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근 파라오 섬 (جزيرة فرعون)의 살라흐 앗 딘 성채
타바 부근 리조트 단지
아랍어: طابا
영어: Taba
1. 개요
이집트 동북부 남시나이 주의 도시. 주도 샤름엘셰이크에서 동북쪽으로 150km, 수에즈에서 동쪽으로 200km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다. 이스라엘과의 국경과 접하고 있고 에일라트, 아카바와 함께 아카바 만의 안쪽에 연달아 위치한 세 도시들 중 규모가 가장 작다. 인구는 불과 8천명이고 인지도 제일 역시 낮지만, 다른 두 도시들 처럼 휴양지로 유명하며 북쪽 10km 지점에 국제공항이 있다. 샤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1960-70년대 이스라엘의 지배기에 휴양지로 개발되기 시작하였고, 이집트로 반환된 후에도 인근 이스라엘 인들이 종종 방문한다. 수영과 스노클링이 가능한 해변 외에도 남쪽 연안의 파라오 섬에 있는 살라흐 앗 딘 성채 역시 주된 볼거리로, 성채에 올라 아카바 반의 세 도시들을 굽어보는 사람들이 많다.2. 역사
파라오 섬과 살라흐 앗 딘 성채
전략적, 경제적 이해 관계 덕에 역사적으로 많은 굴곡을 겪었다. 서남쪽으로 4km 가량 떨어져 있는 파라오 섬에는 기원전 1000년 무렵부터 마을이 형성되었고, 성탑을 갖춘 성벽이 섬을 두를 정도로 발전하였다. 다만 바다 민족의 침공기 이후 일대는 버려졌고, 12세기 십자군 전쟁기에야 다시 주목되었다. 시리아와 이집트를 포괄하는 아이유브 왕조의 개창자 살라흐 앗 딘 유수프는 두 지역을 잇는 육상 교통로를 확보하고자 파라오 섬에 자신의 이름을 딴 성채를 세웠다고 한다. 1182년 살라딘이 이집트를 떠나 시리아로 이동할 때에도 근처를 지났다. 한편 이를 그라야 (아랍어로 마을인 카리야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됨) 섬이라 부른 십자군은 같은해 르노 드 샤티용의 히자즈 습격 당시 섬을 점령했으나 1182년 이집트 해군이 수복하였다.
이후 파라오 섬은 십자군 포로 수용소로 활용되었다. 1217년 일대를 지난 순례자 티에트마르는 섬에 무슬림 주민들과 기독교도 포로들이 거주하는데, 후자 집단은 농사나 전투에 투입되지 않고 '술탄의 어부'로서 어업에 종사했다고 기록하였다. 십자군의 위협이 사라진 후에도 맘루크 왕조의 총독은 살라딘 성채에 기거하다가 1320년 경에야 타바 마을로 치소를 옮겼다. 1975-81년의 발굴에서 13-14세기 인도, 이라크, 페르시아산 직물 파편이 발견될 정도로 파라오 섬은 무역의 거점으로 유지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이집트와 십자군 국가들과의 교역장이었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다만 이후 무역의 중심이 서쪽의 수에즈나 쿠세이르 등지로 옮겨지며 방치되던 일대는 20세기 들어 분쟁 지역으로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2.1. 20세기의 국경 분쟁
1839년 파라오 섬 일대의 삽화
1906년 초엽 오스만 제국의 압뒬하미트 2세는 현재의 타바에 전진 기지를 건설하였다. 이에 영국령 이집트 당국은 해안 경비대를 파견하였고, 오스만측 수비대가 상륙을 거부하자 이들은 대신 파라오의 섬에 주둔하였다. 그후 당국은 동지중해에 전함을 파견해 에게 해의 섬들을 장악해버릴 것이라 협박하였고, 결국 5월 13일 타바의 오스만 군은 철수하였다. 그리고 양국은 국경을 확정하기 위해 협상을 벌여 라파에서 동남쪽으로 수직에 가까운 선을 긋고 전신주와 경계석을 박아 국경선을 표시하였다. 이후로 타바는 이집트에 속했는데, 1956년 2차 중동전쟁 중 이스라엘이 일시 점령했으나 이듬해 반환하였다. 그리고 1967년 3차 중동전쟁 당시에 반도 전체를 정복한 이스라엘은 샤름과 마찬가지로 타바에 객실 400개 규모의 호텔을 세우며 휴양지로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1972년에는 현재 공항의 전신인 공군기지를 세웠다.
1979년 이집트와의 휴전회담 당시 이스라엘은 다른 점령지들과 달리 타바 만큼은 1906년 협정에서 본래 오스만 측에 할당되었는데, 추후 회담에서 오류가 생겨 이집트령이 되었다며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논쟁 끝에 타바 귀속 문제는 3자로 구성된 국제 위원회에 회부되었고, 위원회는 1916년 터키-독일 지도를 제외한 모든 1915년부터의 지도들이 타바를 이집트령으로 표기했는데도 별 갈등이 제기되지 않았다고 결론내렸다. 이스라엘은 1906-07년에 기존의 전신주를 경계석으로 교체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긴 것이라 이의를 제기했으나 수용되지 않았고, 그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오랜 기간동안 두 국가에 의해 인정되었다는 것 자체만으로 법적 정당성을 지닌다고 보았다.[1] 이러한 법적 공방 때문에 나머지 시나이 반도가 1982년에 반환된 것과 달리 타바는 1989년 3월 15일에야 이스라엘에서 이집트로 반환되었고,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가 친히 이집트 깃발을 게양하였다.
2.2. 현대
타바의 국기 게양대
한편 회담의 결과 여행자들의 타바-에일라트 검문소 통과 및 14일 무비자의 시나이 반도 관광이 허용되었는데, 이로써 타바는 관광지로 각광받게 되었다. 이집트 정부는 휴양지 개발을 이어나가는 한편 살라흐 앗 딘 성채에 대한 발굴을 마무리하고 일대를 정비, 복원한 후 관광지로 개방하였다. 다만 타바 자체는 국경과 너무 가까운 관계로 힐튼 호텔과 모벤피크 호텔 정도만 위치하고, 나머지 리조트들은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10km 가량 떨어진 해안에 집중되어 분포한다. 관광 외에 타바는 샤름과 마찬가지로 회담장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1995년 9월 24일에 이스라엘과 PLO 간의 협정이 체결되었다. 다만 후르가다와 마찬가지로 외국인에 대한 테러도 있어 2004년 10월 힐트 호텔의 폭탄 테러로 34명이 사망하였고 2014년 2월에는 타바의 검문소를 지나 성 카트린 수도원으로 향하는 버스가 폭발하여 한국인 2인이 사망하고 14인이 부상하였다.
3. 갤러리
바다에서 본 시가지
일대의 바위산
3.1. 피루드 만
보호구역인 피루드 만
3.2. 파라오 섬과 살라딘 성채
성채의 핵심부
[1] 실제로 바다에 닿는 경계석 하나가 사라진 상태이긴 했다. 옛 사진에 이는 타바 동북쪽에 세워져 있었으나 이스라엘은 줄곧 그게 잘못된 위치에 있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