카와아라타니지구)로 이주한다. 동번사고(東藩史稿)[3]에는 '사정이 있어 아라타니로 망명하였다'고만 적혀있으나, 일설에 따르면 츄자에몬은 마의(馬醫)로 위장한 센다이 번[4]의 밀정으로서, 지역 주민들의 동정을 살피고 은닉재산을 적발하는 역할을 하였으나,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이탈하였다고 한다.[5]

이주한 아라타니촌에서 치바씨 동족이자, 북진몽상류(北辰夢想流)를 창시한 치바 요시노조 쓰네나리(千葉吉之丞常成)와 그 양자 치바 고우에몬 나리카쓰(千葉幸右衛門成勝)에게 몸을 의탁하며, 검술을 지도받았다고 한다. 또한, 치바 고우에몬과 교류가 있던 유학자인 센다이번사 사토 고운 주타로(佐藤孤雲重太郎)를 만나 그에게서 사서오경 등 학문의 지도를 받았다. 특히, 사토 고운은 슈사쿠를 매우 아껴 치바 슈사쿠의 애도(愛刀)로 알려진 비젠노쿠니 오사후네 스케사다(備前国長船祐定)는 코운이 슈사쿠가 마쓰도로 이주할 당시 전별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이 아라타니촌에서 지내며, 침입한 도적떼를 아버지와 함께 슈사쿠가 제압하였다는 일화나 센다이 번사들과 시비가 붙어 센다이 번사들이 쏘는 화살을 목검으로 쳐내어 경탄을 자아냈다는 일화 등 여러가지 일화가 남아있다.

3. 마츠도 이주

슈사쿠가 15세 되던 해, 아버지 츄자에몬은 이름을 우라야마 토시사다(浦山寿貞)로 개명하고, 시모우사노쿠니 마츠도(下総国松戸 / 現 치바현 마츠도시)로 이주한다. 마츠도에는 사토 코운과 교류가 있던 하타모토 키타무라 이와미노카미 마사히데(喜多村石見守正秀)의 도움을 받아 정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마츠도 이주 후 츄자에몬은 마의(馬醫)로 개업하고 동시에 북진몽상류를 가르치며 가계를 꾸려나갔다.

당시 마츠도에서는 나카니시파일도류(中西派一刀流)[6] 검사인 아사리 마타시치로 요시노부(浅利又七郎義信)의 도장이 유명하였다. 아사리 요시노부는 본래 마츠도에서 조개잡이를 하던 빈농이었으나, 나카니시파 3대 종가 나카니시 츄타 츠구히로(中西忠太子啓)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되어 유명해진 인물로, 성인 아사리는 일본어로 바지락(浅蜊 / 아사리)을 음차한 것이다. 츄자에몬은 이 아사리 도장에 슈사쿠를 입문시킨다.

아사리 도장에서 슈사쿠가 재능을 발휘하자, 아사리 요시노부는 슈사쿠를 양자로 삼고 도장을 잇도록 하기 위해서 나카니시파 4대 종가 나카나시 츄베에 츠구마사(中西忠兵衛子正)에게 수행을 보낸다. 이 당시 나카니시파 일도류는 호구와 죽도를 사용한 훈련방식을 도입하여 에도에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슈사쿠는 나카니시파 종가에서 나카니시 츠구마사, 테라다 고로우에몬 무네아리(寺田五郎右衛門宗有), 타카야나기 마타시로 요시마사(高柳又四郎義正) 등의 지도를 받으며 실력을 쌓았다. 특히 상대와 죽도를 부딪히지 않고 이긴다하여 '소리 없는 검(音無しの剣)'이라 불린 타카야나기 마타시로와의 승부에서 무승부를 거두었는데, 이때 슈사쿠가 타돌(打突)하며 딛은 발에 마룻바닥이 깨지자, 나카니시 츠구마사는 이 마룻바닥 조각을 벽에 걸고 문하생들에게 본보기로 삼았다고 한다. 이렇게 3년간 수행 후 23세 때 나카니시파의 면허개전을 받고, 무사 수행을 떠났다. 그리고 무사 수행을 마친 뒤, 요시노부의 조카딸과 결혼하여 아사리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고 이후 아사리 요시노부를 대신하여 오바마(小浜) 번주의 검술사범역을 하게 된다.

그러나 나카니시파에서의 수행을 통해 새로운 기풍에 눈을 떠서, 시대에 뒤쳐진 교수법과 불분명한 이론을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세웠고, 특히 쿠미타치(組太刀)의 개혁을 두고 양부 아사리 요시노부와 대립하게 된다. 신분이 낮은 자신을 발탁해준 나카니시파의 은혜 때문에 새로운 기법을 만들 수 없다는 아사리 요시노부의 방침에 슈사쿠가 반발, '문파를 버리는 것은 양부(養父)를 배신하는 것이지만, 검을 버리는 것은 나를 죽이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결국 파양(罷養)하여 아내를 데리고 독립한다.

