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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네르바흐체 SK/역사 및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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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2020년대

1. 개요

페네르바흐체 SK의 역사 문단을 가진다.

2. 역사

1907년 오스만 제국 시절, 지야 송귈렌(Ziya Songülen), 아예툴라 베이(Ayetullah Bey), 네지프 오카네르(Necip Okaner)를 위시로 한 초급 장교들이 카드쾨이에서 창단한 축구단이다. 구단명은 연고지인 카드쾨이에 있는 등대 '페네르바흐체 등대(Fenerbahçe Feneri)'[1]에서 유래했다. 1903년에 노동자들이 모여서 창단한 베식타스 JK, 1905년에 오스만 제국 귀족 자제들이 창단한 갈라타사라이 SK와 같이 이스탄불을 상징하는 3대 구단(사실 이 말고도 이스탄불스포르나 이스탄불 BB같이 이스탄불을 연고지로 하는 축구단은 10개가 넘으나 이 3대 팀에 압도적으로 가려져 2011-12 시즌에 죄다 2부 리그 이하로 강등되어 있다가 14-15 시즌에는 이스탄불이 연고지인 카슴 파샤가 1부리그다.)이었으나 초창기에는 귀족들이 중심으로 후원하던 갈라타사라이 SK와 달리 자금면으로 떨어져 비슷한 처지인 베식타스 JK와 같이 무척 고달픈 시절을 겪어야 했다.

1909년 처음으로 참여한 공식 대회인 술탄컵에선 갈라타사라이에게 0:2 패배를 당한 뒤로 1921년까지 갈라타사라이를 상대로 공식경기 24전 전패, 비공식 친선전으로도 15전 전패를 당하며 단 한번도 이기지 못했다. 이 굴욕적인 초창기 역사 때문인지 갈라타사라이와 원수지간 라이벌이 되어 이스탄불 더비로 알아주게 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IlkSampiyonlar.jpg
그래도 어려운 사정 속에서도 1911~1912 시즌 첫 시즌 오스만 챔피언십 리그 우승을 기록했다.

갈라타사라이의 독주가 이어지다 1922년 오스만 제국이 멸망할 무렵,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튀르키예 공화국 건국과정에서 양팀의 사정이 뒤바뀐다. 구 기득권층인 오스만 귀족들이 대부분이던 갈라타사라이로선 아타튀르크와 반목하던 반면, 대조적으로 초급장교와 사병들이 주축을 이룬 페네르바흐체는 오스만 제국 타도에 앞장서면서 갈라타사라이는 자금면에서 몰락하고 페네르바흐체가 탄력을 받게 되었다. 그 뒤로 둘은 만나기만 하면 아주 난장판으로 경기를 벌였다. 1952년 이스탄불 리그가 창단되면서 두 팀이 베쉭타쉬와 같이 리그 우승을 독점했고 다시 튀르키예 전역으로 리그가 재편된 튀르키예 쉬페르리그 이후로 1959년 쉬페르리그 초대우승을 거쳐 현재까지 페네르바흐체는 리그 19회 우승을 거두고 있다.

갈라타사라이가 서포터 수가 더 많고 클럽 국제대회(UEFA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점을 내세우는 데 비해, 페네르바흐체도 인기면에서 뒤쳐지지 않는데다가 갈라타사라이와의 팀간 상대전적에서 앞서기 때문에 서로가 튀르키예 쉬페르리그 1인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2000년대 와서도 한때 자금난에 시달려 선수들에게 돈도 지급하지 못하던 갈라타사라이와 달리, 화려한 자본력을 가지고 있으며 경기장인 쉬크뤼 사라졸루 스타디움은 UEFA에게 4성 경기장으로 인정받아 UEFA컵 결승을 비롯한 국제대회를 치르기도 했다. 클럽 국제대회 성적은 1963-64 시즌 위너스컵(유로파리그)에서 거둔 8강이 첫 토너먼트 진출. 하지만, 라이벌 갈라타사라이가 먼저 1962-63 시즌 유러피언컵(챔피언스 리그) 8강을 거뒀던 것이 있었으며 이후로 페네르바흐체는 40년이 넘도록 클럽 국제대회 토너먼트를 넘지못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갈라타사라이와 베식타스가 80년대 유러피언컵 4강 및 8강을 거두고 2000년대 초반에 와서 각자 유로파리그 우승 및 8강을 거둘때까지 페네르바흐체는 토너먼트를 넘어서지 못해 갈라타사라이와 베식타스 서포터들에게 놀림받곤 했다. 그나마 4인자인 트라브존스포르도 토너먼트를 넘어선 적이 없긴 하지만 이걸로 위안을 받지 못한다.

