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3 19:19:33

마우로 카모라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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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로 카모라네시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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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축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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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 이름 마우로 카모라네시
Mauro Camoranesi
본명 마우로 헤르만 카모라네시
Mauro Germán Camoranesi
출생 1976년 10월 4일 ([age(1976-10-04)]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주 탄딜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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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헨티나|]][[틀:국기|]][[틀:국기|]]
신체 177cm / 체중 72kg
직업 축구 선수 (윙어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 선수 CA 알도시비 (1995~1996)
클루브 산토스 라구나 (1996)
몬테비데오 원더러스 FC (1997)
CA 반필드 (1997~1998)
크루스 아술 (1998-2000)
엘라스 베로나 FC (2000~2002)
유벤투스 FC (2002~2010)
VfB 슈투트가르트 (2010~2011)
CA 라누스 (2011~2012)
라싱 클루브 (2012~2014)
감독 코라스 데 테피크 (2015)
CA 티그레 (2016)
타파출라 (2016~2017)
NK 타보르 세자나 (2020)
NK 마리보르 (2020~2021)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2022 / 수석 코치)
플로리아나 FC (2023~2024)
카르미오티사 폴레미디온 FC (2024)
국가대표 55경기 4골 (이탈리아 / 2003~2010)

1. 개요2. 클럽 경력
2.1. 남미2.2. 이탈리아2.3. 이탈리아 이후
3. 국가대표 경력4. 지도자 경력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5.3. 서훈
6. 여담7.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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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축구 선수 출신 감독.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이중국적을 지녔으며 윙어들의 무덤 세리에 A에서 롱런한 측면의 테크니션[1]이다. 오른쪽 측면 미드필더에서 클래식 윙어처럼 뛰지만 플레이메이킹이 가능한 타입으로 아주 빠르지는 않지만 테크닉이 뛰어나고 민첩하고 정확한 패스와 크로스 능력을 갖춘 선수였다. 윙어들의 무덤으로 불리던 당대 세리에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윙어.

2. 클럽 경력

2.1. 남미

멕시코의 산토스 라구나에서 커리어를 시작하였다. 카모라네시는 13경기에서 1골을 넣어 리그우승을 견인하며 클럽의 첫번째 타이틀 획득에 이바지한다. 산토스 라구나의 팬들은 그의 별명을 "엘 촐로(El Cholo)"라고 붙여주었다. 이후 고향팀 반필드에서 뛰기 전에 우루과이 클럽인 몬테비데오 원더러스에서 잠깐 뛰었고, 중구난방이던 포지션을 오른쪽 공격형 미드필더로 굳혀갔으며, 38경기에서 16골을 넣었다. 다음 시즌 멕시코의 크루스 아슬로 이적하여 98-00시즌까지 활약하여 75경기 21골을 넣는다.

2.2. 이탈리아

크루스 아슬에서의 활약으로 카모라네시는 당시 세리에 A소속이였던 엘라스 베로나 FC의 관심을 받게 된다. 이후 베로나와 계약했으며 2년동안 활약하였고 2002년 공동 소유권으로 유벤투스가 베로나에게 480만 유로를 지급하고 그들에게 맥스 비에리의 공동 소유권 역시 넘겨주었다. 2003년 6월 26일 유벤투스는 450만 유로를 추가로 지급하면서 비안코네리 군단에 합류하게 되었다.[2] 이후 기존의 주전 라이트 윙이였던 잔루카 잠브로타의 부상을 틈타 카모라네시가 좋은 활약을 보여주면서 마르첼로 리피 감독의 신임을 얻어, 잠브로타를 수비수로 전향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후 칼초폴리가 터지고 칸나바로, 튀랑, 에메르송, 비에이라, 잠브로타, 즐라탄이 모두 떠나는 와중 여름에 리옹, 발렌시아, 리버풀 등의 클럽과 접촉하기도 했으나, 그는 유베의 강등 이후인 9월에 잔류선언을 하고 유베 팬들에게 까방권을 획득한다.

승격 이후 사실상 팀의 공격을 이끌던 에이스였다. 네드베드 은퇴이후 선수단에서 몇 안되는 귀중한 월드클래스 선수였을 뿐만 아니라 피를로 영입 이전까지 유일하게 팀에 창의성을 불어넣어줄수 있는 선수였다.[3] 잭팟투스로 불렸던 시즌의 경기를 보면 카모라네시가 출전했을때와 출전하지 않았을때의 경기력에서 확연하게 구분됐을 정도다.[4]

2.3. 이탈리아 이후

2010-11 시즌을 앞두고 VfB 슈투트가르트로 자유이적 하면서 독일 무대에 도전했으나 전혀 적응하지 못했고 6개월 만에 계약을 해지했다. 카모라네시는 CA 라누스와 계약을 맺으며 고국인 아르헨티나 무대로 돌아왔고 주전 선수로 활약하다 12-13 시즌 라싱 클럽으로 이적했다. 나이가 나이였는지라 측면 보다 중앙 미드필더로 주로 출장했으며 2014년 은퇴 선언을 했다.

3. 국가대표 경력

아르헨티나 출신이지만 이탈리아계 조상 덕분에 이탈리아 국적도 가지고 있었고 이탈리아 대표팀을 선택했다. 2003년 2월 12일 포르투갈과의 친선 경기에서 국가대표팀 데뷔전을 치러 1-0으로 승리했으며 UEFA 유로 2004에도 참가하였다. 2005년 9월 7일 2006 FIFA 월드컵 독일 예선전 벨라루스와의 경기에서 A매치 첫골을 넣어 이탈리아는 4-1로 승리했고 본선에서도 맹활약하며 이탈리아의 4번째 월드컵 우승에 기여했다.[5]

월드컵 우승 이후에 UEFA 유로 2008에서도 활약했고 스페인과의 8강전 승부차기에서 3번 키커로 나와 성공시켰지만 다니엘레 데 로시안토니오 디 나탈레가 실패하여 8강에서 탈락했다. 이후 2009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소집되었고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도 참가했으나 이탈리아는 극심한 부진으로 조별 리그에서 탈락해버리고 카모라네시는 2010 월드컵을 마지막으로 국가대표를 은퇴했다.

