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프랑시스 잠 Francis Jammes | |
출생 | 1868년 12월 2일 프랑스 투르네 |
사망 | 1938년 11월 1일 (향년 69세) 프랑스 아스파랑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보르도 고등학교 |
직업 | 시인, 소설가, 극작가, 비평가 |
가족 | 아내 안 에밀리 '쥬느비에브' 마리 괴도르프[1], 아들 가브리엘 요세프 파울 잠[2], 아빠 루이스 빅터 잠[3] 엄마 슈잔느 유프로시네 안나 벨롯[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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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시 《위대한 것은 인간들의 일이니...》로 유명하며 한국에서는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나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에 언급되는 시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2. 생애
2.1. 초년기
1868년, 프랑시스 잠은 오트피레네 주의 투르네(Tournay)에서 빅토르 잠(1831-1888)과 아나 벨로(1841-1934)의 아들로 태어났다.[5]잠은 포(Pau) 고등학교를 거쳐 보르도 고등학교에서 공부했지만 성적은 변변치 않았다(mediocre). 1886년 샤를 보들레르의 작품을 만나게 되었고,[6] 1888년에 아버지 빅토르를 여읜 데 이어 이듬해인 1889년 바칼로레아에서는 프랑스어에서 0점을 받으며 낙방하고 만다.
결국 잠은 오르테즈에서 공증인의 서기 일 따위를 하면서 하루하루 벌이를 하게 되었지만, 그러면서도 자아 찾기의 일환으로 시 습작을 써서 잡지에 투고하는 일을 시작했다. 한편 어머니인 아나 벨로는 몇 차례나 자비로 잠의 습작 시집을 출판했는데, 이러한 시편이 스테판 말라르메, 앙드레 지드 같은 시인들에게 찬사를 얻고 정식 출간을 권유받았다.
2.2. 잠주의(Le Jammisme)
1895년 즈음하여 잠의 작품은 마침내 파리의 문단에서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1896년에는 지드와 함께 알제리로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말라르메, 앙리 드 레니에[7] 등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그러나 일부 상징주의자들의 눈에 들기만 했을 뿐, 잠은 여전히 폭 넓은 성공을 이루지 못하고 서기 투잡을 뛰어야 하는 당시의 처지에 만족하지 못했다. 물론 파리의 문단에 끼지도 못하는 무명 시인들에 비해서는 대단한 업적이었지만 말이다. 또한 일각에서는 잠을 자연주의의 선구자로 보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정작 잠 본인은 자연주의와 어느 정도 선을 그으려 했다.
이에 따라 1897년, 잠은 풍자적인 문학적 강령(매니페스토)으로서 잠주의(Jammisme)를 주창하고, 문예평론지인 〈메르퀴르 드 프랑스(Mercure de France)〉지에 이를 투고한다.[8] 해당 선언문의 골자는 ‘자연주의적인 태도[9]로 신을 찬미하되, 그것이 지닌 지나친 엄숙주의와 교만함은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I. – Je pense que la Vérité est la louange de Dieu; que nous devons la célébrer dans nos poèmes pour qu'ils soient purs; qu'il n'y a qu'une école: celle où, comme des enfants qui imitent aussi exactement que possible un beau modèle d'écriture, les poètes copient avec conscience un joli oiseau, une fleur ou une jeune fille aux jambes charmantes et aux seins gracieux.
첫째. 나는 신을 찬미하는 것이야말로 진리라고 생각한다. 신을 찬미하는 것만이 우리의 시를 순수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오로지 하나의 학교[10]만이 존재한다. 그 학교에서는 마치 어린아이들이 예쁜 글씨 연습지를 최대한 정확하게 따라 쓰듯이, 시인들이 아름다운 새, 꽃, 혹은 매력적인 다리와 우아한 가슴을 가진 소녀를 주의 깊게 모사하는 것이다.
원문은 《잠주의(Le Jammisme)》에서 발췌.
첫째. 나는 신을 찬미하는 것이야말로 진리라고 생각한다. 신을 찬미하는 것만이 우리의 시를 순수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오로지 하나의 학교[10]만이 존재한다. 그 학교에서는 마치 어린아이들이 예쁜 글씨 연습지를 최대한 정확하게 따라 쓰듯이, 시인들이 아름다운 새, 꽃, 혹은 매력적인 다리와 우아한 가슴을 가진 소녀를 주의 깊게 모사하는 것이다.
원문은 《잠주의(Le Jammisme)》에서 발췌.
마지막 구절(매력적인 다리와 우아한 가슴을 가진 소녀 운운)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해당 선언문은 잠의 시세계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되, 지나친 엄숙주의를 거부하기 위해 약간의 코미디적인 자학과 풍자를 포함하고 있었다. 어찌됐든 잠은 자연주의니 상징주의니 하는 문단의 기싸움에서 어느 한 쪽에 가담하거나 편드는 데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자기만의 ‘학교’를 세울 것이라고 천명했다. 나아가 ‘저마다 각각 하나씩 자기만의 학교를 세우라’고까지 했다.