이런 서러움을 떨친게 김연경 선수와의 일화로 국내에도 어느정도 알려진 아지즈 이을드름(Aziz Yıldırım, 1952년생)이 구단주가 되면서였다. 재벌인 그의 막대한 투자로 2007-08 시즌에는 호베르투 카를로스를 비롯한 유명선수들을 영입한 끝에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인터 밀란, CSKA 모스크바, PSV 아인트호벤과 같은 조를 이뤄 조 2위로 16강에 처음 올랐다. 그리고 16강전에선 전번 UEFA컵 우승팀인 세비야 FC를 만나 1승 1패 끝에 승부차기로 이기며 챔피언스리그 개편 사상 첫 8강 진출을 이뤘다. 8강전에서는 첼시 FC에게 덜미를 잡혀 탈락했지만 뒤쳐지지 않은 선전이었다.

==2010년대 ==
2009-10 시즌에서 리그 마지막 경기(34라운드)에서 웃지 못할 사연을 만들었는데, 이 당시 페네르바체는 승점 73점으로 2위 부르사스포르에 승점 1점차로 앞서있는 상태였다. 리그 마지막 경기는 페네르바체와 트라브존스포르, 그리고 부르사스포르와 베식타스의 경기였는데, 페네르바체가 트라브존스포르와 후반전 1-1로 비기고 있던 와중에 장내 아나운서가 환희에 찬 목소리로 관중들에게 외쳤다. 부르사스포르가 2-0으로 이기고 있다가 베식타스에게 연거푸 실점하며 2-2 동점이 되었다는 것. 경기장에 환호성이 울려퍼졌고, 선수들도 이 소식을 듣자마자 굳히기에 들어갔다. 결국 경기는 1-1로 끝났고, 기쁨에 찬 선수들과 관중들이 그라운드에 어우러져 우승 세리머니를 펼치고 있던 와중에 급보가 날아들었다. 이유인 즉, 장내 아나운서가 사실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고, 주위에서 들은 얘기를 토대로 부르사스포르의 경기결과를 2-2로 알린 것이 화근이었다.

사실 장내 아나운서가 부르사스포르의 소식을 들었던 때에 부르사스포르가 베식타스에게 실점을 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것은 2-1이 되는 만회골이었고, 경기는 그대로 2-1 부르사스포르의 승리로 끝이 났던 것. 결국 부르사스포르가 승점 3점을 획득하며 종합 승점 75점으로, 페네르바체를 2위(74점)로 끌어내리고 역전 우승한 것이다. 결국 쉬크리 사라조을루 스타디움에서 우승의 환희에 빠져있던 관중들과 선수들은 각자 지인들에게 핸드폰으로 연락해서 사실을 확인해보는 진풍경을 연출하였고, 이내 허탈감과 분노에 빠진 관중들의 폭동으로 경기장과 카드쾨이 지구는 불바다로 변해버렸다. 오보를 저지른 장내 아나운서가 이을드름 단장에게 폭행을 당하고[2], 이것도 모자라서 팬들에게 한동안 살해 위협을 받았던 건 덤이다. 이 모든 해프닝들은 1984년 이후, 26년만의 비(非) 이스탄불 연고 클럽의 우승이자, 튀르키예 쉬페르리그 창설 이후, 52년간 4강갈라타사라이, 페네르바흐체, 베식타스 JK, 트라브존스포르)의 우승독점체제를 종결시킨 부르사스포르의 우승과 결부되어 지금도 페네르바흐체의 흑역사로 언급되고 있다.

