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원자력 사고 4~7등급 목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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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시팀 사고 추모비 | |
원자력 사고 요약도 | |
<colbgcolor=#f5f5f5,#2d2f34> 사고 레벨 | 6등급 - 중대형 사고 |
사고 일자 | 1957년 9월 29일 참사 D[dday(1957-09-29)]일 |
사고 유형 | 핵연료 재처리 공장 폭발 사고 |
사고 지점 | 소련 첼랴빈스크 주 오조르스크 시 마야크 재처리 공장 |
누출 방사능 | 약 1.8엑사 베크렐[1] |
피폭자 | 약 47만 명(추측)[2] |
사상자 | 급성 방사선 증후군(ARS) 발생 200건, 만성 방사선 증후군(CRS) 발생 66건, 이 외 수백명 가량의 암 환자 발생[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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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Кыштымская авария'''[4] (Kiyshtymskaya Katastrofa)영어로는 'Kyshtym disaster[5]'라고 표기한다.
1957년 9월 29일에 소련의 오조르스크 시의 마야크 핵연료 재처리 공장에서 일어난 레벨 6급의 원자력 사고. 여기는 예나 지금이나 비밀도시인지라[6]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고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키시팀(Кыштым)시의 이름을 빌렸다. 현재 러시아 첼랴빈스크 주에 위치한다.
2. 폐기물 저장 시설의 건설
마야크 재처리 공장의 위성 사진. |
1945년 4월 9일 소련 정부는 첼랴빈스크 지역의 원자폭탄 생산을 위한 817호기 건설에 관한 법령을 제정했다. 1948년 6월 유라시아 최초의 A-1 산업용 원자로가 설계 용량에 도달했다. 1949년 1월 플루토늄의 분리 및 처리를 위한 화학 공장이 건설되었다. 1949년 2월 핵연료 재처리를 위한 화학 및 야금 공장이 건설되었다. 1949년 이래 중간 혹은 저준위의 액체 방사성 폐기물이 개방 수역으로 계획적으로, 혹은 비상 방출되었다. 따라서 1949-1951년까지 방사성 물질이 테차 강에 방류되어 테차 강은 방사능으로 오염되었다.
방사선의 위험성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축적되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액체 폐기물의 일부가 강으로 배출되지 않고 폐쇄된 카라차이 호수로 방출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대규모 오염의 위험으로 인해 방치되었다. 또 공기 정화 기술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요오드(아이오딘)-131과 불활성 가스(특히 아르곤-41) 등의 방사성 동위 원소를 함유한 가스와 에어로졸이 대기로 배출되었으며, 마야크 재처리 공장의 최대 70km 반경에서 감지되었다. 고방사성 폐기물은 밀폐된 특수용기에 담겨 특수한 장소에 보관되었다.
폭발은 1950년대에 건설된 고방사성 폐기물이 저장되어 있던 저장 시설 중 하나에서 발생했다. 탱크 건설을 지휘한 사람은 마야크 재처리 공장 건설 당시 수석 엔지니어였던 В. А. Сапрыкин (V. A. Saprykin)이었다. 보관 시설은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스테인레스 스틸 실린더였다.
저장소의 구조는 이러했다고 한다. 기초 구덩이의 직경은 약 18-20m이고 깊이가 10-12m였다. 이 구덩이의 바닥과 벽에는 보강재가 설치되었고 콘크리트가 부어졌다. 이러한 결과 벽 두께는 약 1m가 되었다. 폐기물 용기 자체는 별도의 스테인레스 스틸 용기이며 용접을 통해 내부에 조립되었다. 돔은 방사형 금속 트러스 위에 건설되었으며 트러스 중앙에는 직경이 1.5m에 이르는 금속 실린더가 부착되었다. 그리고 콘크리트를 그 위에 약 1미터 두께로 부었다. 그 뒤 구조물 위에 2m 두께의 흙으로 메워졌고 이 위에 위장을 위해 잔디를 올렸다고 한다.
사용 후 핵연료 보관 시설의 건설에 대해 폐기물 저장 시설 건설을 감독했던 В. А. Сапрыкин(V. A. Saprykin)와 Казутов(Kazutov)의 대화 내용과 건설 과정이 카주토프가 남긴 글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시설의 강도는 매우 견고하며 안전할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었다.
