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25 22:09:08

프리치스 카니에프스

파일:Fricis Kaņeps.jpg
이름 볼데마르스 프리치스 카니에프스
Voldemārs Fricis Kaņeps
출생 1916년 8월 10일
러시아 제국 벤트스필스
사망 1981년 11월 30일 (향년 65세)
국적
[[라트비아|]][[틀:국기|]][[틀:국기|]]→
[[소련|]][[틀:국기|]][[틀:국기|]]
포지션 포워드
신체조건 불명
소속팀 벤트스필스 스파르스 (1932~1935)
FK 올림피야 리에파야 (1936)
RFK 리가 (1937~1940)
FK 디나모 리가 (1940)
리가스 가야스 콤비나츠 (1940)
베르코나 에크스포르츠 (1941)
RFK 리가 (1942)
국가대표 12경기 7골 (라트비아 / 1937~1940)



1. 개요2. 생애
2.1. 선수 생활2.2.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수상
4.1. 선수
4.1.1. 클럽4.1.2.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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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트비아의 전 축구 선수

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카니에프스는 1932년부터 벤트스필스 스파르스(Ventspils Spars)에서 뛰다가 1936년, 당시 라트비아 축구계의 강팀 중 하나인 FK 올림피아 리예파야(FK Olijmpia Liepāja)로 이적하게 되었다. 이는 카니에프스의 선수 생활 중 중요한 결정 중 하나가 되었다. 올림피아는 1936년 라트비아 챔피언십 우승으로 시즌을 마쳤고 카니에프스도 이 시즌에 팀 내 최다 득점자가 되었다.

올림피아에서의 한 시즌 이후 카니에프스는 리가의 RFK 리가에 합류했다. 그는 첫 해에 11골을 넣었는데 시즌 막바지의 폐렴으로 인한 결장이 아니었으면 더 많은 골을 넣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RFK 리가는 1940년 챔피언십 우승을 끝으로 해체되었고 이 4년간 카니에프스는 총 39골을 넣었다.

카니에프스는 1942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2.1.2. 국가대표

1937년부터 라트비아 대표팀에서 뛰기 시작한 카니에프스는 1938년 월드컵 지역 예선에도 참가했다.

라트비아는 카니에프스가 해트 트릭을 포함, 리투아니아와의 1차 지역 예선 2경기에서 5골을 넣어 최종 예선에 진출했다. 하지만 최종 예선에서 라트비아는 오스트리아에 1대2로 역전패해 프랑스에 갈 순 없었다. 이후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오스트리아의 자리가 비게 되었지만 라트비아의 본선 출전은 이뤄지지 않았다.

2.2.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때에 라트비아나치 독일에 점령되어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가 설치되어 있었다. 카니에프스는 몸이 좋지 않아 독일 국방군에 징집되진 않았지만 1944년부터는 소련군 전쟁 포로들의 경비일을 했다. 이로 인해 1945년, 카니에프스는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가 이오시프 스탈린이 죽고 나서야 라트비아에 돌아왔다.

그는 스타이셀레(Staicele)에 정착해서 1981년 사망할 때까지 살았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카니에프스는 기술이 뛰어나진 않았지만 많이 뛰어다니는 포워드였다.

4. 수상

4.1. 선수

4.1.1. 클럽

4.1.2. 개인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