2010-11 시즌에는 리그 우승을 위하여 승부조작을 저지른 게 드러나면서 회장인 아지즈 이을드름이 구속되었으며 최대 93년 징역형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한다. 튀르키예 축구거물에서 꽤 부유층인 아지즈 이을드름 회장[3]이 이렇게 승부조작을 저지른 것이 공교롭게도 2009-10 시즌 리그 우승 좌절 때문이 컸는데 페네르바흐체가 마지막 리그 경기 34차전을 비기면서[4] 부르사스포르가 역사상 처음으로 리그 우승(승점 2점차)을 거뒀던 점 때문에 입지가 큰 타격을 받자 이런 짓을 저질렀다고 한다. 구금되었던 이을드름 회장은 페네르바체 서포터들의 극성스러운 반발과 시위로 인해 결국 2012년 7월 출소하여 지금도 왕성한 집권활동을 하고 있다. 이을드름 회장에 대한 팬들의 존경과 지지는 국부(國父) 아타투르크에 비견된다. 여담으로 승부조작 사태가 있었지만 알레스(1977)은 득점왕을 차지한다.

2011-12 시즌에 리그 우승은 실패하였으나, 튀르키예 쿠파스에서 29년 만에 우승하였다.

2012-13 시즌에 유로파리그 8강전 SS 라치오1승 1무로 팀 역사상 처음이자 튀르키예 구단으로선 14년 만에 유로파리그 4강에 진출하였다.

2013-14 시즌에 UEFA로부터 승부조작 혐의를 의심받아 올시즌 챔피언스리그 진출권과 함께 향후 3년간 유럽대항전 진출권을 8월 말에 열린 스포츠중재재판소(CAS) 최종 판결 결과로 인해 2013-14 시즌 UEFA 클럽대항전에 출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리그 우승에도 불구하고 유럽축구연맹(UEFA)의 징계로 인해, 다음 시즌에도 유럽대항전 진출자격을 박탈당했다.

2014-15 시즌은 지난 시즌 리그 우승을 이뤄냈던 에르순 야날 감독을 전격 경질하였으며, 이스마일 카르탈 수석코치가 새 감독이 되었다. 그 와중에 아지즈 이을드름 구단주는 '지난 수 년동안 페네르바흐체에게 성공을 안겨다 준 감독은 단 한 명도 없었다.'라고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기도 하였다.

2015년 4월 4일 리제스포르 원정 경기에서 5-1 승리를 거두고 공항으로 향하던 구단 버스에 총격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운전 기사가 부상을 입었고 이후 튀르키예 리그 및 컵대회 경기가 일주일 동안 중단된 바 있다.

이미 저 위에 이스마일 카르탈 임명사건[5] 부터 시작해서 아지즈 이을드름 구단주의 경솔한 언행, 독단적 행정에 지친 서포터들이 아지즈 이을드름 구단주의 사퇴를 외치기도 했지만, 아지즈 이을드름은 차기 구단주 선거에 출마하여 6,500표 중 5,000표 이상을 득표하며 보란 듯이 재선에 성공하였다. [6] 여기서 힘을 얻은 아지즈 이을드름 구단주는 감독 자리에 이웃나라 그리스 올림피아코스의 감독 비토르 페레이라를 데려와서 감독 자리에 앉혔다.

2015-16 시즌에는 재선에 성공한 아지즈 이을드름 구단주는 지울리아노 테레아노(Giuliano Terraneo)를 스포츠 디렉터로 영입하고 본격적으로 선수영입에 나선다. 먼저 시몬 키예르를 이적료 765만 유로에 영입했고, 부르사스포르로부터 2014-15 시즌 튀르키예 쉬페르 리그 득점왕 페르난당(Fernandão)과 셰네르 외즈바이락르(Şener Özbayraklı)를 데려왔으며, 브라질 상파울루 FC의 수비형 미드필더 조세프 데 소우자(Josef de Souza)를 이적료 800만 유로에 영입해왔다. 또한 FC 포르투의 골키퍼 파비아누(Fabiano)와 센터백 압둘라예 바(Abdoulaye Ba)를 임대영입한 것도 모자라다고 느꼈는지, 월드클래스 급 플레이어를 데려오겠다고 천명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빈 반 페르시나니를 영입한다. 그야말로 '분노의 영입' 스킬을 시전한 셈인데, 이 선수들을 영입하기 위해 이적료로 약 3,300만 유로를 지출했다. 여기에 부르사스포르의 주축 선수들인 오잔 투판(Ozan Tufan)과 볼칸 셴(Volkan Şen)까지 영입하면서 이적료로 약 4,300만 유로 가까이 지출했다.