3. 사고 발생
1957년 9월 29일 일요일 현지 시간 16시 22분 냉각 시스템의 고장으로 인해 S-3단지의 14번 탱크가 폭발했다. 이들 탱크 중의 하나에 있는 냉각시스팀이 고장났는데 수리가 안 되었다. 이 탱크들에는 70에서 80톤의 액체 방사성물질이 있었는데 냉각이 안되니 자체 붕괴열이 계속 쌓여 온도가 계속 올라갔고, 열로 인해 액체는 증발하여 암모늄 질산염과 아새테이트가 주성분인 화학물질은 건조해지면서 결국 폭발을 일으켰다.폭발이 상당히 강력했기 때문에 당시 인근 마을에서 폭발을 목격한 주민들은 핵전쟁이 발생했다고 착각했을 정도라고 했다. 이 탱크는 300m³ 용량이었으며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이 80톤 가량 저장되어 있었다.[7]
TNT 70톤 규모에 해당하는 폭발로 8.2m 깊이의 콘크리트 시설에 위치해 있던 스테인레스 스틸 탱크가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무게 160톤, 두께 1m인 콘크리트 뚜껑이 25m 옆으로 던져졌고 인접한 시설들에서도 파손이 발생했다. 방사성 물질의 일부는 1-2km의 높이로 솟구쳤으며 액체 및 고체 에어로졸로 구성된 구름을 형성했다. 10-12시간 내에 방사성 물질은 폭발 장소에서 바람 방향인 북동 방향으로 300-350km 이상 떨어진 지역까지 이동했다.
오후 22시 또는 9월 30일 00:00 방사성 구름은 튜멘 지역에 도달했으며, 하늘에 이상한 빛이 나타났다. 이 빛의 주요 색상은 분홍색과 하늘색이었으며 처음에는 빛이 하늘의 남서쪽과 북동쪽 표면의 상당 부분을 뒤덮었고 북서 방향으로 관찰될 수 있었다.
1957년 10월 6일, 첼랴빈스크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지난 일요일 저녁에 많은 첼랴빈스크 시민들은 별이 빛나는 하늘에서 특별한 빛을 관찰했다. 위도에서 다소 드문 빛이 오로라의 모든 징후를 나타냈다. 강렬한 붉은색, 때로는 희미한 분홍색과 연한 푸른빛으로 바뀌면서 처음에는 하늘의 남서쪽과 북동쪽 표면의 상당 부분을 덮었다.
11시경에는 북서 방향에서 빛이 관찰될 수 있었다. 비교적 넓은 색의 지역과 때때로 잔잔한 줄무늬가 빛의 마지막 단계에서 자오선 방향으로 나타난다.
로모노소프가 시작한 오로라의 원인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현대 과학에선 방전으로 인해 대기권에서 오로라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한 로모노소프의 추측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에 오로라는 남부 우랄의 위도에서 관측될 수 있을 것이다."[8]
폭발로 인해 방사능 오염에 노출된 지역은 나중에 동우랄방사능지대(EURT, East Urals Radioactive Trace)라고 불리게 되었다. EURT의 크기는 폭이 5-10km, 길이 약 300km이며 2 Ci/km² 이상의 방사성 오염 밀도를 보이고 있다. 약 270,000명 가량의 인구가 이 곳에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11시경에는 북서 방향에서 빛이 관찰될 수 있었다. 비교적 넓은 색의 지역과 때때로 잔잔한 줄무늬가 빛의 마지막 단계에서 자오선 방향으로 나타난다.
로모노소프가 시작한 오로라의 원인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현대 과학에선 방전으로 인해 대기권에서 오로라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한 로모노소프의 추측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에 오로라는 남부 우랄의 위도에서 관측될 수 있을 것이다."[8]
사고가 발생한 마야크 재처리 공장은 기밀 시설이었기 때문에 주민들에 대한 대피 조치가 늦어져 대피령은 10월 6일에야 내려졌다. 소련 당국은 대피해야 하는 이유를 주민들에게 설명하지 않았으며, 이때 고향을 떠난 이들 중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있다.
4. 원인
1957년 10월 11일 사고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한 특수 기술위원회가 설립되었다. 기술위원회는 주로 과학자, 원자력 산업 전문가들로 구성되었다. S-3단지 14번 탱크의 상황을 확인하고 원인을 조사한 후 위원회는 사고의 원인을 보고했다.폭발한 탱크가 포함된 복합 단지는 각각 250입방미터의 스테인레스 스틸 탱크가 있는 콘크리트 구조물이었다. 마야크 재처리 공장의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은 이 탱크에 저장되었다. 높은 방사능으로 인해 폐기물에서는 붕괴열이 발생된다. 그렇기에 탱크 내부는 순환수에 의해 지속적으로 냉각되어야 한다. 그러나 1956년, 탱크들 중 하나에서 냉각 튜브가 파손되며 전원이 꺼졌다. 이 손상은 1년 가량 복구 작업조차 시도되지 못했고, 붕괴열로 인해 탱크 내부의 온도가 높아져 폐기물이 마르며 폭발성 질산 및 아세테이트염이 생성되었다. 그리고 탱크 내에서 발생한 불꽃에 의해 폭발이 일어났으며, 폭발의 힘이 160톤의 콘크리트 뚜껑을 날려버리며 방사성 물질이 누출되었다.