4. 지도자 경력

은퇴 이후 2017년까지 멕시코에서 감독직을 수행했고 그 후에는 커피 농장을 차렸다고 한다.

4.1. NK 타보르 세자나

2020년 1월 3일, NK 타보르 세자나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계약 기간은 2021년 6월까지.#

2020년 9월 3일, NK 타보르 세자나를 떠났다.#

4.2. NK 마리보르

2020년 9월 3일, NK 마리보르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계약 기간은 2023년까지. #

2021년 2월 23일, 구단 측에서 경질 오피셜을 발표했다.#

4.3.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2022년 7월 초,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의 수석 코치로 부임했으나 감독직을 계속하기 위해 일주일 만에 수석 코치직을 그만뒀다.

4.4. 플로리아나 FC

2023년 6월 14일, 플로리아나 FC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4.5. 카르미오티사 폴레미디온 FC

2024년 10월 1일, 카르미오티사 폴레미디온 FC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2024년 10월 22일, 이탈리아로의 복귀 의사를 밝힌 후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 구에린도로: 2007-08

5.3. 서훈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장 4등급: 2006

6. 여담

별명은 이름을 줄인 카모와 아줌마같은 외모로 인해 카숙모로 불린다. 국내에는 실력에 비해 과소평가된 선수의 대표적인 케이스. 월드클래스급의 실력을 지니고 잠브로타 등 수많은 윙어를 묻어버린 카모라네시에겐 아쉬운 상황.[6]

사실, 국내 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에서도 그 실력은 인정 받았지만 언론 주목도나 언급되는 정도가 실력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았다고 볼 수 있는데, 일단 아르헨티나 출신이라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크게 어필이 되지 못 했고, 같은 클럽에서는 외국인 대표로 언급되던 사람이 무려 네드베드다.

2006년 이탈리아의 월드컵 우승 직후 다른 선수들이 카모라네시의 긴 머리를 자르는 이벤트를 즉석에서 벌인 적이 있다. 자른 머리카락을 들고 신나서 카메라 앞에서 "이탈리아 월드 챔피언" 이라고 선언했다.

오리운도 (Oriundo), 즉 남미계 이탈리아 교포다. 대한민국 국적을 대대로 유지해오고 있는 재일교포들이 많은 것 처럼,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 남미의 이탈리아계 후손들도 이탈리아 국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파시스트 치하 시기에는 이탈리아계 혈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만 해도 이들이 이탈리아에 오기만 하면 자동으로 이탈리아 이중국적으로 국적을 발급해주기도 했다. 지금도 오리운도들은 다른 귀화자들보다 신청만 하면 훨씬 간편하게 이탈리아 국적을 발급받을수 있다. 카모라네시는 정말 오랜만에 등장한 오리운도 이탈리아 대표선수로, 월드컵 우승까지 경험하는 역사를 만든 선수다. 그의 선수 은퇴 이후 감독 커리어가 대부분 남미 쪽인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7. 같이 보기

1 부폰 · 2 자카르도 · 3 그로소 · 4 데 로시 · 5 칸나바로 ⓒ · 6 바르잘리 · 7 델 피에로 · 8 가투소 · 9 토니
10 토티 · 11 질라르디노 · 12 페루치 · 13 네스타 · 14 아멜리아 · 15 이아퀸타 · 16 카모라네시 · 17 바로네
18 인자기 · 19 잠브로타 · 20 페로타 · 21 피를로 · 22 오도 · 23 마테라치

1 부폰 · 2 파누치 · 3 그로소 · 4 키엘리니 · 5 감베리니 · 6 바르잘리 · 7 델 피에로 ⓒ · 8 가투소 · 9 토니
10 데 로시 · 11 디 나탈레 · 12 보리엘로 · 13 암브로시니 · 14 아멜리아 · 15 콸리아렐라 · 16 카모라네시 · 17 데 산치스
18 카사노 · 19 잠브로타 · 20 페로타 · 21 피를로 · 22 아퀼라니 · 23 마테라치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로베르토 도나도니


[1] 다만, 오른쪽 측면 미드필더로만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한계도 있었다. 그것도 포워드까지 올라가 공격수 같은 움직임을 보여주기보다는 오른쪽 측면에서 플레이메이킹을 하는 역할에 능했다. 후술하겠지만 카모라네시가 저평가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2] 같은 날 마르코 디 바이오와 엔조 마레스카가 유벤투스와의 계약에 합의하였다.[3] 창의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베르더 브레멘으로부터 지에구를 영입했지만 기대이하의 활약으로 실패작이 되었다.[4] 당시 부상으로 두 시즌 간 거의 출전을 못하면서 유벤투스가 칠칠을 찍는데 큰역할을 하게 되었다.[5] 특히 4강 독일전에선 시모네 페로타와 함께 왕성한 활동으로 독일의 측면을 붕괴시키다시피 했으며 평점도 상당히 높은 8점을 받았다. 또한 결승전 마르코 마테라치의 동점골 역시 카모라네시가 재치있게 코너킥을 만들어냈기에 나올 수 있던 장면이었다.[6] 국내에선 해외축구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시기에 칼초폴리가 터져 세리에 A 출신의 선수의 평가는 엄청나게 박한편이다. 사실 2002월드컵 때 이탈리아전 혈투로 인한 반감이 대부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