하지만 그렇게 선수영입을 하고도 유로파리그에서도 신통치 않았고, 준우승만 2번 기록했다.

2018-19 시즌에 리그와 유럽대항전에서 부진하자 37대 회장 선거에서 결국 이을드름은 재선에 실패하고 또다른 대재벌 알리 코치가 회장에 새롭게 취임했다. 이에 속이 상한 건지 이을드름은 3년 뒤인 2021년 6월에 알리 코치가 나보다 나은 게 뭐냐고 방송에 나와 징징거리는 말을 하기도 했다.

3. 2020년대

그 후, 2시즌(2019-20, 2020-21)에도 부진하게 되기도 했다.

2021-22 시즌은 김민재를 영입하면서 페네르바흐체에 대한 인지도를 높여준 시즌이라고 볼 수 있다. 크게 활약을 했으나, 트라브존스포르가 38년만에 리그 우승하면서 아쉬운 시즌이라 볼 수 있다.

튀르키쉬 쿠파스에선 16강전에서 카이세리스포르에게 0-1로 져서 탈락해 무관에 그치게 되었다.

HJK 헬싱키와의 유로파리그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5:2로 대승을 거두면서 1, 2차전 합계 6:2의 스코어를 기록하면서 유로파리그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조별리그에서 올림피아코스에게 2패를 당하고 1승 3무 2패로 3위를 기록하며 컨퍼런스리그 진출하여 16강 플레이오프에서 슬라비아 프라하를 만나게 되었으나 총 점수는 6-4로 진다.

2022-23 시즌에 전 리그 준우승을 하며 UEFA 챔피언스 리그 2차 예선에 진출했다. 상대는 우크라이나의 FC 디나모 키이우. 1차전에서는 0-0으로 비겼다. 2차전에는 1:2로 지면서 예선 탈락했는데 팬들이 우크라이나에게는 철천지 원수인 블라디미르 푸틴을 연호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사실, 튀르키예는 이번 전쟁에서 우크라이나를 편들고 있고 튀르키예가 자랑하는 바이락타르 무인기는 러시아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겨주며 아예 제조 공장을 우크라이나에 짓기로 할 정도이다. 이건 특정구단이 벌이는 짓이기에 이에 UEFA는 8월 6일(이하 한국시간) 페네르바흐체에 5만유로(약 6650만원)의 벌금과 UEFA 주관 대회 홈 경기 관중석 부분 폐쇄 징계를 부과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페네르바흐체는 1차례 UEFA 클럽 대항전 홈경기에서 최소 5,000석 이상 관중석을 비워두고 경기를 치러야 한다.

그렇게 2022-23 UEFA 유로파 리그/조별리그로 내려갔으나, 조 추첨 결과 또다시 디나모 키이우, 그리고 스타드 렌 FC, AEK 라르나카와 한 조에 편성되었다. 덕분에 1차전 홈경기는 또 디나모 키이우랑 맞붙게 되었고 5000석이 넘는 관중석을 비워야 했다. 그래도, 2-1로 이겼으며 라르나카를 2-0, 2-1로 다 이기며 원정에서 2-2로 비긴 스타드 렌과 똑같은 3승 1무로 1위이며 남은 2경기랑 상관없이 16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키이우는 승점 0이고 라르나카는 3점이라 2경기를 다 이겨봐야 10점인 페네르바흐체랑 렌을 넘을 수 없기 때문. 6차전인 키이우 원정도 2-0으로 이기며 라르나카와 비긴 스타드 렌을 제치고 조리그 1위를 확정지었다. 16강에서 세비야를 만나 1차전에서 2:0 패배하고 2차전에서는 1:0으로 승리했지만 도합 2:1로 16강에서 탈락한다.

