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7 23:37:48

타보 음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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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년 9월 3일부터 대통령중심제로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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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아프리카 연합 기.svg
아프리카연합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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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9167><colcolor=#fff>
남아프리카 공화국 제9대 대통령
타보 음부옐와 음베키
Thabo Mvuyelwa Mbeki
파일:477131.jpg
출생 1942년 6월 18일 ([age(1942-06-18)]세)
남아프리카 연방 이스턴케이프주 음베울레니
재임기간 제9대 대통령
1999년 6월 14일 ~ 2008년 9월 24일
서명
파일:타보 음베키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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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9167><colcolor=#fff> 부모 아버지 고반 음베키
어머니 에파이네트 음베키
배우자 자넬레 음베키 (1974년 결혼)
자녀 1명
학력 서식스 대학교 (경제지리학 / 석사)
소속 정당 }}}}}}}}}

1. 개요2. 생애
2.1. 대통령 재임 시절2.2. 퇴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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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보 음부옐롸 음베키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정치인이며, 넬슨 만델라 다음으로 취임한 남아공을 통치한 제9대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으로, 넬슨 만델라의 동지인 고반 음베키의 아들이다. 아프리카 연합의 1대 의장이기도 했다. 넬슨 만델라를 도와 남아공의 민주화에 공헌을 했고 대통령 재임시에 남아공을 경제적으로 성장시켰다는 평을 듣고, 인종화합정책에서도 만델라 정부의 기조를 그대로 이어받았지만 심각한 빈부격차 문제를 사실상 방치했고[1] 에이즈 정책에서도 실책을 거듭했고, 전임 대통령인 만델라가 에이즈 퇴치에 나서고 나서야 삽질을 멈추웠기 때문에 명과 암이 극명히 엇갈리는 인물이다. 그나마 후임인 제이컵 주마보다는 낫다는 평이다.

2. 생애

타보 음베키는 10대 시절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아프리카 학생회의 간부로 일했으며 이후 런던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남아공 당국으로부터 찍힌 이후로부터는 사실상 반강제적으로 해외에서 망명활동을 하였고 소련에서 군사훈련도 받기도 하였다. 1970년대부터 아프리카 민족회의 해외간부로 일했고 외교적으로도 남아공의 만행을 폭로하면서 ANC에 대한 해외의 지지를 얻는데 주력했고 국제제제를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둔다.

1990년에 남아공 당국이 아파르트헤이트를 단계적으로 해체하겠다고 발표한 이후부터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남아공으로 귀국했으며 남아공 당국과 협의하여 정치범을 석방시키는데 기여하고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협상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공로로 1994년에 아프리카 민족회의 부의장이 되었고 1996년에 국민당(NP)이 연립정권에서 탈퇴한 이후에 부통령이 되었다. 1999년에 넬슨 만델라에 뒤 이어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2.1. 대통령 재임 시절

타보 음베키가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에 해외로부터 투자를 대거끌여들어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제가 크게 성장했고 외교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며 아프리카 각 분쟁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는 국가가 되었고[2] 만델라 정권부터 이어진 인종화합정책도 비교적 성공적으로 시행했다. 그러나 빈부격차가 극심하여 다수 흑인들에게 경제성장의 과실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부정부패 사건도 여러 건 터진데다가 전력발전소 건설 미비로 임기 말에는 전력부족 사태가 터지는 등 어수선한 일이 많았다.

특히 재임 초기에 후천성면역결핍증[3] 확산되어 '남아공이 망하네 마네' 소리가 나왔을 때 유사과학에 빠져서 국가의 수장이라는 작자가 "지금까지 죽은 사람이 걸린 병은 HIV 바이러스 때문이 아닌 굶주림에 의한 면역체계의 약화 때문이다. 우리의 민족의학으로 치료가 가능하다"따위의 허위루머 가득한 주장으로 공공병원에서의 항바이러스제 불법화를 추진시키고 그 대체제로 레몬주스같은 민간요법을 쓰라는 켐페인을 벌이며 에이즈 확산을 사실상 방치했다.

이후 병의 실체가 알려지고 나서도 대응을 엉망으로 한 탓에[4]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 직접 나서 타보 음베키의 대응을 공개적으로 비판을 했을 정도였다. 현재 에이즈에 관련된 연구를 진행하는 학자들이나 남아프리카를 포함한 사하라 사막 남쪽 지역에서 활동하는 의료계 쪽 인물들이나 사회학자들에게 이쪽 지역의 에이즈 확산의 가장 큰 이유를 뽑으라고 한다면 음베키 대통령의 이름이 아파르트헤이트, 남녀차별, 그리고 식민지 시절 당한 수탈과 그로 인해 생겨난 비정상적인 사회, 정치 구조 등등의 국가적 실책들과 동급에서 언급되는 단골 소재일 정도. 이때 에이즈에 대한 무책임한 대처로 사망한 사람이 대략 30만명 정도로 추산될 정도다.

그나마 사태가 걷잡을수없이 확산되면서 당장 발등의 불을 끄기는커녕 그 불이 전신으로 퍼지자 남아공 정부는 그제서야 주장을 조용히 바꿔 약품과 관련 서비스를 시민들에게 지급하긴 했지만 그 전에 에이즈 환자 수십만이 대통령 개인의 신념에 따라 전혀 엉뚱한 처방을 받으며 방치되었기에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욕을 얻어먹었다. 심지어 이것조차도 대통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각이 대통령의 명령을 묵살하며 실행했다는 설까지 있을 정도. 현대 의학으로 에이즈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아예 없으며 가장 좋은 에이즈 대처법은 사전예방과 주기적이고 대대적인 검사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삽질이다.

