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0 11:46:35

카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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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시위가 한창인 알 아와미야 구역. 카티프 시가지의 정상적인 사진은 사우디 정부의 통제로 구하기 매우 어렵다

영어: Qatif
아랍어: ٱلْقَطِيف

1. 개요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샤르키야 주의 도시. 주도 담맘에서 북쪽으로 15km 떨어져 있지만 시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 카티프-담맘-코바르 단일 도시권을 이룬다. 인구는 대략 60만명이지만 시가지는 넓은 평원을 따라 흩어져 있고, 인근의 담맘과는 달리 개발이 별로 되지 않아 고층 건물이 거의 없다. 본래 카티프는 일대에서 가장 큰 도시였지만, 현대에 들어 각종 분쟁으로 인해 남쪽의 담맘이 대신 개발되며 소외되었다. 다만 따뜻한 수온 덕에 수자원이 풍부하여 아라비아 반도 최대의 수산 시장이 위치한다. 주민들은 대부분 담맘이나 '아람코' 도시 다하란의 석유 관련 직종에서 근무한다. 시내에는 옛 가옥들이 일부 남아있고, 동쪽의 타루트 섬에는 타루트와 다린 성채 등 여러 유적들이 있어 사우디 동부의 관광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카티프는 서남쪽 120km의 호푸프와 함께 아라비아 반도 최대의 오아시스 지대 중 하나이다. 따라서 기원전 3500년 전부터 딜문 문명의 거점이 되었을 만큼 유래가 깊다. 중세 우윤 왕조의 수도였고, 인도양 무역과 농업 및 어업을 바탕으로 걸프 연안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그후 포르투갈, 오스만, 칼리드 연맹 등을 거쳐 사우디령이 되었다. 하지만 강경 순니파와하비즘이 주류인 사우디 지도부에 반대로 현지 주민들은 바다 건너 이란의 영향으로 대부분 시아파 무슬림이다. 따라서 20세기부터 현재까지 각종 시위와 분쟁이 지속되고 있다. 따라서 카티프 주변에서 석유가 생산됨에도 도시 자체는 그 헤택을 별로 받지 못했으며, 심지어 제대로되 종합 대학 하나 세워지지 않았다. 고즈넉한 미를 자랑했던 성채 역시 시위 진압으로 훼손된 후, 그 복잡한 구조가 시위대의 은신처로 쓰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재개발'의 미명 하에 허물어져 주택들로 대체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판 벨파스트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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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 사산 제국이 건설하고 16세기 오스만 제국이 증축한 카티프 성채. 1980년대 도시 개발로 철거되었다

2.1. 중세

과거부터 걸프 지역의 주요 농경지였기에 지명 카티프는 '수확' 혹은 '곡물'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다만 중세까지는 창 제조가 활발하여 창이란 의미인 알 캇트 (الخَطّ)로 불렸다. 농업과 어업, 인도양 무역으로 성장하던 도시는 이슬람 제국을 거쳐 과격 쉬아 세력인 카르마트의 수중에 들어갔다. 988년 바다 건너 부와이 왕조가 도시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11세기 말엽 카르마트가 멸망한 후에는 우윤 왕조가 세워졌다. 카르마트와 마찬가지로 알 하사 (호푸프)를 수도로 삼았던 우윤 조는 12세기 들어 카티프로 천도하였다. 다만 1253년 우윤 조는 호르무즈 왕국과 대립하다가 알 하사에서 발흥한 우스푸르 왕조에게 대체된다. 1331년 카티프를 방문한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도시가 크고 번성했으며 '극단주의 쉬아' 아랍인들이 거주한다고 기록하였다. 다시 우스푸르 조는 알 하사에서 발흥한 자르완 왕조에게 대체되었다. 16세기 들어 걸프 해안은 포르투갈 제국의 영향력 하에 들어갔다.

2.2.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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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티프 근처의 관광지인 타루트 성채

1515년, 걸프 무역의 중심이던 호르무즈 섬을 정복한 포르투갈 인들은 1520년에 카티프를 공격하여 자르완 군주 무크린 빈 자밀을 살해하였다. 다만 포르투갈 인들은 해안에서 2km 가량 떨어진 카티프 대신 만 안쪽에 위치한 타루트 섬을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 따라서 1524년 사파비 왕조바스라 총독이 카티프를 장악하였고, 타루트의 포르투갈 인들과 공존하였다. 1538년 바스라를 정복한 오스만 제국은 1546년 해군 기지를 설치하며 걸프로의 세력 확장에 나섰다. 1548년 아덴 점령에 이어 1551년 오스만 군이 카티프와 호푸르를 접수하고 라흐사 에얄레트를 설치하였다. 1551년에는 오스만 제국이 공식적으로 군대를 파견해 라흐사 에얄레트를 설치하였다.