리그에서 10점 차로 2위를 했다. 튀르키예 컵에서는 이스탄불 바샥셰히르를 2:0으로 제압하고 우승을 차지했다.

2023-24 시즌에 여름 이적시장이 열리자마자 윌프레드 자하의 이적설이 있었으나 결국 7월 말, 라이벌팀 갈라타사라이에 빼앗겼다. 원더키드 아르다 귈러가 2천만 유로 이적료로 레알 마드리드에 이적하였으며, 김민재의 수비 메이트였던 헝가리 왼발 수비수 어틸러 설러이도 결국 1천2백만 유로에 호펜하임으로 이적하며 오랫동안 뛰었던 팀을 떠나게 되었다. 인테르에서 에딘 제코가 자유계약으로 이적하였다. 등번호는 9번, 이적하자마자 주장으로 임명 받았다. 아약스의 10번 두샨 타디치도 자유이적하며 아르다 귈러의 이적으로 비었던 10번이 다시 채워지게 되었다.

지난 시즌 준우승을 하며 UEFA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 2차 예선에 진출했다. 상대는 몰도바의 FC 짐브루 키시너우. 1차전에서는 5-0으로 승리했다. 2차전에서도 4-0으로 승리했다. 3차 예선 상대는 슬로베니아의 NK 마리보르. 1차전에서는 3-1로 승리했다. 2차전에서도 3-0으로 승리하며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다. 플레이오프 상대는 네덜란드의 FC 트벤터. 1차전에서는 5-1로 승리했다. 2차전에서도 1:0으로 승리했다. 조별리그에서 1위를 차지하여 16강에 올라갔다. 벨기에의 위니옹 생질루아즈 전에서 총 3:1로 8강으로 진출했다. 8강 올림피아코스 전에서 총 3:3으로 승부차기 끝에 탈락했다.

리그에서 또 라이벌 갈라타사라이에게 밀려 2위가 확정되었다. 컵대회는 8강에서 앙카라귀취에게 0-3으로 패하며 탈락.

===# 2024-25 시즌 #===
파일:페네르바흐체 SK 로고.svg
친선경기
2024년 7월 19일 금요일 02:30(KST)
쉬크뤼 사라졸루 스타디움 (튀르키예, 이스탄불)
주심: 볼칸 바야르슬란
관중: 40,000명
파일:페네르바흐체 SK 로고.svg
5 : 1
페네르바흐체 헐 시티
- 파일:득점 아이콘.svg -
매치 리포트 | 경기 하이라이트

주제 무리뉴 감독을 2년 계약으로 선임하였다. 이후 2024-25 UEFA 챔피언스 리그 2차 예선을 통과하여 3차 예선에 진출했다.

리그 개막전에서, 홈으로 아다나 데미르스포르를 불러 에딘 제코의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하였다. 시종일관 몰아부친 것과는 달리 1골밖에 넣지 못하였다.

3차 상대 프랑스의 릴에게 1, 2차전 합산 3:2로 패배하여 탈락하고, 유로파리그 리그 페이즈에 진출했다.

리그 2차전, 괴즈테페와의 경기에서 전반전에 에딘 제코의 페널티 골과 엔 네시리의 골로 2:0으로 앞서나가면서, 쉽게 경기를 이기는 듯 하였으나, 후반 괴즈테페에게 한 골 허용한 이후에, 경기 종료 직전에 골을 허용해 2:2로 비겼다. 이즈미르 원정경기라 쉽진 않았어도, 향후 승점 레이스에서 좋지 않은 상황이 될 수 있다. 해당 경기에서 페네르바체 회장인 알리 코치가 하프 타임 때, 해당 경기에 제 시간에 입장하지 못한 페네르바체 팬들을 지원하기 위해 스탠드로 나섰다가 괴즈테페 홈 팬들에게 물병 세례를 맞고, 누군가에게 밀려 넘어지기도 하는 소동이 있었다.

리그 3차전, 리제스포르와의 원정경기에서, 4-2-3-1 전술로 나왔다. 프레드의 해트트릭과 에딘 제코의 3경기 연속골, 상대 수비의 자책골 등으로 5:0으로 시원하게 경기에서 승리하면서 리그 선두로 올라섰다.