가전 무술인 북진류(北辰流)[7]와 북진몽상류, 나카니시파 일도류를 통합하여 북진일도류를 창시한 슈사쿠는 유파 개창을 알리고 이름을 떨치기 위해 코즈케, 무사시, 시나노 지방[8]으로 무사수행을 떠난다. 이때 같은 일도류 계열의 유파인 갑원일도류(甲源一刀流)[9]의 검객과 겨뤄 이기기도 했으며, 신사에 봉납 액자를 걸어 유파를 알리려 했으나 현지의 마니와넨류(馬庭念流)[10]의 검객들이 저지하는 바람에 분위기가 험악해져 코즈케 지방에서 철수하기도 했다.

이 사건을 일명 이카호신사 게액 사건(伊香保神社掲額事件)이라고 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슈사쿠가 무사 수행 중 마니와 넨류 검객 고이즈미 야베에(小泉弥兵衛)를 패퇴시키자, 고이즈미를 포함해 마니와 넨류 문하생 약 100여명이 슈사쿠 문하로 입문하며 이카호 신사에 북진일도류 봉납 액자를 걸고자한다는 소문이 마니와 넨류에 전해졌다. 이를 저지하고자 마니와 넨류 문하생 약 500여명이 모여들자, 당대 종가인 17대 히구치 사다테루(樋口定輝)가 이를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군중들이 오히려 종가가 직접 슈사쿠와 담판을 지으려고 나서는 것으로 오해하여 소동이 더욱 커졌다. 결국 지역 유지들의 중개로 슈사쿠가 코즈케에서 철수하는 것으로 사태를 종결한다. 이후 마니와 넨류 검객으로서 이름 높던 고이즈미 야베에의 패퇴와 입문, 마니와 넨류 문하생 500여명과 대치하면서도 물러서지 않은 점 등이 평가되어 슈사쿠의 명성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슈사쿠는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데 성공한다.

4. 북진일도류 현무관

무사 수행을 마치고 에도로 돌아온 슈사쿠는 1822년 니혼바시 시나가와쵸(日本橋品川町 / 現 도쿄도 주오구)에 현무관이라는 작은 도장을 세운다. 그리고 3년 뒤인 1825년에 현무관을 오타마가이케(於玉ヶ池 / 現 도쿄도 치요다구)로 이전한다. 슈사쿠는 검술 지도에 있어 자신의 신념대로 합리성에 바탕을 두고 알기 쉽게 가르쳤기 때문에, 현무관은 큰 명성을 얻고 널리 알려졌다. 특히 기존의 일도류 계열은 단을 8개로 나누었으나,[11] 북진일도류에서는 단을 3개로만 나누었다.[12] 당시에는 단이 오르면 스승과 선배, 동문에게 예물을 바치는 풍습이 있어서 가난한 자는 실력이 있어도 승단하지 못하는 폐해가 있었기 때문에 문하생들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간략한 단급제와 빠른 전수, 합리적인 기술은 문하생들에게 크게 환영받는 요소였다. 더불어 검술 위탁 교육을 활발하게 갔기 때문에 30개가 넘는 번에서 가르침을 청해 모여들 정도여서 현무관은 신도무념류(神道無念流) 연병관(練兵館), 경심명지류(鏡心明智流) 사학관(士学館)과 함께 '막말 에도 3대 도장'의 하나로 이름을 떨쳤고, '기술의 치바'라고 불릴 만큼 융성하였다.[13] 현무관의 문하생은 3천명에 이르고, 도장은 사방 1정보(町步 / 약 3천평)에 달하며, 문하생들이 지내는 기숙사까지 지었다고 한다.

북진일도류 문하생 중 유명인물로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낭사조(浪士組 / 신선조의 전신) 간부 키요카와 하치로(清河八郎), 신선조 총장 야마나미 케이스케(山南敬助), 신선조 참모 이토 카시타로(伊東甲子太郎), 신선조 조장 토도 헤이스케(藤堂平助), 메이지 시대의 정치가이자 일도정전무도류의 개조인 야마오카 텟슈(山岡鐵舟) 등 다수의 지사와 요인들을 배출하였다.

