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모토 킨이치 萩本 欽一|Kinichi Hagimoto | |
<colbgcolor=#ffffff><colcolor=#000000> 애칭 | 킨짱(欽ちゃん), 대장(大将) |
출생 | 1941년 5월 7일 ([age(1941-05-07)]세) |
도쿄도 시타야구 (現 도쿄도 다이토구)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게닌, 사회자 |
콤비 명 | 콩트 55호(コント55号) (1966년 ~ 1975년) |
동기 | 카미오카 류타로 |
아내 | 하기모토 스미코 (萩本澄子) (1976년 결혼 ~ 2020년 사별) |
자녀 | 3명 |
신체 | 164cm |
데뷔 | 1960년 |
소속사 | 아사이 기획(浅井企画) 하기모토 기획(萩本企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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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청률 100%의 사나이
일본의 MC, 코미디언.
쇼와 시대의 도쿄발 버라이어티 예능 황금기를 대표하는 코미디언 겸 MC로 일본 버라이어티 예능의 토대를 닦은 인물로 평가받는다.[1] 또한, 잠재력을 가진 신인 연예인들을 보는 눈이 상당히 뛰어나서 유명 연예인들을 많이 발굴한 사람으로도 상당히 유명하다.
2. 상세
1966년 동료 코미디언 사카가미 지로와 함께 콩트 55호라는 콤비를 결성하여 데뷔하자마자 큰 인기를 누렸다.하기모토 킨이치는 1971년부터 방영을 시작한 스타 탄생!의 초대 MC를 맡은 것을 시작으로 단독 활동을 시작했고 1975년에 콩트 55호가 사실상 해체된 후부터는 1985년 3월에 너무 일만 해서 힘들기도 하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이유로 출연하던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할 때까지 시청률 100%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가진 일본의 원조 국민 MC로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특히, 닛폰 테레비에서 1978년부터 연례 행사로 방영되고 있는 24시간 테레비의 종합 사회를 1회(1978년)부터 3회(1980년)까지 맡은 것[2]과 1979년 12월 31일부터 닛폰 테레비에서 매년 연말에 방영하고 있는 특집 프로그램 전일본가장대상(全日本仮装大賞)[3]의 메인 진행을 1회 때 부터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무척 유명하다.[4]
실제로 후지 테레비는 1984년까지 게닌 BIG 3 중 한 명으로 아카시야 산마가 아닌 하기모토 킨이치를 꼽았다.
하기모토 킨이치는 1985년 9월에 다시 연예인으로 복귀했지만 "콩트 연기의 방법론이 우리들은 익살족 흥행 이후로 에드립이 주가되는 식으로 완전히 바뀌었는데 나는 이러한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겠다."며 코미디언으로서는 사실상 은퇴를 선언하고 MC로서의 활동에 집중하였다. 그러다가 2011년 콩트 55를 같이했던 사카가미 지로가 사망한 것을 계기로 다시 코미디언으로서 무대에 복귀, 지금은 주로 극장 무대에서 콩트 코미디를 공연하고 있다.
2005년에는 사회인 야구단 이바라키 골든 골즈 (茨城ゴールデンゴールズ)를 창단하고 구단의 매니저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3. 콩트 55호
콩트 55호의 공연 영상.
1966년 하기모토 킨이치와 사카가미 지로가 결성한 오와라이 콤비. 데뷔하자마자 대중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60년대 후반 일본 TV를 휩쓸었다.
1975년 사실상 콤비가 와해된 이후 하기모토 킨이치는 예능 사회자, 사카가미 지로는 배우로서 활동하였다.
3.1. 결성
콩트 55의 데뷔 콩트 <책상>.