유로 24에서 좋은 활약을 보였던 페르디 카디오을루를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으로 이적시켰다. 스쿼드 보강을 위해, 알 아흘리에서 알랑 생맥시앵을 임대로 데려왔으며, 찰라르 쇠윈쥐를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임대 후 완전 영입하였다. 세비야에서 유세프 엔네시리를 영입하였다. 추가로 피오렌티나에서 소피앙 암라바트도 임대 영입하였다.

유로파리그 조별페이스에서 2포트에 배정받았으며 추첨결과, 1포트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홈), 슬라비아 프라하(원정), 2포트에서 올림피크 리옹(홈), 알크마르(원정), 3포트에서 로얄 위니옹 생질루아즈(홈), 미트윌란(원정) 4포트에서 아틀레틱 클루브(홈), 트벤터(원정)와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트와의 경기로 무리뉴 더비가 성사되었다.

리그 4차전, 알란야스포르를 홈으로 불러들여 경기를 가졌다. 리제스포르 경기와 같은 라인업으로 경기를 치뤘으며, 알란야스포르의 거친 경기에도 불구하고 타디치의 2골과 에딘 제코의 골로 3대0 승리를 가져왔다. 에딘 제코는 4경기 연속골, 팀은 2경기 연속 클린시트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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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562년 보스포루스 해협에서의 해상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쉴레이만 1세의 명으로 세워진 등대이다. 이 등대는 지금도 남아있으며 지금의 등대는 1857년 세워진 등대이다.[2] 아지즈 이을드름의 아들이다.[3] 건설업계의 대부호인데 이분이 회장에 오른뒤 페네르바흐체는 엄청난 자금력을 지니게 된다. 그동안 페네르바흐체도 갈라타사라이와 똑같이 재정부침이 컸는데 이을드름 회장 취임뒤 매출과 수입이 개선되면서 현재의 위치에 오르게된다. 가장 대표적인걸로 쉬크뤼 사라츠오울루구장인데 이 구장도 원래는 종합경기장이었다가 차츰차츰 개조를 해서 현재의 5성전용구장이 탄생한거다.[4] 그런데 당시 페네르바흐체 측 중계 아나운서가 부르사스포르가 마지막 경기를 비겼다고 잘못 보도하면서 1점차로 페네르바흐체가 이긴줄알고 페네르바흐체 선수들과 관중이 환호하다가 몇 분 안가 부르사스포르가 이겨서 우승 좌절했다는 게 알려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 아나운서는 살해협박까지 받으며 엄청나게 욕먹었다고 한다.[5] 이것이 아지즈 이을드름 구단주가 비판받고 있는 가장 큰 이유다.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을 감독 자리에 앉혀놓고 시즌 내내 우승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으며, 급기야는 '구단의 성공은 이스마일 카르탈 감독에게, 실패는 나에게' 라고 슬로건까지 내걸며 잘못되더라도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말하던 사람이 바로 아지즈 이을드름이었다. 그런데 막상 팀이 이번 시즌 2위에 머물게 되자 이스마일 카르탈 감독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감독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고, 아지즈 이을드름 구단주는 정작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 일종의 촌극이 빚어진 것이다. 결국 3년 뒤 회장 선거에선 이을드름은 압도적으로 밀려 재선에 실패했고 무난히 당선되리라 믿던 이을드름은 분노해 몇년이 지나도 알리 코치를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이을드름의 비난이 무색하게 알리 코치는 회장에 재선되었다.[6] 2000년대에 페네르바체의 중흥기의 일등공신은 누가 뭐라 해도 아지즈 이을드름 구단주이며, 상대 출마자들의 공약이 워낙 현실성이 떨어지는 내용(멀쩡히 있는 쉬크뤼 사라조을루 경기장을 버리고, 주변 부지를 매입해서 그 자리에 70,000명 수용규모의 새 경기장을 짓겠다고 했다.)이다. 하지만 다시 3년 뒤에는 또다른 재벌 알리 코치가 회장 선거에서 이을드름을 제치고 당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