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2 00:19:42

프리챌

1. 개요2. 역사
2.1. 설립과 성공2.2. 유료화2.3. 솔본 인수2.4. 최후의 노력과 파산2.5. 서비스 종료
3. 의의4. 싸이월드와의 관계5. 여담

1. 개요

파일:프리챌.jpg

1999년부터 운영된 대한민국의 포털 사이트. 2000년대 초반 커뮤니티 / 클럽 서비스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으나, 후술할 성급한 유료화 조치로 인한 회원 하락으로 급격히 몰락하였다. 2013년 2월 19일, 서비스를 종료했다.

프리챌의 어원은 초창기의 회사명인 '자유와 도전'에서 딴 'Free'와 'Challenge' 의 합성어다. 도메인은 www.freechal.com이었다.

2. 역사

2.1. 설립과 성공

초고속인터넷 보급과 함께 한창 포털 열풍이 일어나던 1999년, 삼성물산에서 근무했던 전제완 씨에 의해 설립되었다.[1]

2000년대 초반 커뮤니티와 클럽 서비스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포털사이트였다. 00년대 초반의 인터넷 문화는 PC통신 시절의 채팅과 동호회 문화의 연장선이었는데, 프리챌은 클럽 서비스에 특화되어 인기를 얻었다. 채팅 서비스는 세이클럽, 버디버디, MSN메신저, 드림위즈 등 4개로 분산되어 있었지만 클럽 서비스는 프리챌이 거의 1인자라고 할 만큼 규모가 컸다. 최절정이었던 2002년에는 일일 평균 방문자 180만명에 회원수 1000만명, 커뮤니티 100만개에 달하는 거대 포털이 되었고 포털 순위 7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당시 라이벌로는 다음 카페가 있었지만, 프리챌이 제대로 뜬 뒤에는 프리챌 커뮤니티의 규모가 더 커졌으며 이 부분에서는 당시 포털 1위이던 다음을 제쳤다. 포털 페이지뷰 역시 늘어나 페이지뷰 1위였던 야후! 코리아를 위협할 정도였다. 지상파에서 골든 타임에 TV 광고(광고 1, 광고 2)로 여러차례 내보냈으며, 온게임넷 출범 이후 처음으로 열린 2000 프리챌배 온게임넷 스타리그의 후원자로 참여했다.[2]

2.2. 유료화

가입자 수가 급속도로 늘어나자 서버 관리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늘어났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02년 11월, 전재완 사장은 상술한 바와 같이 유료화 정책을 내놓게 된다. 커뮤니티에 대한 관리비조로 돈을 내라고 한 것이다.

유료화 정책은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불합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용자 전원이 아니라, 커뮤니티 운영자만 월정액 3300원을 내야 하는 유료서비스에 가입하면 되는 것이었다. 또한 유료 이용자가 되면 최대 5개의 커뮤니티를 운영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등, 혜택을 뜯어보면 꽤 괜찮은 딜이었다. 또한 당시 포털 사이트들의 기본 이메일 용량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포탈 / 메일 서비스가 선택적으로 유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리챌의 유료화 딜에서는 이 기본 메일 용량을 100배로 확장해주는 것은 물론 pop3/SMTP 서비스까지 제공해주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메일 용량과 pop3/SMTP만 놓고 보더라도 당시 메일 업계 1,2위를 다퉜던 핫메일, 다음 한메일의 월정액과 동일한 금액이거나 오히려 저렴했다. 그 외에도 캐시나 아바타 구매 등등의 소소한 우대 조건이 많았다.