아사쿠사의 쇼치쿠 공연장에서 무명 개그맨으로 활동하던 하기모토 킨이치가 '책상'이라는 제목의 1인 콩트를 무대에 올리려고 준비하던 중, 아사쿠사의 스트립 쇼 극장 프랑스좌[5]에서 막간극을 공연하고 있던 개그맨 사카가미 지로가 킨이치에게 같이 무대에 서자고 연락을 해왔다. 이후 두 사람이 아이디어 회의를 한 결과 '책상' 콩트를 두 사람이 출연하는 콩트로 개작하게 되었으며 사카가미 지로가 해당 콩트에 출연하기로 결정, 두 사람의 협업이 성사되었다.
1966년 10월에 아사쿠사 쇼치쿠 공연장에서 두 사람은 처음으로 콩트 '책상'을 공연했는데, 첫 날부터 관객들의 반응이 뜨거웠고 3일째에 두 사람이 배역을 바꾸어 연기한 것도 호평을 받은 결과 공연 5일째에는 아예 쇼치쿠 극장의 고정 레퍼토리로 편성되었고 사회를 맡은 극장 지배인이 두 사람을 '콩트 55호'라는 이름의 콤비로 소개하면서 얼떨결에 콤비가 결성되었다.
3.2. 전성기
'책상' 콩트의 흥행으로 콩트 55호의 명성은 순식간에 대중들에게 퍼져나갔고, 이듬해인 1967년 2월 14일, 닛테레에서 방영하는 '니시다 사치코 쇼'에 익살꾼 역의 조연으로 출연하며 처음 TV 무대에 데뷔하였다.이후 두 사람은 계속 꾸준히 새로운 콩트를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콩트의 네타는 주로 하기모토 킨이치가 짰는데 킨이치는 무대에 오를 때 마다 사카가미 지로가 매번 다른 애드립을 치는 바람에 결국 자신도 애드립을 칠 수 밖에 만들어서 무대의 끝을 항상 애드립 싸움으로 변질시키는 것을 못마땅해 했지만 어쩄든 인기가 굉장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지로와 콤비 활동을 지속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한편, 콩트 55호는 일본 교육방송(NET TV, 현 테레비 아사히)의 프로그램 '大正テレビ寄席'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무대를 TV로 확장시켰다. 이때 두 사람은 '같은 콩트는 (TV에서는) 두 번 다시 하지 않는다'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지만 반응이 좋았던 콩트는 사카카미 지로가 '한 번만으로는 아깝다'는 의견을 내어 다음날 오전에 한 번 더 방영하기도 했다.
TV에 두 사람이 주역으로 처음 출연했을 때의 일화가 유명하다. 당시 방송국은 콩트 55호의 콩트를 생방송으로 송출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의 격렬한 동작을 카메라가 미처 따라잡지 못해 TV에 엉망으로 방영되고 말았다. 방송이 끝난 후 이를 알게된 두 사람은 자신들이 방송을 망쳤다고 생각해서 몰래 도망가려 했는데 감독 야마시타 다케시가 이런 그들을 불러내더니 "우리들의 기술이 미천하여 너희의 개그를 제대로 못 담았다. 정말로 미안하다."며 역으로 사과했다고 한다.
어쩄든 결과적으로 콩트 55호는 곧 전국적으로 유명해져서 1968년에 마에다 다케히코와 함께 후지 테레비의 공개 생방송 '정오의 골든쇼'에 출연할 수 있었고 그 결과 1968년 7월 13일부터 단독 칸무리 방송 '콩트 55호의 세계는 웃는다(コント55号の世界は笑う)'가 방영을 시작하고 1969년에는 콩트 55호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콩트 55호 우주대모험 (コント55号 宇宙大冒険)이 개봉하면서 콩트 55호의 인기는 최절정에 달했다.
