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BE3EC><colcolor=#000000> {{{#000000 오를레앙 공작부인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Elisabeth Charlotte von der Pfalz }}} | ||
이름 | 독일어 |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Elisabeth Charlotte) |
프랑스어 |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Èlisabeth Charlotte) | |
출생 | 1652년 5월 27일 | |
신성 로마 제국 팔츠 선제후국 하이델베르크 하이델베르크 성[1] | ||
사망 | 1722년 12월 8일 (향년 70세) | |
프랑스 왕국 일드프랑스 생클루 성[2] | ||
배우자 | 오를레앙 공 필리프 1세 (1671년 결혼 / 1701년 사망) | |
자녀 | 알렉상드르 루이, 필리프 2세,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 |
아버지 | 팔츠 선제후 카를 1세 루트비히 | |
어머니 | 헤센카셀의 샤를로테 | |
형제 | 카를 2세 | |
종교 | 칼뱅파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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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의 후처.흔히 본명보다 애칭인 '리젤로테'라고 불리거나 프랑스 왕자비로서의 칭호인 마담 혹은 팔츠 공주라고 알려져 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팔츠 선제후국 출신으로 팔츠 선제후 카를 1세 루트비히[3]의 딸이다.
또한 프랑스의 섭정이 된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의 어머니이다.
2. 작위
-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공녀 전하 Princess Elizabeth Charlotte of the Palatinate (1652년 5월 27일 ~ 1671년 6월 7일)
- 오를레앙 공작부인 마담 전하 Her Royal Highness Madame, The Duchess of Orléans (1671년 6월 7일 ~ 1701년 6월 9일)
- 오를레앙 공작대부인 마담 전하 Her Royal Highness Madame, The Dowager Duchess of Orléans (1701년 6월 9일 ~ 1722년 12월 8일)
3. 생애
3.1. 초기 일생
1652년 5월 27일 팔츠 선제후국의 수도 하이델베르크의 하이델베르크 성에서 팔츠 선제후 카를 1세 루트비히와 헤센-카셀의 샤를로테 사이에서 태어났다. 엘리자베트 샤를로트의 조부모는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와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1세의 장녀 엘리자베스 스튜어트다.잉글랜드-스코틀랜드의 윌리엄 3세와는 6촌지간이었는데 할머니였던 엘리자베스 스튜어트는 엘리자베트 샤를로트가 윌리엄 3세와 혼인하길 바랐다고 한다. 하지만 프랑스와의 관계를 강화하려는 아버지 카를 1세 루트비히의 정략에 의해,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와 혼인했고 이를 위해 개신교(칼뱅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엘리자베트 샤를로트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했기 때문에, 막내고모였던 하노버 선제후비 조피에게 맡겨졌고 조피의 아들이자 사촌인 조지 1세와도 친했다.
3.2. 결혼
1671년 11월 21일 12살 연상인 루이 14세의 동생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와 결혼하게 된다. 당시 필리프 1세는 전처인 잉글랜드의 헨리에타[4]와 사별한 뒤였다.하지만 필리프 1세는 결혼 당시 평판이 나빴다. 그는 곱상한 외모의 소유자였고 유럽 제일의 패셔니스타였지만 동성애자였고 행동거지도 여성스러워 여장을 즐겨했다. 오를레앙 공작의 동성애인 필리프 드 로렌이 오를레앙 공작의 첫번째 아내 헨리에타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온 유럽에 퍼졌을 정도였다. 필리프 1세와 헨리에타의 부부 사이가 얼마나 나빴던지, 헨리에타가 루이 14세에게 청원해서 필리프 드 로렌을 로마로 유배보냈던 적도 있었다.