1835년, 슈사쿠의 명성을 접한 미토(水戸)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徳川斉昭)[14]의 초대를 받아, 미토번의 검술 사범이 되고, 1841년에는 우마마와리[15]로 채용되어 미토 번사가 된다.[16] 이때 슈사쿠의 차남, 치바 에이지로 나리유키(千葉栄次郎成之), 삼남 치바 미치사부로 테루타네(千葉道三郎光胤) 역시 우마마와리로 채용되었다. 나리아키는 슈사쿠를 총애하여 직접 미토 도쿠가와가 가전의술인 뜸법을 전수해주었다고 한다. 이 뜸법은 치바 사다키치에게도 전수되어, 그 자식인 치바 쥬타로와 치바 사나는 메이지 시대에 '치바 구치원(千葉灸治院)'[17]을 열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계속 미토 번에서 나리아키의 아들 도쿠가와 요시아츠(徳川慶篤)를 지도하는 등 활동을 계속 하였으며, 이후 1855년 6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5. 평가

'기술의 치바'라는 이름으로 불릴만큼 다양한 기술들을 고안해냈고, 이것이 현대 검도로 이어지면서 북진일도류가 현대 검도의 원류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치바 슈사쿠 자신은 '검은 신속, 심(心), 기(氣), 력(力)의 일치'라고 말했다고 한다.[18]

또, 그 때까지의 검술이 대부분 카타(形) 수련이 중심[19]이 되었고, 관습적으로 단을 많이 구분하여 시간과 비용의 많이 들었던데 비해, 북진일도류는 쿠미타치(組太刀), 발도(拔刀), 죽도(竹刀) 검술 모두를 균형있게 지도하였고, 단 역시 3개로 간소화하여 큰 환영을 받았다. 또한 신비성을 배제한 합리적인 지도법 역시 호평을 받아, '타 유파에서는 10년 걸릴 수행을 5년이면 완성할 수 있다'는 평을 들었다.

이러한 슈사쿠의 검술 지도법이 현대 검도에 많은 영향을 끼친 점이 평가되어, 2003년 전일본검도연맹에 의해 검도전당에 특별현창되었다. 당시 함께 현창된 15명 중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와 함께 3명 뿐인 메이지 시대 이전 인물이고, 유일하게 현대검도와 직접적 연관이 있는 인물이다.[20]

6. 기타

슈사쿠의 네아들, 장남 기소타로 노리타네(奇蘇太郎孝胤), 차남 에이지로 나리유키(栄次郎成之), 삼남 미치사부로 테루타네(道三郎光胤), 사남 다몬시로 마사타네(多門四郎政胤) 모두 검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특히 차남 에이지로는 아버지를 능가하는 재능의 소유자라고 평가되었다. 장남 기소타로가 슈사쿠 생전에 요절하였고, 에이지로는 슈사쿠 생전에 별가를 이룬 탓에, 북진일도류 종가와 현무관은 미치사부로가 이어받는다. 그러나 에이지로는 30살에, 미치사부로 역시 37살에 요절하고, 메이지를 거치며 검술이 쇠퇴하여 현무관은 결국 폐쇄, 현재 북진일도류에 슈사쿠의 직계는 전해지지 않는다. 사남 다몬시로 역시 요절하였다. 치바 가문의 비극은 꽤나 유명해서 아들들이 지나친 수련으로 건강을 해쳤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

슈사쿠의 동생 치바 사다키치 역시 오케마치(桶町)에 북진일도류 도장을 열어, '오케마치 치바도장(桶町千葉道場)' 또는 '소치바도장(小千葉道場)'으로 불리었으며, 기술면에서는 오히려 소치바도장이 낫다는 평도 있었다. 사카모토 료마가 바로 소치바도장 출신 문하생이다. 사다키치의 아들 치바 쥬타로 카즈타네(千葉重太郎一胤)와 딸 치바 사나(千葉佐那) 역시 검술가로서 이름 높다.

현무관의 직계 전승은 끊겼으나, 북진일도류는 한국에서도 수련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북진일도류 참조.

