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4 05:47:08

파블롭스크 실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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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어: Павловская опытных станция.
영어: Pavlovsk Experimental Station.

1. 개요2. 역사
2.1. 레닌그라드 공방전 시기 (전반)2.2. 레닌그라드 공방전 시기 (후반)2.3. 레닌그라드 공방전 이후2.4. 새로운 위협
3. 등장 작품4. 기타5. 참고 문헌/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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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남부의 푸쉬킨-파블롭스크(Pushkin-Pavlovsk)[1]에 있는 농식물 실험국 겸 종자은행. 웹 사이트

모(母)기관은 바빌로프 식물산업 연구소(Vavilov Institute of Plant Industry, Vavilov Research Institute(VRI))이다. 1926년에 만들어진 세계 최초 종자은행이자 지금까지도 세계에서 굉장히 큰 종자은행들 중 하나다. 파블롭스크 실험국이 보유한 약 25만 종의 표본과 6만 종자들의 90%는 다른 종자은행에는 없는 종자들로 그 가치가 굉장히 높다. 한 예로 딸기 하나만 1,000종이 넘는 표본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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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니콜라이 바빌로프 기념 우표
1924년에 식물학자이자 유전학자인 니콜라이 바빌로프(Nikolay Vavilov)[2]에 의해 바빌로프 연구소가 설립되고 1926년에 파블롭스크 실험국이 만들어졌다. 세계 최초 종자은행이며 종자의 다양성을 보존하기 위한 최초의 사례이다. 하지만 바빌로프는 용불용설과 밀식 농법을 주장하며 소련높으신 분들과 긴밀한 커넥션을 갖고 있었던 라이벌 트로핌 리센코에게 끊임없이 견제를 받았고, 1940년 10월 6일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숙청당했다.

바빌로프는 1941년 7월에 사형 선고까지 받았고 과학자들이 탄원하여 1942년에 20년형으로 감형되었지만 1943년 1월 26일 향년 56세로 사라토프 감옥에서 폐렴으로 옥사했다. 당대 소련 최고의 유전학자가 정치적 모략으로 사라진 셈이다. 바빌로프는 훗날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격하하면서 복권되었다.

숙청되기 전까지 니콜라이 바빌로프가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모았던 종자 및 표본들은 파블롭스크 실험국에서 보관하였으나 1941년 여름 레닌그라드 공방전이 시작되면서 시설은 풍전등화의 위태에 처했다.

2.1. 레닌그라드 공방전 시기 (전반)

전쟁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시설의 과학자들은 미리 이에 대비하여 종자들을 안전하게 보관하고자 노력하였다. 파블롭스크 실험국이 소장한 표본들은 대체로 '밭 유전은행'(Field Genebank)의 형태로 저장되었는데[3] 전쟁의 포화에 직접적으로 노출될 경우 보존이 극히 어려웠다. 1941년의 늦은 여름에 아브람 야코블레비치 카메라즈(Абрам Яковлевич Камераз)와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보스크레센스카야(Ольга Александровна Воскресенская)를 포함한 일단의 과학자들이 더 늦기 전에 정신없이 감자를 수확하여 보관하고, 시설 내에 흩어져 있던 종자들을 최대한 안전한 곳에 집적시킨 후 각 표본을 분산 보존시켜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과학자들은 시설 보호에 사실상 아무런 외부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1941년 여름에 감자를 수확할 때는 그나마 소련군에게 협조를 요청하여 트럭을 빌릴 수 있었지만 레닌그라드 공방전이 진행되던 28개월간은 오히려 표본들이 식량으로 징발당하는 것을 걱정해야 했다. 비슷한 시기에 소비에트 연방에서 직접 대피시킨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예술작품들과는 달리 당시 기준으로 약 40만 종에 달하는 식물 종자들 및 씨앗, 뿌리, 그리고 과일 표본들은 방치되었다.[4] 설상가상으로 레닌그라드 공방전이 이어지면서 굶주린 해충과 들짐승들, 시민들도 경계대상이 되어 시설에 남아있던 과학자들과 직원들은 실험국을 최대한 요새화하였다.