다만 이 정책이 실패로 돌아간 결정적 이유는 바로 본사의 강압적인 태도. 이런 혜택을 홍보하며 가입자들을 천천히 유료화 정책에 가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매우 짧은 기간에 선택을 강제하면서 "유료화하지 않은 커뮤니티는 즉각 폐쇄시키겠다!" 라는 너무 고압적인 자세를 취한 것이 이용자들의 엄청난 반발을 샀다. 프리챌이 아니더라도 공짜로 동아리 기능을 쓸 수 있는 포털은 많았기에 프리챌의 이러한 고압적인 자세에 제대로 열이 받은 사용자들은 프리챌을 대거 탈퇴하고 다른 커뮤니티로 떠났다. 그 중에서는 프리챌과 오랫동안 라이벌 관계였던 다음 카페로 이사를 가거나, 당시만 해도 그닥 이용자가 많이 없던 싸이월드의 '클럽' 으로 이동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 싸이월드, 드림위즈, 하나포스닷컴 등 이용자 수가 그리 많지 않은 포털에서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커뮤니티 이사' 서비스를 도입하여 프리챌 커뮤니티의 기존 게시판 전체를 통째로 백업해 보전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했다.

사실 유료화 초기에는 꽤 많은 40% 이상의 커뮤니티들이 유료화에 참여하면서 어느 정도 평타는 쳤다고 할 수 있었지만, 불과 한 달 뒤 전재완 사장이 구속되면서 회사 자체가 흔들리게 된다. 이런 불안정한 회사 상황 속에서 더 많은 회원들이 프리챌을 떠났고, 결국 2003년부터 프리챌은 접속자수가 100만명 이하로 떨어지는 쇠퇴기를 맞고 말았다. 이러한 프리챌의 몰락에 가장 반사이익을 얻은 업체가 바로 싸이월드로, 이듬 해인 2003년 미니홈피 서비스와 함께 조금씩 인기를 얻기 시작해 2000년대 중후반 프리챌 가입자의 4배가 넘는 4000만명의 회원수를 거느린 SNS가 되었다. 그러나 싸이월드 역시 2010년대에 들어 모바일 서비스를 제대로 내놓지 못해 인기가 떨어지고 아이러니하게도 프리챌 출신의 전제완 사장에게 인수되었다.

다음도 프리챌 유료화 사태의 반사이익을 얻은 포털 중 하나였지만, 같은 해 온라인 우표제라는 비슷한 실수를 저질러 치명타를 입게 되었다.

2.3. 솔본 인수

2002년 12월 3일, 전제완 사장은 회사자금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 수감되었으며 이후 무죄로 석방됐다.[3] 이 회사는 2003년 솔본[4]에 인수되고 같은 해 6월 황급히 유료화 정책을 폐지했지만 이미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격이 되어 떠난 회원들을 잡을 수 없었다. 결국 2003년 하반기에 들어 싸이월드에 접속자 수를 추월당했으며, 프리챌은 군소 포털 중 하나로 전락하였다.[5]

솔본 자체도 문제가 많은 기업이었다. 솔본의 전신인 새롬기술은 벤처거품의 대명사로 알려진 기업으로, PC통신 시절 새롬 데이타맨의 인기를 시작으로 해서 다이얼패드의 무료 인터넷 전화 서비스로 돌풍을 일으켰고, 이후 상장되어 한때는 현대자동차보다 주식 시가 총액이 높을 정도였다. 그러나 다이얼패드는 수익 모델이 없었기 때문에 이후 새롬기술의 주식은 폭락했고, 주주들은 큰 손해를 보았으며, 그것 때문에 경영진과 주주사이에 엄청난 분쟁이 있었다. 새롬기술은 아예 벤처기업에서 투자회사로 회사의 성격을 바꾸고 솔본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나, 성공한 프로젝트가 별로 없었다. 항상 회사는 분쟁에 휘말렸으니, 흑자는 커녕 운영이 제대로 될 리가 없지.

그나마도 주력이었던 무가지신문 포커스뉴스메트로 한국어판에 비하면 2인자 신세였으며, 결국 스마트폰이 대중화되자 몰락했다.