심지어 나중에 그의 평전 작가가 음베키가 "그때 내 의견이 내각 앞에서 꺾였던 것을 후회한다"식의 말을 했으며,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위협을 무릅쓰며 고통받는 이들을 살리기 위해 일하는 AIDS 관련 의료진들을 나치 수용소의 군의관, 즉 사람을 생체 실험도구로 여기는 천하의 개쌍놈들과 비교했으며 HIV와 AID의 관계를 설명하는 정설, 사실상의 "진실"을 "서구 사회에서 아프리카인들을 바라보는 인종차별주의적 학설"이라고 매도하고 심지어 살기 위해서 현실을 인지하고 국가에서 보급한 약품들과 혜택들을 받아들인 국민들을 "노예 근성에 찌든 사람들"이라고까지 칭했다는게 알려졌다. AIDS와 HIV의 관계, 그리고 알려진 HIV의 감염경로에 의거한 의료, 예방 방법과 "칵테일 치료법"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항바이러스제 기술의 보급으로 감염자 증가율과 감염자 사망률이 크게 떨어진 상황에서도 자신의 오판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사실상 이 정도면 서구 사회에 대한 피해망상증까지 의심될 정도.

여러 인물들의 노력과 국제 사회의 관심 덕택에 에이즈 증가율은 현재 크게 감소한 상태이긴 하지만 오늘날 남아프리카는 변함없이 세계 최대의 HIV감염자 보유국가이며 성인 국민 다섯 명중 한 명, 전체 인구에서는 열 명에 한 명꼴의 사람들이 에이즈에 감염되어있다. 보통 감염인원수가 인구의 1%를 돌파했을 경우 "유행병"으로 분류되며 각 나라들도 더욱더 이를 멈추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본다면 이 감염인 수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숫자인지 알 수 있다. 게다가 감염자가 가장 높은 나잇대는 거의 25%의 감염률을 보이고 있는 15~30의 청년층. 현대와 근미래를 이끌어 나가야 할 청년층의 1/4이 HIV에 감염되어 에이즈의 위협에 노출되어있거나 이미 죽은 상황에서 이들이 남기고 갈 에이즈 고아, 그 고아들을 돌볼 힘이 없고 얼마 살 날도 안남은 노년층, 자식들을 올바르게 키워줄 부모세대의 전멸 등등의 사회 문제까지 더해져 이 하나의 허물만으로 이뤄놓은 업적을 다 가릴 정도이다.

하지만 경제는 매년 5%대의 성장을 기록하면서 괜찮은 성과를 거두웠고 또한 일부 컬러드층의 지지를 흡수했기에 2004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었지만 재임 말기에 권력 다툼에 휘말렸고 2009년 총선을 7개월 앞두고 결국 중도 사퇴하게 된다.

이 시기에 흑인의 경제적 불균형을 해소한답시고 일부 기업내의 인종 쿼터제, BEE등의 정책을 시행하였으나 결과는...
결국 백인이나 인도인 단독으로 경영하는 일부 기업체에게 악영향을 끼쳤으며, 이는 큰 스노우볼로 밀려와 국영기업이 무능한 고위층에게 넘어가고, 부정부패가 심해지면서 경제적 과실이 계속 소외받던 흑인들에게 골고루 분배되지 못하게 했으며 결국 이는 남아공의 인종 갈등과 사회 불안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일으켰다. 한마디로 만델라 사후 대통령들은 하나 같이 나사가 많이도 풀렸던 것. 결국 ANC에 대한 평판마저 악화시키며 요하네스버그, 프리토리아, 케이프타운과 웨스턴케이프주가 민주동맹한테 넘어가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여기에 이 양반은 불법 이주 노동자가 이웃 국가에서 몰려오는 것도 막지 못해서 안 그래도 아파르트헤이트로 인종간의 빈부격차가 매우 심각하고 일자리도 없고 인프라도 충분치 못한데 요하네스버그 같은 곳의 치안을 악화시키고 경제적 참사가 일어나는데 기여했다...

2.2. 퇴임 이후

대통령에서 퇴임한 이후 2009년 총선에서 인민회의를 후원하기도 했지만, 무위로 돌아갔고 정계에서 사실상 은퇴한 이후 외교 활동에 주력하고 있는 중이다. 독재자에게 너무 관대하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럼에도 내전을 중재하는 등 '남아공의 얼굴 마담'으로써의 역할은 잘 하고 있다. 대통령으로써는 명과 암이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지만, 외교관으로써의 능력은 좋은 편이다.

2024년 1월 2일 향년 81세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오보로 밝혀졌다.(관련 기사)


[1] 흑인기업을 지원하고 주요 기업에게 흑인들을 채용을 하면 세제혜택을 주는 정책(BFF)를 펼치며 흑인중산층이 성장했지만 흑인기업지원 정책으로 성장한 계층이 한정적이라 흑인 전반의 빈곤해소에는 실패해서 단순히 흑백격차만 좁힌 수준이었고, 가난한 계층을 대상으로 한 보조금 확충은 했다지만 그 보조금이 한국 돈으로 월 몇만원 정도 하는 수준이라 그저 굶주리는 계층을 줄인 정도라는 평이었다.[2] 특히 2010년 월드컵 개최권을 딴 것도 타보 음베키의 공이다.[3] 에이즈[4] 경제학 학위를 따고 나라를 이끌 정도의 엘리트라고는 해도 생물학을 전공한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