독일 국방군의 끊임없는 레닌그라드 도심 포격으로 실험국의 창문들이 항상 깨져 이에 과학자들은 나무 판자로 틈새를 막아서 냉기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공방전이 지속되면서 자원 고갈이 심화되었고, 땔감이나 석탄이 없어서 건물은 항상 춥고 습하며 어두웠다. 불행 중 다행으로 파블롭스크 실험국 시설이 독일 영사관과 히틀러가 레닌그라드 점령 이후 승전 연회를 열 계획이었던 아스토리아 호텔 근처에 위치하여서 직접적인 포격의 대상이 될 일은 없었다.

바빌로프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모은 종자와 표본은 16개의 방을 가득 채울 정도였으며 그 누구도 보관실에 홀로 들어갈 수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는 열쇠는 시설의 책임자 중 한 명인 루돌프 야노비치 코르돈(Рудольф Янович Кордон)이 금고에 보관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종자들의 상태를 확인하였는데 혹시라도 홀로 들어갔을 때 유혹을 이기지 못할 것을 미리 예방한 조치였다.

겨울이 지속되면서 온도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갔고, 감자 종자는 냉해로 인해 얼어 죽을 위기에 처했다. 시설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박스, 종이, 부서진 건물의 잔해 등 태울 수 있는 모든 걸 태워서 감자를 비롯한 종자들을 보호했고 굶주린 시민들이 시설을 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24시간 불침번을 돌아가면서 저장고를 지켜냈다. 추운 날씨는 종자 보관에는 문제를 일으켰으나 라도가 호수가 얼어붙으며 생긴 '생명의 길'을 통해 우랄 산맥에 있는 저장고로 표본들을 대피시키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우랄 산맥으로 건너간 표본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안전하게 보관되었으며 전후 다시 파블롭스크 실험국으로 돌아왔다.

2.2. 레닌그라드 공방전 시기 (후반)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겨울이 찾아오고 있었다. 동장군과 함께 찾아온 손님은 죽음이었다. 나치 독일과 핀란드에게 포위된 도시에서는 이미 수 만 명이 아사하고 있었으며 실험국 역시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굶주린 대중들이 실험국 근처를 서성였고, 굶주리고 버려진 동물들은 언제든 실험국 안에 침투할 수 있었다. 실험국의 과학자들은 수많은 종자들을 갖고 있어 이들을 먹었다면 굶어죽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들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기꺼이 죽음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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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롭스크 실험국에 있던 과학자들.
  • 그리고리 알렉산드로비치 룹초프(Григор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Рубцов) (1887~1942): 영양실조로 사망. 과일 담당.
  • 바딤 스테파노비치 레흐노비치(Вадим Степанович Лехнович) 박사 (1902~1989): 아래 올가 보스크레센스카야의 남편이다.
  •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보스크레센스카야(Ольга Александровна Воскресенская) (1904~1949.3.3): 덩이줄기 식물 담당. 전쟁 중에 건강을 해쳐서 1949년에 사망하였다.
  • 아브람 야코블레비치 카메라즈(Абрам Яковлевич Камераз): 아사. 덩이줄기 식물 담당.
  • 게오르기 카를로비치 크레예르(Георгий Карлович Крейер) 박사 (1887~1942.2.12): 아사. 의학 식물 담당.
  • 알렉산드르 가브릴로비치 슈킨(Александр Гаврилович Щукин) (1883~1941.11.27): 아사. 땅콩 담당.
  • 드미트리 세르게예비치 이바노프(Дмитрий Сергеевич Иванов) (1887~1942.1.9): 아사. 벼 품종 담당.
  • 리디야 미하일로브나 로디나(Лидия Михайловна Родина): 아사. 귀리 종자 담당.
  • 옐레나 S. 킬프(Yelena S. Kilp)
  • 게오르기 빅토르비치 게인츠(Георгий Викторович Гейнц) (?~1942.2.16): 아사. 수석 사서.
  • 니콜라이 로디노비치 이바노프 박사(Николай Родионович Иванов) 박사 (1902~1978): 실험국의 수장이었고 종전 이후까지 생존했다. 바빌로프 명예 복권 이후 제정된 바빌로프 상을 수상했다.
1942년 1월 땅콩 전문가였던 알렉산드르 슈킨(Александр Г. Щукин)이 자신의 책상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의학 식물 담당이었던 게오르기 크리에르(Георгий К. Крейер), 품종 담당이던 드미트리 이바노프(Дмитрий С. Иванов), 귀리 종자를 책임지던 리디야 로디나(Лидия М. Родина)도 이어서 아사했다. 드미트리 이바노프의 경우 자신이 주머니를 하나라도 잘못 건드리면 조국의 농업에 영구적 손실[5]이 올 것이라고 생각해 자신의 방에 있던 벼 품종이 담겨 있는 수천에 달하는 주머니들을 굶어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건드리지 않은채 발견되었다. 앞서 나온 덩이줄기[6] 담당이던 아브라함 카메라즈(Абрам Я. Камераз)도 결국 굶어 죽었다. 이 밖에도 M. 스테헤글로프(M. Steheglov), G. 코발렙스키(G. Kovalevsky),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레온티옙스키(Николай Петрович Леонтьевский, ?~1942.1.3), 아니시야 이바노바 말리기나(Анисия Ивановна Мальгина), A. 코르준(A. Korzun) 등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 둘씩 쓰러졌으며 이들 모두가 자신들이 지키던 종자에 손을 대기를 거부하고 고통과 싸우다가 죽음을 택했다. 인간의 3대 욕구 중 하나인 식욕을 죽는 순간까지 버틴 그들은 분명 영웅이다.[7]

