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실업야구연맹 초대 8구단 | |||
금융조합연합회 야구단 | 조선운수 야구단 | 조흥은행 야구단 | 경성전기 야구단 |
남선전기 야구단 | 조선전업 야구단 | 삼국석탄 야구단 | 중앙실업 야구단 |
1989년 5월 대구시장기배 우승 당시 권백행 감독을 헹가래를 하고 있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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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력 야구단 | |
KEPCO Baseball Club | |
모기업 | 한국전력공사 |
창단 | 1946년([age(1946-01-01)]주년) |
등록 포기 | 2003년([age(2003-01-01)]주년) |
구단명 변천 | 남선전기 야구단 (1946~1961) 한국전력 야구단 (1962~2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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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실업야구에서 활약했던 야구단. 모기업은 한국전력공사였으며 당시 기사나 잡지 등에서는 한전 야구단이라고 불렀다. 현재는 사내 사회인 야구단만이 남아있다.남전 야구단 유니폼 |
전신은 부산광역시에 본사를 둔 남선전기에서 만든 실업 야구단인 남선전기 야구단[2]. 이때 경성전기 야구단과 전업 야구단도 함께 존재했다. 해방 후 최초의 "한성실업야구연맹" 가입 여덟 개 구단 중 세 개 구단이 바로 남선전기 야구단, 경성전기 야구단, 전업 야구단이었을 정도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실업 야구단이다.
남선전기 야구단이 4.19 혁명의 여파로 1961년 해체된 이후[3] 한국전력공사의 전신인 남선전기, 전업전기, 경성전기가 이전에 운영하던 전업 야구단, 경성전기 야구단[4], 남선전기 야구단의 3개 팀을 합쳐서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62년, 본사가 한국전력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한국전력 야구단으로 구단명이 변경되었다.
김명성, 박영길, 황성록, 강태정 등 당시 국가대표로도 참가했던 쟁쟁한 선수들이 버티고 있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 실업 야구에서 연고지가 도입되자 강원도를 광역 연고로 삼고 활동했으며 실업 야구의 맥이 끊기는 2002년 마지막 대회 종료 후 제일유리 야구단과 함께 단 두 개만 남게 되자 두 팀이 같이 실업 리그 등록을 포기하여 2003년 2월부로 공식 해체하게 된다. 이후 사내 사회인 야구단으로 남아서 활동 중이다.
“한전야구단 마지막 감독 권백행”사라지는 실업야구, 그 끝에 있는 백재우 플레잉 코치[5]
2. 역대 엠블럼
남선전기한국전력공사 (1961~1986)
한국전력공사 (1986~ )
3. 유니폼
1955년 남전 야구단 유니폼 |
1950년대 말, 대구운동장 더그아웃 앞에서 포즈를 취한 남전 야구부.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박영길 |
1968년 당시 유니폼 | 1977년 당시 유니폼 |
1979년 |
1995년 |
4. 출신 선수
- 강태정
- 김용운
- 어우홍
- 김동엽
- 박영길
- 김응용(1960 ~ 1961/남선전기 야구단 소속)
- 유백만
- 김명성
- 최동원(1982) - 아마추어가 참가하는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하기 위해서 이적했다. 소속 팀 롯데 자이언트가 프로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대회 끝나고 프로로 전향하면서 다시 롯데에 입단했다. 이는 장효조, 김재박 등도 마찬가지다.
- 임호균
- 유두열
- 이철성(1981)
- 인호봉
- 김용달
- 황태환
- 백재우 - 전주고-원광대 출신 타자로, 해태 타이거즈의 지명을 받았으나 입단하지 않고 한국전력에 입단해 상무 복무 기간을 제외하고 줄곧 팀에 몸담으면서 실업 야구의 마지막 해인 2002년까지 뛰었다.
5. 둘러보기
한국전력 스포츠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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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기장은 구덕 야구장이다.[2] 줄여서 "남전"(南電) 야구단[3] 남선전기는 동년 경성전기, 조선전업과 통폐합된다.[4] 경전(京電) 야구단. 경전 구락부라고 불렀다.[5] 백재우는 전주고 출신으로, 고향 구단 해태의 러브콜을 뿌리치고 실업 야구에 남아 실업 야구의 마지막을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