이후에도 콩트 55호는 각종 버라이어티 방송의 사회자를 맡아 높은 시청률을 달성하여 개그맨이 MC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일본 대중들에게 처음 인식시킨 연예인이 되었다.[6] 그러나 한편으로는 선정적인 개그를 한다는 이유로 PTA에 의해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저질 개그맨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3.3. 해체
1969년 10월 4일부터 TBS 테레비에서 방영을 시작한 더 드리프터즈의 방송 8시다 전원집합이 큰 인기를 끌자 후지 테레비 측은 콩트 55의 세계는 웃는다를 방송시작 1년 9개월 만인 1970년 4월에 콩트 55호의 할거야 봐달라구!(コント55号のやるぞみてくれ!)로 간판을 바꿔 달았지만, 이전의 인기를 되찾지 못하며 불과 2개월 만에 아예 프로그램이 폐지되고 말았다.이후 사카가미 지로는 단독으로 배우 활동을 시작해서, TBS 계열의 연속극 '여명의 탐정'에서 주인공 형사 역을 맡았고 하기모토 킨이치는 스타 탄생!의 MC를 맡으며 사회자 커리어를 시작하였다. 다만, 두 사람은 단독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면서도 콩트 55호로서 꾸준히 여러 방송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던 1975년의 어느 날, 하기모토 킨이치는 한 택시 운전사로부터 '킨짱, 형사님을 너무 괴롭히지 말아주세요'라는 말을 듣게 된다. 킨이치는 이때 "나는 그저 개그맨이 직업인 사람으로서 아이카타(개그 파트너)인 사카가미 지로를 콩트에서 괴롭히는 연기를 한 것일 뿐인데, 대중들은 내가 진짜로 지로를 괴롭힌다고 생각하는구나."라며 충격을 받았고 대중들이 사카가미 지로를 자신의 아이카타가 아닌 한 명의 배우로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다. 이후 킨이치는 더 이상 지로와 콩트를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결국 사카가미 지로에게 콤비를 해체하자고 제안했다.
다만, 하기모토 킨이치는 "콩트 55호는 정식으로 결성된 콤비가 아니므로 해산도 없다"라고 생각하여 1975년에 콤비로서의 활동이 사실상 중단되었지만 미디어에 공식적으로 해체를 선언하지는 않았으며 이후 두 사람은 가끔씩 방송에 같이 나와서 협연하기도 했다. 2011년 사카가미 지로가 사망한 후 하기모토 킨이치는 다시 코미디언으로 복귀하여 2024년인 지금도 무대에서 콩트 코미디를 꾸준히 공연하고 있다.
4. 아내를 향한 순애보
아내 히기모토 스미코와의 러브 스토리가 상당히 유명하다.스미코는 킨이치가 아사쿠사에서 무명 개그맨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같은 극장에서 활동하던 미모의 무용수였으며 극장의 간판 스타로 유명했다고 한다. 킨이치는 자취방 벽에다 스미코의 사진을 걸어놓을 정도로 스미코를 동경했기 때문에 그녀에게 감히 말도 못 걸고 있었는데 킨이치의 개그에 대한 열정과 재능을 눈여겨 본 스미코가 킨이치에게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갔고 이에 용기를 얻은 킨이치가 스미코에게 사랑을 고백,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다. 당시 스미코는 킨이치에게 자신이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건내주며 "이것이 네게 행운의 부적으로 작용했으면 좋겠어"라고 그를 격려하거나 "앞으로는 TV의 시대가 올거야."라면서 TV가 없던 킨이치에게 선물로 TV를 사주기도 했다고 한다.
1966년 10월에 하기모토 킨이치는 개그 콤비 콩트 55호를 결성했고 이듬해인 1967년부터 TV에 출연하면서 순식간에 엄청난 인기를 끌기 시작하였다. 킨이치는 스케줄이 너무 바빠서 스미코와 연락을 하지 못했는데 오랜만에 스미코를 만나러 간 극장에서 스미코가 이미 3개월 전에 극장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충격을 받는다. 킨이치는 말도 없이 사라진 스미코의 행방을 찾아 다녔지만 결국 그녀를 단념할 수 밖에 없었고 이후 일이 안 풀리거나 피곤할때면 자신의 무명 시절에 스미코가 행운의 부적으로 삼으라고 준 목걸이를 보면서 애써 우울한 마음을 다잡으며 일에 몰두했다고 한다.