2.4. 최후의 노력과 파산

이후 온라인게임과 파일공유 서비스에 손대는등 안간힘을 썼으나, 투자비만 날리고 계속 실패하였고, 2002년 이후 계속 적자만 냈다. 회사를 부활시킬 수는 없었다. 그 와중에 파일공유 서비스에서의 음란물 공유가 문제되어 2009년 손창욱 대표[6]가 음란물 배포혐의로 구속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마침내 2011년 3월 파산했다. 같은 해 11월 웹하드 업체인 아이콘큐브에 다시 인수되었다.[7][8]

이후 프리챌 웹사이트는 아이콘큐브가 운영했지만 업데이트는 2011년 3월 이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뉴스 페이지 첫 화면의 주요 뉴스에 2011년 5월 뉴스가 떠있다. 뉴스 사이트에 새 뉴스가 계속 올라오기는 하는데 이것은 자동 봇을 통해 수집하는 것이고, 수동 업데이트가 필요한 첫 화면은 업데이트가 안 되는 것으로 보인다. 뉴스 페이지는 프리챌 처음 화면의 메뉴바에서 없어져서 주소를 직접 입력해서 접속해야 했는데 이마저도 없어졌는지 처음 화면으로 돌아간다. 망했어요.

2012년 12월 기준, 다시 사이트 관리가 들어간 상태이지만 많이 허접하다. 예전의 주 무기였던 커뮤니티는 회원수 1위가 3.5만명, 2위가 7천명이라는 처참한 수준이었고, 그 1위 커뮤니티도 들어가보면 네이버 이전 공지가 떴다. 메인에 걸려있는 VOD 서비스와 온라인 보드게임 몇개로 연명하는 수준으로 보인다. VOD는 같은 계열인 파일구리에서 서비스하는걸 이름만 바꾼 듯한 느낌이 들고, 보드게임의 수준은 고스톱, 포커, 장기 등 아주 기본적인 서비스만 제공하고 있다. 이 정도면 외부의 입점은 커녕 기본적인 제작을 위한 지원도 거의 없는 수준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3년부터는 기존 프리챌 아바타를 사용 금지하고 프리챌 게임 전용 아바타만 사용하게 한다는 이해가 안가는 공지를 띄우고 있는 등 아직도 정신 못차린 느낌이 든다.(…)

2.5. 서비스 종료

2013년 1월 17일에, 2월 18일 24시 이후로 프리챌 커뮤니티와 메일, 동영상 서비스를 중단한다는 발표를 했다. 동년 2월 19일 이후로는 기존의 프리챌 서비스는 완전히 종료됐으며 기존의 프리챌 주소로 접속해도 프리챌 게임으로만 연결된다. 프리챌 게임은 파일구리와 더불어 아이콘큐브가 운영했지만 파일구리는 그대로고, 게임은 씨앤씨미디어라는 회사로 2013년 10월 1일에 이관됐다. 프리챌 게임 양도양수로 인한 공지 그런데 2014년 9월 3일에 한 번 더 (주)프리챌게임으로 이관됐다. 프리챌 게임 양도양수 공지 현재 프리챌 게임을 운영하는 회사는 게임만 운영하고, 프리챌 포털의 메일, 동영상, 커뮤니티 서비스는 운영 계획이 없다고 한다.

2018년에는 남아있던 프리챌 게임 사이트로도 접속이 되지 않는다.[9]

3. 의의

급속도로 진행된 한국의 초고속 인터넷망의 확장 속에서 '커뮤니티' 서비스를 무기로 한때 1위 포털로 자리매김했다. 개개인이 도메인을 신청하며 운영하는 페이지 중심이 아닌 기업이 서비스하는 포털에 가입하여 커뮤니티 혹은 개인 사이트를 이용하는 쪽으로 인터넷 문화를 정착시키는 데에 크게 일조했다.

