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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를레앙 프랑크인의 왕 Chlodomer | 클로도미르 | ||
제호 | 한국어 | 클로도미르 |
프랑스어 | Chlodomer | |
출생 | 495년경 | |
사망 | 524년 (향년 28~29세) | |
재위 기간 | 오를레앙 프랑크인의 왕 | |
511년 ~ 52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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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를레앙 프랑크 왕국의 왕. 클로비스 1세와 클로틸데의 차남으로, 아버지 사후 형제들과 함께 왕국을 분할하여 오를레앙을 다스렸다. 부르군트족의 왕 지기스문트를 사로잡은 뒤 처형했으나 뒤이은 부르군트족과의 전쟁에서 전사했고, 영지는 형제들에게 빼앗겼다.2. 행적
495년경 프랑크 왕국의 초대 군주 클로비스 1세와 클로틸데 왕비 사이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장남 잉고메르는 클로틸데가 남편의 허락 없이 유아세례를 받았다가 얼마 안가 사망했다. 클로비스 1세는 이에 비통함을 느끼고 클로틸데를 비난했다. 그러나 클로틸데는 이에 굴하지 않고 클로도미르 역시 세례를 받게 했는데, 아들의 건강이 나빠지자 하느님에게 간절히 기도했고, 클로도미르는 곧 회복되었다고 한다. 이후 클로비스는 자기 허락 없이 세례를 주지 못하게 했다.그렇지만 두 사람은 이 일로 부부관계가 나빠지진 않은 듯하다. 그들은 잉고메르와 클로도미르 외에도 킬데베르 1세(496년 출생), 클로타르 1세(497년 출생), 클로틸데(500년 출생)[1]를 낳았다.
511년 클로비스 1세가 사망한 후, 클로도미르는 형제 킬데베르 1세, 클로타르 1세, 그리고 이복형제인 테우데리크 1세와 함께 왕국을 네 개로 분할했다. 수아송은 클로타르 1세에게, 파리는 킬데베르 1세에게, 랭스는 토리데리크 1세에게 주어졌고, 그는 오를레앙을 맡았다. 그는 부르군트족의 공주 군테우크(Guntheuc)와 결혼하여 테오데발트, 군타르, 클로도알드를 낳았다.
523년, 클로도미르는 형제 킬데베르 1세, 클로타르 1세와 함께 부르군트를 공격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이들은 부모를 처참하게 죽였던 곤데바우드의 아들이자 부르군트 왕인 지기스문트를 처벌함으로써 부모의 원수를 갚고 싶어하는 클로틸데의 부추김을 받았다고 한다. 지기스문트는 일찍이 딸 수아베코테(Suavegothe)와 테우데리크 1세의 결혼을 주선해 그의 지원을 받기를 원했지만, 테우데리크 1세는 별다른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결국 지기스문트는 프랑크족에게 패배한 뒤 사로잡힌 후 왕위에서 물러난 뒤 오를레앙으로 끌려갔다.
프랑크군이 작전을 완수하고 돌아간 뒤, 지기스문트의 형제 고도마르 3세는 테오도리크 대왕의 지원에 힘입어 부르군트 왕국을 탈환한 뒤 클로도미르가 남겨뒀던 프랑크 수비대를 학살했다. 이에 분노한 클로도미르는 524년 5월 1일 지기스문트와 그의 아내 및 아들을 살해한 뒤 이들의 유해를 우물에 던지게 했다. 그 후 테우데리크 1세를 설득하여 부르군트 왕국에 대한 2번째 원정에 함께 착수하게 했다. 그러나 524년 6월 25일 베체롱체 전투에서 거짓으로 후퇴하는 적을 추격했다가 매복에 걸려 전사했고, 그의 수급은 베어진 뒤 창 끝에 꽂혔다.
클로도미르의 세 아들들은 곤테우크에게 양육되다가 곤테우크가 클로타르 1세와 결혼하면서 클로타르 1세의 수중에 들어갔다. 클로타르 1세와 킬데베르 1세가 클로도미르의 영지를 양분하려 하자, 클로틸데는 이에 맞서 클로도미르의 세 아들의 권리를 보호하려 했다. 그러나 클로타르 1세와 킬데베르 1세는 어머니의 반대를 뿌리치고 클로도미르의 영지를 양분했고, 클로도미르의 세 아들 중 테오데발트와 군타르는 클로타르 1세에게 살해되었다. 오직 클로도알드만이 목숨을 건졌고, 나중에 수도자가 되었다. 클로틸데는 두 손자의 시신을 들것에 실어 성 피에르 교회에 안장한 뒤 속세에 인연을 끊고 수녀원에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