같은 해 제1시집인 《새벽 기도 종부터 저녁 기도 종까지》의 작품들이 〈메르퀴르 드 프랑스〉에 실리기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동명의 상징주의 문학 레이블에서 출간되는데, 이는 프랑시스 잠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또한 폴 클로델[11]과의 교류도 이때부터 시작되는데, 폴 클로델은 이후 잠의 작품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2.3. 가톨릭으로의 신앙 회복
《잠주의》에서 ‘신을 찬양하는 것’을 그토록 강조하는 것도 그렇고, 대표작인 《기도 종⋯》이나 《열네 개의 기도》 모두가 종교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도 그렇지만, 사실 이제까지만 해도 잠은 스스로가 기독교인임을 부인하는 불신자였다. 반면에 폴 클로델은 1886년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성령의 계시를 받은’ 이래로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그가 희곡을 집필하게 된 것도 기독교의 하나님을 찬양하고자 하는 신앙심 때문이었다.잠의 작품[12]을 접한 클로델은, 기도문의 소박하면서도 경건하고 아름다운 표현을 극찬하면서도, 그래 놓고 정작 불신자를 표방하는 잠의 신앙심에 대해서는 맹공을 가했다. 클로델의 끈덕진 전도(?)가 통한 것인지, 1904년에 이르러 프랑시스 잠은 마침내 가톨릭으로 개종(또는 회귀)했다(그 이유에 대해서는 후술). 아울러 신앙을 되찾게 해 준 폴 클로델에게 대단한 감사를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이후로 잠의 시는 가톨릭 신앙에 강한 영향을 받아 더욱 검소하고 경건한 색채를 띠게 되었으며, 나아가서는 교조적으로 비치는 표현까지도 나타나게 된다.
1901년에는 《열네 개의 기도》가 출간되었으며, 이 시점에 이르자 잠은 공증인 서기 일을 그만두어도 될 만큼 시로 충분한 수입을 벌게 되었다. 그러나 1904년에 발표한 애정시[13]가 실패를 거두자, 크게 실망하여 방황하게 되는데 가톨릭으로의 회개를 결심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잠은 이때의 절망을 바탕으로 《슬픔(Tristesses)》이라는 작품군을 집필한다.
2.4. 결혼과 말년
1907년, 39세가 된 프랑시스 잠은 자신의 팬으로서 편지를 주고받던준비에브 괴도르프(Geneviève Goedorp)와 결혼해 엔주에 머물게 된다. 1910년대에 들어서 프랑시스 잠의 작품은 1900년대 초반 같은 인기를 끌지는 못하게 되었지만, 잠은 꾸준히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파리의 문인들이 보기에 잠은 ‘딱히 계파가 명확하지도 않고, 시는 좀 촌스럽고, 피레네 산골에 콕 박혀서 사는 은둔 시인’ 정도의 인식이었지만, 이 시점에 이르러서도 사실 잠은 지드를 비롯한 시인들과 교류하고 있었을뿐더러 살롱에도 드나들었다. 게다가 1917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문학 부문 그랑프리(대상)를 수상하는 영예를 얻기까지 했는데, 정작 몇 차례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가입 신청은 끝내 거절당했다.
1938년 11월 1일 사망했다. 이는 가톨릭의 모든성인대축일(만성절)이다.
3. 문학 색채
잠이 보들레르 같은 상징주의 시인이었는지, 아니면 잠주의에서 주창한 그대로 자연주의에 가까운 태도를 취했는지 무 자르듯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렵다. 분명 난해한 상징주의와는 선을 그었지만 잠은 줄곧 상징주의자들과 깊게 교류했으며, 자연주의에 가까운 문체를 띠고는 있으나 자연주의자들과는 척을 지기도 했다.잠의 초기 저작은 자연주의의 총아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했지만, 정작 제1시집인 《새벽 기도 종부터 저녁 기도 종까지》가 출간되고 나자 모리스 레블롱[14]이 쓴 기사로 공격받게 되고, 상징주의자인 지드가 프랑시스 잠을 열심히 옹호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렇듯 잠의 시는 한때 자연주의적인 색채를 띠기는 했으나 ‘계파’로서의 자연주의에 가담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폴 클로델과의 교류 이후 가톨릭 색채가 강해지면서 이러한 논쟁도 사그라들었다고 볼 수 있다.
4.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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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nne Emilie Geneviève Marie Goedor[2] Gabriel Joseph "Paul" Jammes[3] Louic victor jammes[4] Suzanne Euphrosine "Anna" Bellot[5] 해당 단락의 내용은 한국어 위키백과의 번역문을 바탕으로 다시 쓴 것입니다.[6] 공교롭게도 보들레르는 잠이 태어나기 1년 전 해인 1867년 사망했다.[7] 1864-1936. 프랑스의 고답파, 상징주의 시인으로, 말라르메 예찬론자이기도 했다.[8] 사실, 잠은 '잠주의 선언문'을 투고한 직후 그 내용이 논쟁을 일으킬 것으로 보고, 후회하며 게재를 철회하려 했다. 그러나 메르퀴르 드 프랑스지의 편집장은 해당 내용이 좋은 떡밥이 될 것으로 보고 철회 요청을 수용하지 않았다. 이후에 결국 잠은 뿔난 자연주의자들의 어그로를 잔뜩 끌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한다.[9] 이는 기존 프랑스 시학의 고답파로 대표되는 과도한 이지주의와, 당시 후기 상징주의의 지나치게 난해하고 복잡한 표현을 등지고 소박하고 자연적인 시문을 추구한다는 의미였다.[10] écoles. 여기서는 문학 사조라는 의미라고 보아도 무방하다.[11] Paul Claudel, 1868-1955. 프랑스의 극작가이자 시인, 외교관으로, 카미유 클로델의 동생.[12] 이 작품들은 이후에 출간되는 시집 《열네 개의 기도》의 일부가 된다.[13] 이 시들은 1906년에 《하늘의 공터(Clairières dans le ciel)》라는 제목의 작품집으로 모아 출간된다.[14] Maurice Le Blond, 1877-1944. 프랑스 언론인이자 자연주의 문예 운동가로, 문예지 〈Revue naturist(자연주의)〉지를 창간했다. 에밀 졸라의 사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