프리챌의 유료화 정책과 그에 따른 몰락은 비슷한 시기에 한메일에서 추진하였던 '온라인 우표제'[10]와 더불어 성급한 유료화 정책은 망하는 지름길임을 만천하에 선포한 사례로 인식되고 있지만, 2002년 유료화 정책 이전에 이미 프리챌의 쇠락은 예견되어 있었다. 항간에 알려진 바와 같이 프리챌이 망한 이유는 유료화 정책 때문이 아니었다. 잘 나가던 프리챌이 갑자기 유료화라는 뻘짓을 했을 때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유료화 정책이 결정적 한방이라고 하기엔 이미 프리챌은 떠오르는 벤처 특유의 속성인 모럴 해저드와 관료제화라는 암초에 걸려 있었다. 결국 여느 벤처회사가 그러하듯 주먹구구식의 방만한 경영이 유료화 정책 이전에 자리잡고 있었고, 이렇게 휘청대는 갈지자 걸음 속에서 유료화라는 방아쇠를 당긴 것일 뿐이었다.

4. 싸이월드와의 관계

파일:프리챌 vs 싸이월드 방문자수.jpg
프리챌과 싸이월드의 방문자 수를 비교하는 동아일보의 그래프 자료. 2003년 초부터 싸이월드가 급격히 프리챌을 따라잡는 양상을 보인다.

두 포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2002년 말 이뤄진 프리챌 유료화의 반사이익을 제대로 맛본 업체가 바로 싸이월드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두 포털은 같은 년도에 설립되었다. 프리챌은 2000년대 초반, 싸이월드는 2000년대 중후반에 전성기를 맞는다. 두 포털 모두 한국 인터넷 문화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서비스라는 점 때문에 현재까지도 네티즌들에게 회자되곤 한다.[11]

프리챌은 2000년대 초반 커뮤니티 서비스로 엄청나게 잘나갔고 2002년 최대 회원수 1000만명까지 돌파했지만, 싸이월드는 별 다른 인기를 얻지 못한 군소 포털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2001년 가을, 싸이월드는 최후의 프로젝트로 미니홈피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러자 4개월 뒤 프리챌은 '마이홈피' 서비스를 런칭했고, 이에 싸이월드가 프리챌이 자신들의 서비스를 표절했다며 민사소송을 제기하였다. 이 때부터 라이벌 관계는 예견되었던 셈. 2002년까지만 해도 싸이월드는 별 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뭍혀있는 군소포털에 불과했지만, 2002년 말 프리챌의 유료화와 몰락으로 그 반사이익을 보게 된다. 싸이월드는 프리챌 커뮤니티에 올라온 데이터를 싸이 클럽으로 그대로 옮겨주는 이사 서비스를 개시해 상당수의 프리챌 회원들을 자신들의 서비스로 끌어들이게 된다. 이 때 내걸었던 구호가 바로 "싸이월드는 언제나 무료" 였다.

이듬 해인 2003년부터 싸이월드는 조금씩 부상하면서 프리챌의 자리를 위협하게 된다. 특히 미니홈피 서비스가 큰 각광을 받았는데, 사실 싸이월드의 메인 서비스는 프리챌과 마찬가지로 싸이 클럽이었고 미니홈피는 그저 회원들의 자기소개 용으로 만들어놓은 부가 서비스였으나 오히려 미니홈피가 싸이 클럽보다 더 큰 각광을 받게 된다. 2000년대 중반에 들어 인터넷 문화의 주류가 PC통신 시절의 채팅/동호회에서 블로그로 급격히 넘어갔는데, 싸이월드는 미니홈피 서비스로 시류를 제대로 타면서 인기를 얻게 된 것이다.

싸이월드 역시 프리챌과 마찬가지로 천문학적인 비용을 감당해야하는 숙제를 안게 됐다. 접속자수가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서버가 다운되거나 하는 에러 현상이 자주 일어났던 것. 그러자 싸이월드는 SK커뮤니케이션즈와의 합병을 택하며 그 해 8월 합병을 완료하게 된다. 이 시기 쯤 프리챌의 접속자수를 뛰어넘었고, 클럽 서비스로 당대 1인자였던 세이클럽까지 추월하게 된다. 특히 미니홈피 서비스가 각광을 받으며 점점 위치가 올라갔다. 2004년부터 싸이월드는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기 시작해, 2000년대 중후반을 주름잡은 SNS로 발돋움하게 된다.
파일:싸이월드 vs 페이스북.jpg
싸이월드와 페이스북의 방문량 비교 그래프.