3.3. 프랑스의 마담(madame)
오를레앙 공작과 결혼한 후에는 프랑스 궁정에서 '마담'이 되었다. 당시 프랑스에서 귀족의 성을 붙이지 않고 그냥 마담이라고 말하면 왕의 동생의 아내를 말한다. 당대를 다룬 프랑스 서적에서 '마담'이 나온다면 필리프 1세의 전처 헨리에타 앤이나 후처 엘리자베트 샤를로트를 가리킨다. 또한 이때부터 본명인 엘리자베트 샤를로트보단 애칭인 '리젤로테'로 더 자주 불리게 된다.리젤로테의 성격과 생활습관은 프랑스 궁정과 달랐다. 리젤로테의 취미는 사냥과 산책이었는데 종종 루이 14세와 함께 사냥하면서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긴 산책을 하는 습관과 여성의 사냥은 프랑스 궁정에서 낯설었기 때문에 독일인 이방인이였던 리젤로테는 비웃음을 샀다. 하지만 곧 리젤로테의 개방적이며 직설적이고 쾌활한 성격은 프랑스 궁정에서 많은 이들에게 호감을 샀다. 하지만 루이 14세와의 관계는 훗날 그의 정부 맹트농 후작부인 때문에 다소 틀어진다.
리젤로테는 자신의 친척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마다 자신의 궁중생활이 어떠한지에 대해 자세히 썼는데, 오늘날 이 편지들은 베르사유 궁전의 문화나 생활에 대해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로 쓰이고 있다. 리젤로테는 고모였던 하노버 선제후비 조피와 죽을 때까지 많은 양의 서신을 교환했고, 오늘날에도 그 서신이 남아있어 당시 베르사유 궁전의 일상을 알아볼 수 있는 주요한 증거가 되고 있다.
또한 남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가 전처에게서 본 의붓딸들인 마리 루이즈 도를레앙(Marie Louise d'Orléans)[5]과 안 마리 도를레앙(Anne Marie d'Orléans)[6]을 친자식처럼 길렀다. 리젤로테가 필리프 1세와 1671년에 결혼할 때 마리 루이즈는 만 9세였고 안 마리는 만 2세였다.
다만 남편 필리프 1세와의 관계는 좋지 못했다. 필리프는 동성애자 혹은 양성애자였고 항상 필리프 드 로렌 등을 비롯한 동성 애인들 및 젊은 남성들과 어울려다녔다. 결국 리젤로테는 남편의 성향에 관해 체념하다시피 했고 부부간의 의무를 다해 2남[7] 1녀를 두었지만 나중에 침실을 따로 쓰기로 합의했다. 리젤로테의 아들이 훗날의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이며, 딸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도를레앙(Élisabeth Charlotte d'Orléans)은 로렌 공작 레오폴트 1세와 결혼했다.[8]
리젤로테는 루이 14세의 정부들을 싫어했고 필리프 1세의 여러 동성 애인과 남자 추종자 때문에 마음 고생을 했다. 리젤로테의 시녀들이 필리프의 애인들에게 공격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리젤로테는 루이 14세의 정부 중 하나인 맹트농 후작부인을 경멸적으로 싫어해서 자신의 편지에다가 종종 그녀의 험담을 썼다가 1683년 루이 14세와 맹트농 후작부인 내외에게 책잡히기도 했다.[9]
1688년 오빠였던 카를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루이 14세가 제수였던 리젤로테의 권리를 주장하며 팔츠 계승 전쟁을 일으켰다.
1692년 루이 14세는 자신의 조카이자 리젤로테의 아들인 샤르트르 공작 필리프와 자신과 몽테스팡 후작부인의 사생아 딸인 프랑수아즈 마리 드 부르봉의 혼인을 명했다.
하지만 리젤로테는 자신이 싫어하는 몽테스팡 후작부인의 딸인데다 사생아에 불과한 프랑수아즈 마리가 며느리가 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고, 필리프 1세도 대놓고 반대하진 않았지만 아들이 혼담을 거절하길 바랐으나 당시 어리고 정치적 경험도 없던 샤르트르 공작은 얼떨결에 승낙해버렸다. 이에 화가 난 리젤로테가 루이 14세가 보는 앞에서 아들의 뺨을 치고, 왕에게 절조차 하지 않고 돌아갔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루이 14세는 동생 부부를 달래기 위해 조카이자 사위가 될 샤르트르 공작 필리프에게 무려 2만 리브르나 되는 지참금을 하사하고, 동생인 필리프 1세에게도 허용치 않았던 군대에서의 지위까지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간신히 결혼을 성사시켰다.