7. 관련 문서



[1] 성명은 치바 슈사쿠, 자(字)는 나리마사, 호는 도류(屠龍), 아명은 오토마츠(於寅松), 초명은 칸(観). 슈사쿠는 북진일도류를 개파하며 고친 이름. 일시적으로 츠카코시 마타이치로(塚越又一郎), 아사리 마타이치로(浅利又市良)도 사용한 바 있다.[2] 통설은 1793년 출생이나, 1794년 출생설도 있다.[3] 1915년에 간행된 센다이 번(仙台藩) 출신 인물들의 일화를 기록한 지방지.[4] 초대 번주는 바로 다테 마사무네이다.[5] 小西重治郎 저 - 剣聖千葉周作 〈守の巻〉-[6] 오노파 일도류 4대 종가 오노 지로우에몬 타다카즈(小野次郎右衛門忠一)의 제자 나카니시 츄타 타네사다(中西忠太子定)가 에도에 일도류 나카니시도장(一刀流 中西道場)을 연 것을 시초로 하는 일도류 계파. 단, 쇼와 시대까지도 해당 유파에서는 스스로 '오노파 일도류' 또는 '오노파 일도류 나카니시파'라고 불렀다. 나카니시파 일도류는 그 후에 붙여진 이름이며, 이 역시 정확하게는 해당 유파에서 '일도류 나카니시파'로 칭하고 있다. 후쿠로시나이(袋竹刀)가 아닌 현재 사용되는 죽도는 이 나카니시파 일도류 3대 종가 나카니시 츠구히로가 개발한 것이다.[7] 오슈 치바씨(奥州千葉氏)의 시조인 치바 치바노스케 츠네타네(千葉千葉介常胤)의 가전 무술로 치바씨에 대대로 전해졌다고 한다.[8] 上野(군마현), 武蔵(도쿄도, 사이타마현가나가와현 동부), 信濃(나가노현)[9] 단 오노파일도류 계열이 아닌 이토파일도류(伊藤派一刀流) 계열로, 헨미가(逸見家) 25대 당주 헨미 타시로겐 요시토시(逸見太四郎源義年)가 미조구치파일도류(溝口派一刀流)를 배운 후, 스스로의 깨달음과 합쳐 개창한 유파. 헨미가가 본디 카이 겐지(甲斐源氏) 일파인 것에서 따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10] 히구치가(樋口家) 17대 당주 히구치 마타시치로겐 사다츠구(樋口又七郎源定次)를 개조로 하는 넨류(念流)의 계파. 히구치 사다츠구가 코즈케 마니와촌(現 군마현 타카사키시 요시이마치)에 도장을 연 것에서 따와 마니와넨류라고 한다. 단, 이는 외부에서 부르는 이름이며, 히구치 사다츠구가 받은 인가장은 넨류 종가 8세 인가장이기때문에, 유파 내부에서는 그냥 '넨류'라고 칭한다.[11] 코다치(小太刀), 하비키(刃引), 불사도(払捨刀), 목록(目録), 카나지(カナ字), 취급면허(取立免状), 본목록개전(本目録皆伝), 지도면허(指南免状)[12] 초목록(初目録), 중목록면허(中目録免許), 대목록개전(大目録皆伝).[13] 막말의 검사 마츠자키 나미시로 나오유키(松崎浪四郎直之)가 각 도장과 대결후 평가한 말로, 원문은 '기위는 모모노이(位は桃井 / 경심명지류 사학관), 기술은 치바(技は千葉 / 북진일도류 현무관), 힘은 사이토(力は斎藤 / 신도무념류 사학관).[14] 에도 막부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의 친아버지.[15] 馬廻. 기마 무사로서 다이묘의 경호와 연락 등의 임무를 맡는다. 현대 군대로 치면 고급 지휘관의 부관 겸 연락장교에 해당한다.[16] 처음 검술 사범이 되었을 때는 '월봉 10인 부지(月俸十人扶持), 우마마와리로 채용되었을 때는 '우마마와리격 100석(馬廻格百石)'을 받았다고 한다. 부지(扶持)는 에도 시대 무사의 봉록 단위로 1인 부지는 1명에게 하루 5홉의 쌀을 지급하는 것을 뜻한다. 즉 10인 부지를 석으로 전환할 경우 5홉 X 10인 X 365일로 18,250홉, 18.25석이므로 연 219석에 해당한다. 물론 쌀을 지급할 뿐이므로, 후에 우마마와리로서 받은 영지 개념의 100석과는 다르다. 더구나 명목 상의 석고(表高)보다 실제 수확량(実高)이 많은 것이 일반적으로, 예를 들어 요네자와 우에스기번(米沢上杉藩)의 경우 명목 상으로는 18만석이었으나, 실제 수확량은 33만 6천석에 달했다.[17] 灸治란 한의학의 '뜸'을 말한다.[18] 현대 검도로 넘어오면서 기검체일치가 되었다.[19] 정작 치바 슈사쿠가 수련한 나카니시 도장의 문하생들은 신문물인 죽도 시합만 치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후일 천진일도류를 개창하는 선배 문하생 테라다 무네아리는 특이하게도 죽도 수련은 전혀 하지않고 카타 수련만으로도 다른 문하생들을 꺽었다. 이에 깊은 인상을 받은 치바 슈사쿠는 테라다에게 따로 카타 수련을 받기도 하였다. 이는 치바 슈사쿠가 북진일도류를 개창하고 카타와 죽도 시합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20] 야규 무네노리의 야규신카게류는 일도류 계열 및 현대 검도의 형태와 상이하고, 무사시의 이천일류도 마찬가지일 뿐더러, 그들 각자 살았던 시대의 명성으로 따지면 무사시가 무네요리와 슈사쿠에 비하여 너무도 초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