실험국을 방문한 것은 기아뿐만이 아니었으며 병마와 싸우다 스러진 이들도, 포탄에 의해 사망한 이들도 있었다. 식물 표본실 관리자였던 예브게니 불프(E. V. Wulff)는 파편에 맞아 과다출혈로 사망했고 바빌로프의 현장 일지 관리자였던 예브게니 글레이베르(E. I. Gleiber)는 귀중한 문서가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서 땔감이 될 것을 염려해 끝까지 문서실을 지키다 죽었다.

2.3. 레닌그라드 공방전 이후

1944년 1월, 레닌그라드의 포위가 풀릴 때까지 실험국에서 종자를 지키며 죽어간 사람들은 8명부터 30명까지 출처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8]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이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지켜낸 종자들은 전쟁 후 세계의 채소와 과일의 품종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러시아가 세계 최대의 공급자인 블랙 커런트(Black Currant)[9]는 약 60%에 달하는 품종들이 파블롭스크 실험국의 종자들을 이용하여 개량한 것이다. 참고로 이 블랙 커런트만으로 러시아는 연간 미화 4억 달러에 달하는 매출을 올리고 있다. 실험국이 독일에 의해 파괴되었거나 굶주린 인민들에 의해 약탈당했다면 트로핌 리센코 때문에 큰 문제를 겪었던 소련의 농업이 더욱 심각한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후에 그들이 지켜낸 종자는 나치 독일이 망가뜨린 소비에트 연방의 식량의 75%를 복구해내는 데 기여했으며 1970년대에 에티오피아에 보내져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이 통치하던 에티오피아의 대기근을 구해내기도 했다.

2.4. 새로운 위협

2010년에 들어서면서 부동산 개발자에게 파블롭스크 실험국이 위치한 대지가 매각되면서 미래가 불투명해졌다. 부동산 개발자는 파블롭스크 시설을 철거하고 고급 주택을 짓고자 하였는데, 이러한 계획이 실행될 경우 실험국이 소장한 표본의 많은 양이 소실될 전망이었다. 표본을 다른 곳으로 이관이나 운송하기도 곤란하였는데 이는 어마어마한 양의 표본을 턱없이 짧은 공시일 내로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2010년 8월 당시 대통령이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가 트위터로 해당 사안이 검토 중에 있음을 알렸으며 많은 과학자들이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결국 2012년 4월 러시아 연방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보관소를 보존하기로 하였고 사적 이익을 위한 개발을 중지시켰다.