5. 사고 이후
뒤늦은 대피령에 따라 1만 명이 피난을 시작했지만 너무 늦었다. 적어도 200명이 피폭의 영향으로 인해 암에 걸렸다고 한다. 또 노출된 피부가 벗겨져 내리는 이상한 질병이 돌기 시작하여 주민들이 불안해했다고 한다.이 사고로 인해 해당 지역은 EURT라 불리며 출입 금지 구역이 되었고, 오염 확산을 막기 위해 해당 지역의 오염된 흙은 모조리 땅굴 속에 매장되었으며, 매장 지역은 Graveyards of the Earth(지구의 묘지)라고 불렸다. 소련 당국은 해당 지역을 자연 보호 구역으로 지정하고 이곳에서 자연물 채취 등의 모든 경제 활동을 금지시켰는데 이는 기밀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은 1958년 4월 덴마크의 코펜하겐 신문이 소련의 핵무기 실험과 관련된 '재앙적인 사고'에 대해 보도했으며, 이를 1958년 3월 소련이 핵무기 실험을 갑자기 중단한 사실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1년 후인 1959년 '소련의 원자력 시설'에 대한 내용이 오스트리아의 신문에 실렸다. 더욱이 1962년에 키시팀 사고는 'Review of Nuclear accident'에서 '주요 원자력 사고에 대한 미확인 보고서'로 언급되었다. 하지만 소련 정부에서는 이 보고서의 내용에 대해서 철저히 부인하고 사실이 밝혀지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사고 발생 19년 후 소련의 생물학자이자 반 체제 인사인 제로스 메드베데프(Жерос Медведев Zheros Medvedev)가 이 사고에 대해 수 년간 연구하고 공개된 소련 문서에 포함되어 있던 사소해 보이는 단서에서 세부 사항을 추론한 후 그의 저서 '우랄의 원자력 재해'를 출판하여 이 사건이 과학계의 주목을 받게 했다. 1980년 테네시주 오크리지 국립연구소의 연구원들은 피폭 의심 지역의 30개 마을이 1950년대 후반 이후 소련의 지도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메드베데프의 폭로가 사실임을 확인했다. 그들은 또한 사고 지역 아래의 15마일 길이의 계곡을 우회하기 위한 정교한 운하 시스템이 건설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도 언급했다.
1989년 소련 정부는 1957년 마야크 재처리 공장에서 일어난 폭발 사고로 인해 주위 지역이 방사능에 오염되었으며 수천 명의 주민들이 대피했음을 인정했다.
6. 기타
- 실제 피해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일설에 따르면 47만 명이 피폭되었다고 하지만 소련의 비밀주의로 인해 확인이 쉽지 않다.
- 사고 이후 오조르스크 시 자체는 안전하다고 하며 EURT의 82%가 정화를 마치고 농장과 삼림으로 이용되고 있다. 하지만 현지 주민들은 안전하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민간인 출입 지역에서도 가이거 계수기를 대면 단숨에 바늘이 최대치를 초과해 버린다.
- 이 사고는 냉전 말기인 1989년에 세상에 알려졌다. 미국을 비롯한 제1세계에선 소련에서 원자력 사고가 발생했으며 규모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았으나 자국의 원자력 산업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해 이러한 사실을 은폐했기 때문이다. 관련 영상.
- 전세계 역사상 유일의 6등급에 해당하는 사고이며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 이은 3위의 원자력 사고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 내부에서도 오랫동안 감춰진 사고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인지도는 높지 않다.
[1] 실제로는 더 많다고 한다.[2] 출처. 이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3] 폭발로 인한 직접적인 사망자는 없다고 하며 피폭의 영향으로 인한 사망자의 숫자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방사능으로 인한 암 발병은 일반적인 암 발병과 크게 구별이 안 되기 때문에 위의 암 환자들도 피폭 영향인지 자연적 발생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사고로 인한 방사능 누출 지역에 거주하던 사람들이니 사고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4] Кыштым의 실제 발음은 '크슈틈'~'크시틈/크싀틈'에 가깝지만 국립국어원의 러시아어 표기법에 따르면 'ы'를 '의'가 아닌 '이'로만 전사하게 해 두었기 때문에 이렇게 적는다.[5] 문자 그대로 재앙이었기 때문에 'Disaster'인데 이 부분의 러시아어를 직역하면 'Catastrophe(대재앙)'이다.[6] 당시엔 첼랴빈스크-40 또는 첼랴빈스크-65라는 이름으로 불렸다.[7] 스트론튬-90, 세슘-137, 세륨-144, 지르코늄 등의 동위 원소를 포함하는 약 256m³의 액체 폐기물이었다고 한다.[8] 사고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위 신문을 비롯한 지역 언론에서는 자연적으로 드물게 오로라가 남쪽 지역에서 발생한 거라고 추측했지만 실제로는 강한 방사능에 의해 공기가 이온화되며 하늘에서 푸른 빛이 나타났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에서도 파괴된 원자로 건물 위에서 이와 같은 이온화 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