3.4. 말년
말년의 리젤로테 |
1701년 6월 9일 남편 오를레앙의 공작 필리프 1세가 사망하자 결혼할 때 했던 계약대로 리젤로테는 수도원에 들어가 살아야 했으나 루이 14세는 그녀의 칭호를 유지하는 것을 허락했다. 리젤로테는 베르사유 궁전에 들어가 살았다.
1715년 아들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가 프랑스의 섭정이 됐다.
1722년 12월 8일 오를레앙 공작의 저택인 생클루에서 사망했다. 유해는 생 드니 대성당에 묻혔다.
4. 가족
4.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Elisabeth Charlotte of the Palatinate) | <colbgcolor=#fff3e4,#331c00> 팔츠 선제후 카를 1세 루트비히 (Karl I. Ludwig, Elector Palatine) | <colbgcolor=#ffffe4,#323300>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 (Friedrich V, Elector Palatine) | |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4세 (Friedrich IV, Elector Palatine) | |||
오라녀나사우의 루이제 율리아나 (Louise Juliana of Orange-Nassau) | |||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Elizabeth Stuart) | |||
제임스 1세 (James I) | |||
덴마크의 아나 (Anna af Danmark) | |||
헤센카셀의 샤를로테 (Charlotte of Hesse-Kassels) | |||
헤센카셀 방백 빌헬름 5세 (Wilhelm V, Landgrave of Hesse-Kassel) | |||
헤센카셀 방백 모리츠 (Moritz, Landgrave of Hesse-Kassel) | |||
졸름스 라우바흐의 아그네스 (Agnes of Solms-Laubach) | |||
하나우 뮌젠베르크의 아말리 엘리자베트 (Amalie Elisabeth of Hanau-Münzenberg) | |||
하나우 뮌젠베르크 백작 필리프 루트비히 2세 (Philipp Ludwig II, Count of Hanau-Münzenberg) | |||
나사우의 카타리나 벨히카[10] (Catharina Belgica of Nassau) |
4.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 (Philippe II, Duke of Orléans) | 1674년 8월 2일 | 1723년 12월 2일 | 프랑수아즈 마리 드 부르봉[11] 슬하 1남 6녀[12] |
1녀 | 로렌 공작부인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Elisabeth Charlotte, Duchess of Lorraine) | 1676년 9월 13일 | 1744년 12월 23일 | 로렌 공작 레오폴드 슬하 3남 3녀[13] |
5. 미디어에서
[1] 現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카를스루에 현 하이델베르크[2] 現 프랑스 일드프랑스 오드센 주 생클루[3]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와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찰스 1세의 누나)의 아들이다. 30년 전쟁으로 인해 팔츠 선제후국을 잃고 오랫동안 네덜란드 공화국과 잉글랜드 왕국으로 망명을 가있기도 했다. 하지만 청교도 혁명 당시 자신의 외삼촌인 찰스 1세보다 공화파와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어머니와 사이가 틀어지기도 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30년 전쟁이 막을 내린 후 팔츠 선제후의 지위가 복권되면서 선제후로 복위했다.[4] 찰스 1세와 앙리에트 마리의 딸. 참고로 엘리자베트 샤를로트의 할머니 엘리자베스 스튜어트가 찰스 1세의 누나이기에, 헨리에타 앤은 엘리자베트 샤를로트의 오촌 고모이기도 하다.[5]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의 첫번째 왕비.[6] 사보이아 공국 공작이자 사르데냐 왕국 초대 국왕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왕비.[7] 아들 중 1명은 유아기 때 사망했다.[8]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도를레앙의 아들이 바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1세다.[9] 루이 14세는 자신의 왕비 마리 테레즈가 죽은 후 1683년에 맹트농 후작부인과 비밀 결혼을 했고, 비록 귀천상혼이었지만 맹트농 후작부인은 왕의 부인으로서 왕비나 다름없는 권세를 누렸다.[10] 침묵공 빌럼의 딸이다.[11] 루이 14세와 몽테스팡 후작부인의 사생아.[12] 모데나 레조 공작부인 샤를로트 아글레, 스페인의 왕비 이사벨 등[13] 프란츠 1세, 로렌의 샤를 알렉상드르 공자, 사르데냐의 왕비 엘리사베타 테레사(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의 왕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