이후 1971년에 스타 탄생!의 진행자로 출연하면서 인기가 정점에 달한 하기모토 킨이치는 잠잘 시간도 없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처럼 쉬는 날이 되자 킨이치는 전에 스미코가 "남에게 웃음을 주는 코미디언은 마음이 삭막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신사같은 곳에서 가끔 기분전환을 해야해."라는 조언을 했던 것을 떠올리고 스미코와 연인이던 시절에 그녀와 같이 가곤 했던 신사를 찾아갔는데 그 곳에서 스미코와 6년만에 재회하게 된다. 하기모토 킨이치는 스미코에게 "어째서 나에게 말도 없이 나를 떠났어?"라고 물었고 스미코는 "나는 평범한 사람이고 킨이치는 스타니까 우리 둘은 사는 세계가 다르니까"라고 답했다. 그러자 킨이치는 "내가 네가 있는 세계로 갈게! 난 스미짱이 좋아. 우리 다시 만나자"라며 고백하였고 스미코는 킨이치의 진심어린 고백을 듣고 자신이 살고 있는 집 주소를 알려주게 된다. 이후 하기모토 킨이치는 스미코의 집에 찾아가서 "그 동안 스미코가 있었기에 코미디언 생활을 버틸 수 있었어. 그리고 이제 너에게 그 보답을 하고 싶어."라면서 그녀에게 정식으로 청혼하였고 스미코도 킨이치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인다. 이후 두 사람은 정식으로 동거 생활을 하기 시작했고 스미코는 킨이치의 아이를 임신했다.
콩트 55호가 해체되고 킨이치가 단독 활동을 시작할 무렵인 1976년, 파파라치는 하기모토 킨이치와 스미코가 같은 집으로 들어가는 사진을 찍어서 주간지에 제보했고 주간지는 이 사진을 그대로 잡지에 싣고 특종 기사로 내보냈다. 잡지를 본 스미코는 자신의 존재가 킨이치의 명성에 해를 입힌다고 생각해서 조용히 "아이는 내가 혼자서 키울게. 건강 조심하고 잘 지내야 돼"라는 1장의 편지를 남기며 다시 한번 킨이치를 떠났고 두번 다시 그녀를 잃을 수 없다고 생각한 하기모토 킨이치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서 "스미코와 동거하고 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녀와 정식으로 혼인 신고를 할 것입니다."라며 대중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프로포즈를 한다. 기자회견을 본 스미코가 킨이치에게 연락을 해오자 단숨에 킨이치는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그녀와 혼인 신고를 하고 싶다고 말했고 두 사람은 그렇게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 이후 스미코를 향한 하기모토 킨이치의 순애보가 일본 대중들에게 알려지면서 킨이치의 인기는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는 2024년에 <킨짱의 스미짱 ~ 하기모토 킨이치를 사랑한 여성~>이라는 제목의 특집 드라마로 방영되기도 했으며 이토 아츠시가 하기모토 킨이치 역을, 하루가 하기모토 스미코 역을 맡았다.
[1] 하기모토 킨이치는 시무라 켄, 타모리, 기타노 다케시 보다 나이도 경력도 위다.[2] 2007년에 방영된 24시간 테레비 30회 기념 특집에서는 66세의 나이에 자선 마라톤을 뛰는 노익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방영 당시 최고 시청률 42.9%, 평균 시청률 35%를 기록했다.[3] 시청자가 분장하여 공연하는 내용을 점수를 매겨 겨루는 특집 프로그램.[4] 65회 대회부터는 카토리 싱고와 공동으로 진행 중.[5] 개그맨 후카미 센자부로가 운영하던 스트립 쇼 극장. 기타노 다케시가 신인 시절에 공연한 곳으로 유명하다. 현재는 아사쿠사 동양관이라는 이름으로 라쿠고, 만자이 등의 공연을 올리며 운영 중.[6] 대한민국에서나 일본에서나 MC는 원래 희극인들이 맡는 역할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