3. 등장 작품

  • 엘리즈 블랙웰(Elise Blackwell)이 집필한 소설 굶주림(Hunger)은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파블롭스크 실험국에 있던 과학자들을 다루고 있다.
  • 디셈버리스츠(The Decemberists)의 2006년 발매 앨범 The Crane Wife의 When the War Came은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의 파블롭스크를 다루는 가사를 담고 있다.
  • 2020년에 방송한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의 다큐멘터리인 코스모스: 가능 세계에서 니콜라이 바빌로프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파블롭스크 실험국의 이야기도 같이 다루었다. 당시 방송에서 소련의 농업의 미래를 위해 종자들 지키다가 죽어간 소련 과학자들의 영웅적인 희생을 소개하고, 동시에 이 기관에서 보관하던 종자들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던 바빌로프의 역경을 찬탄했다.
  • 2023년에 출시한 러시아 비디오게임 아토믹 하트에서는 과학 연구 기관인 3826 시설에서 '바빌로프 복합단지'라는 이름으로써 도시급으로 대형화되어 등장한다. 당작 세계에서는 현실과 달리 제2차 세계 대전이 1941년에 일찍 끝나게 되면서 레닌그라드 공방전을 거의 겪지 않았고, 앞서 트로핌 리센코가 먼저 숙청되었는지 니콜라이 바빌로프는 작중 현 시점인 1955년에도 여전히 과학자로 활동하고 있다.

4. 기타

  • 비슷한 일이 시리아 내전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준동 당시의 ICARDA(국제건조지역농업연구센터)에 있었다. ICARDA는 당시 시리아 알레포에 있었는데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는 ICARDA를 점령한 뒤 보관된 종자를 식량으로 내놓으라고 협박했고 ICARDA의 과학자들은 일단은 굴복해서 종자를 내 주었다. ICARDA은 다행히도 이전부터 시리아의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예감하고 종자를 미리 반출해 뒀던 데다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는 과학연구소를 죄다 파괴하는 미친놈들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식량창고였던 ICARDA를 파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종자를 반출해서 먹어도 일단은 연구 목적으로 반출한 것을 먹였기 때문이다. 다만 이후에 러시아가 ICARDA 건물을 폭격하혀 피해를 입어 모로코와 레바논으로 이전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때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에 기탁했던 종자를 되돌려 달라고 요청하였으며, 이는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의 첫 반출 사례였다.

5. 참고 문헌/외부 링크



[1] 북위 59.7143°, 동경 30.4236°.[2] 육종학을 배우게 되면 제일 먼저 접하는 이론인 종과 변종의 기원중심지 이론을 만든 사람이다.[3] 이는 실험국 대부분의 표본들이 씨앗에서 발아 시 동일한 특질을 가진 고정형으로 발아하지 않는 문제에서 기인했다. 이러한 종자들은 밭에서 기르면서 고정적인 형질을 계속해서 보전해야 한다.[4] 바빌로프가 숙청당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바빌로프의 영향이 남아 있던 시설이 의도적으로 배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5] 이런 종자들은 사람의 손이 닿을 경우 환경에 따라 곰팡이(포자) 계열의 종자병에 걸릴 확률이 상당히 높아진다. 즉, 조금만 먹기 위해 주머니를 잘못 열어도 한순간에 종자병이 퍼져서 큰일날 수 있다는 이야기다.[6] 뿌리에 영양분을 저장하는 식물들. 감자, 고구마, 토란 등이 있다.[7] 종자라고 서술되어 있으니 그 수량이 매우 적어 보이지만 당시 실험국에서 보관하던 종자들은 종류별로 최소한 커다란 자루 수 개, 기본적으로 수십 ~ 수백 개에 담겨져 있는 수준이었다. 즉, 실험국의 직원들은 식량이 톤 단위로 쌓여져 있는 상황에서 굶어 죽은 것이다.[8]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2011년 7월호에서 9명이 굶어 죽었다고 하고, 허핑턴 포스트는 2010년 8월 18일자 기사에서 30명에 달하는 과학자들과 시설 직원의 상당수가 겨울의 기아로 죽었다고 서술했다. 다이버시티에 1991년에 기고된 글에서는 이름이 나온 사람은 11명이나 그 이상이라고 서술했다.[9] 까치밥나무과의 관목으로 베리의 일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