아이러니하게도, 싸이월드 역시 프리챌이 걸었던 몰락의 길을 그대로 가게 된다. 2011년, 스마트폰 열풍과 함께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급부상하면서 싸이월드의 명운 역시 다했다. 이유는 당연히도 모바일 서비스의 부재였으며, 프리챌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2011년 7~8월을 기점으로 접속율 1위를 내주고 군소 포털로 위치가 떨어지게 된다. 또한 2016년, 프리챌 출신의 전제완 사장이 싸이월드를 인수하게 되며 더욱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일각에서는 프리챌의 유료화가 없었다면 싸이월드도 인기를 얻지 못했을 것이라 하지만, 위에 서술된 것처럼 프리챌이 몰락한 이유는 단순 유료화 정책 때문만은 아니었다. 유료화 정책이 아니었더라도 프리챌의 몰락은 예견되어 있었으며, 또한 인터넷 문화의 변화로 프리챌 같은 클럽/동호회 서비스는 명이 다할 운명이었다. 다만 유료화 정책 이후 싸이월드가 제공한 '이사 서비스' 같은 부가 혜택이 싸이월드의 성장에 도움을 준 것은 맞다. 프리챌의 몰락은 예견되어 있었을지 몰라도, 그 후계자 포지션을 차지한 건 싸이월드의 능력이라고 봐야 할 듯.

5. 여담



[1] 1963년 강원도 강릉시에서 출생했다.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삼성그룹 인사팀에 근무할 당시 인사정보 시스템 개발을 주관하였다. 사내 컴퓨터 동호회의 다른 회원과 함께 펴낸 컴퓨터 입문서 <PC는 내친구>가 베스트 셀러에 오르면서 주목받기도 했으며, 이를 공로로 제1회 자랑스러운 삼성인상을 수상했다. 1999년 퇴사 후 5000만원의 자금으로 (주)자유와 도전을 창립하고 훗날 이름을 프리챌로 바꿨다.[2] 라이벌이었던 다음 역시 Daum 스타리그 2007을 통해 후원하였다. 다만 처음부터 스폰서는 아니었고, 온게임넷이 스폰서를 못 구한 상황에서 다음이 직접 선수들의 오프닝 영상을 보고 만족하여 5월 셋째 주 경기에 들어갈 무렵 스폰서 계약을 체결하였다.[3] 한창 유료화 파동으로 회사가 위태롭던 시절 대표가 구속되자 프리챌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몰락하고 말았다. 전 사장 본인에게나 회사에게나 최악의 불운으로 기억됐을 듯.[4] 구 새롬기술.[5] 그럼에도 이 사이트를 그리워하는 일부 이용자들은 유료화가 폐지되자 다시 복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도 세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싸이월드로 이적한 경우가 많았다.[6] 구속 및 프리챌 퇴사 이후 미투온을 창업하였다. 창업 이후 개발, 서비스한 포커게임이 인기를 끌어 코스닥에도 상장되었다.[7] 커뮤니티 서비스 업체 '프리챌', 아이콘큐브에 매각 - 머니투데이, 2011년 11월 8일.[8] 한때 SK 계열사였다가 다시 매각되었다고 한다.[9] 현재 홈페이지는 안되지만, KISA 후이즈검색에서 조회해 보니 누가 등록하긴 했다.[10] 대량 이메일 전송에 대해서 요금을 부과하는 제도였다. 스팸 메일을 막기 위한 제도라고는 하였지만, '메일을 보내는데 돈을 내야 한다'라는 것에 대한 일반 사용자들의 거부감이 만만치 않았다. 그 일 때문에 가입할 때 다음 메일 주소는 안 받는 곳이 있었는데 우표제를 철회한 지 오래된 현재도 여전히 안 받는 곳이 있다.[11] 다만 영향력 자체로만 비교한다면 싸이월드가 압도적으로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