1552년 오스만 군은 무스카트를 점령하고 호르무즈를 포위했으나 격퇴되었고, 오만-호르무즈 해전에서 연이어 패하며 걸프의 제해권을 잃었다. 1559년 라흐사 총독 무스타파 파샤가 바레인을 공격하자 포르투갈은 타루트 섬에서 철수했으나 카티프를 습격하였다. 바레인 포위 역시 실패로 돌아간 후 바스라 총독은 포르투갈과의 공존을 택하였기에 오스만-포르투갈 전쟁은 사실상 종식되었다. 그리고 한세기가 흐른 후 오스만 지배력이 약화된 틈을 타 1680년 칼리드 연맹이 알 하사를 점령하고 일대를 장악하였다. 다시 한세기 후, 1790년 카티프 남쪽에서 벌어진 구라이밀 전투에서 칼리드 연맹은 1차 사우디 국가 (디리야 토후국)에 패하여 멸망했다. 1818년 메흐메트 알리 파샤에 의해 디리야 토후국은 멸망하고 다시 칼리드 연맹이 집권했으나 1830년 2차 사우디 국가 (네지드 토후국)에게 재차 멸망했다.

2.3. 현대 : 시아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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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이맘 니므르의 죽음 40주일을 맞아 벌어진 시위

1871년 오스만 제국이 재차 일대를 점령했으나 1913년 최종적으로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의 3차 사우디 국가 (리야드 토후국)에게 점령되어 현재에 이른다. 1920년대 인공 진주의 개발로 다른 걸프 연안 지역과 마찬가지로 진주 채취가 주요 수입원이던 카티프는 불황을 겪었다. 이에 더하여 사우디 왕가가 헤자즈 왕국 정복을 위해 징수한 '성전세'는 상황을 악화시켰다. 지주나 상인들을 포함한 일부 주민들은 납세를 거부하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러던 1929년, 히자즈가 정복된 후에 오히려 세금이 두 배로 인상되자 봉기가 일어났다. 이에 사우디측 카티프 총독이 강경 진압에 나섰고, 많은 주민들은 영국령 바레인으로 도주하였다. 그에 따라 바레인의 시아파 비중은 더 증가하였다. 불안 요인을 해외로 수출.. 결국 지역 유지들의 탄원 서신을 받은 국왕 압둘아지즈가 직접 와서 공론회를 열고 세금을 낮추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 되었다.

한편 강경 순니파한발리파를 추종하는 사우디 왕실과 달리 카티프의 주민들은 옛날부터 그와 반대되는 시아파 무슬림이 대부분이었다. 1940년대 석유의 발견은 사우디를 순식간에 부국으로 만들엇는데, 그 생산지인 호푸프에서 해외로 수출을 하기 위해서는 카티프 주변의 라스 타누라 항구를 이용해야 했다. 1960년경 카티프 일대에는 6만의 쉬아 무슬림이 거주하였다. 정치력이 뛰어났던 압둘아지즈의 사후, 1979년 이란 혁명에 경도된 시아파 주민들은 세습 왕정 철폐 및 이슬람 공화국 설립과 반미를 주장하며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11월 11일, 시위대가 철야 행진하는 등 사태가 격화되자 당국은 통금을 내리고 기갑부대를 동원해 일대를 봉쇄하였다. 그후 11월 30일까지 이어진 유혈 진압 끝에 수천이 체포되었고, 수백명이 다쳤으며 24명이 사망하였다. 2011년에도 아랍의 봄에 경도된 시위가 일어나 유혈 진압 도중 5백명이 체포당하고 6명이 사망하였다.

2012년 사우디 당국은 23명의 시위 '주모자'들을 체포했는데, 그중에는 1995년생 청소년 다우드 알 마르훈도 있었다. 수감 중이던 그는 2015년, 불과 20세의 나이로 참수되었다. 그외에 카티프의 주요 시아파 설교자이던 니므르 앗 니므르 역시 체포되어 2016년 초에 46명의 다른 반정부 인사들과 처형당하였다. 불안이 이어지던 2017년에 한 파키스탄 부자가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은 후 재차 시위가 벌어졌다. 한편 반정부 시위는 점차 인권 운동과 결부되었다. 2018년에는 카티프 출신의 여성 인권 운동가 이스라 알 곰감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이듬해 80년형으로 감형되기도 하였다. 2020년 초엽 코로나 사태 전까지 이어진 시위 결과 10여명의 사우디 군경이 전사하고 수십명의 시위대 (혹은 테러리스트)가 사망하였다.참고 자료

3.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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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의 카티프 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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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티프 성채의 잔존 부분. 철거하다 만 것인지, 시위 진압 도중 파괴된 것인지 알 수 없다
파일:카티프 아랍 집.jpg
전통 시장의 옛 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