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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오후루 허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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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esen.jpg
鈕祜祿 和珅(뉴호록 화신[병음])
ᠨᡳᠣᡥᡠᡵᡠ ᡥᡝᡧᡝᠨ(Niohuru Hešen)
1750년 ~ 1799년, 향년 49세

1. 개요2. 생애
2.1. 승승장구 하던 시기2.2. 권력의 정점에 오르다2.3. 몰락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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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름은 한국식 한자어 발음으로는 '뉴호록 화신'으로 표기하며 '니오후루 허션'은 만주어 발음 표기이다. 자는 치제(致齊). 본명은 샨보오(善保), 성은 니오후루씨(鈕祜祿氏)로 만주족이며 팔기군 정홍기 이갑라 출신으로 대대로 관료를 지낸 집안이다.

2. 생애

2.1. 승승장구 하던 시기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부모를 일찍 잃어 갖은 고생을 겪었다. 화신은 머리가 영민하고 외모가 준수하며 아부를 잘했다. 특히 10세에 만주족 관리 자제들의 학습 장소인 함안궁관학에 합격했으며 만주어, 한어, 몽골어, 티베트어 등 4가지 언어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유가 경전에도 통달하여 오성흠(1729~1803), 오성란(?~1810) 등 스승들에게 총애를 받았을 정도였다. 건륭 34년(1769) 화신은 진사에 급제하지 못했지만 절세의 미남으로 건륭제의 총애를 받아 문생원의 자격으로 삼등경기도위의 작위를 물려 받았다가 건륭 37년(1772) 3등 시위/점간처(비밀첩보기관)시위가 된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건륭 40년(1775) 건청문시위, 어전시위, 정람기만주부도통, 건륭 41년(1776)에는 호부 우시랑, 임시파견 군기대신을 거쳐 호부상서, 의정대신의 자리까지 올랐다.

건륭제가 순행에 나갔을 때 일이다. 관리가 상주문을 올렸는데 어떤 지방의 부고에 비축해 놓은 전곡을 몽땅 털렸다는 얘기였다. 진노한 건륭제는 시위들에게 이런 글을 내렸다.
"호랑이와 들소가 우리에서 뛰쳐나오고 귀갑과 보옥이 궤 안에서 망가졌다면 누구의 잘못이겠느냐?"

평소에 황제를 몸으로 보위하는 일만 했던 시위들은 황제가 내린 문장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무척 당황했다. 하지만 화신은 황제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고 이렇게 대답했다.
"만세야께 아뢰옵니다. 호랑이와 들소가 우리에서 뛰쳐나오고 귀갑과 보옥이 망가졌다면 그것들을 관리하는 자는 자신의 과오를 변명할 수 없사옵니다."

건륭제가 내린 글은 원래 논어, 계씨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계강자가 전유를 정벌하려고 하자 공자는 계강자의 가신 염유와 자로가 주군을 잘못 보필한 과오가 있음을 지적한 부분이다. 송나라 때 학자 형병(932~1010)이 이 구절에 주소를 달았다. "이는 국가의 재물을 맡아서 지키는 자의 잘못을 지적한 글이다. 군주에게 부족한 점이 있으면 그를 보필하는 신하의 과오임을 비유한다." 화신은 논어 주소의 내용도 완벽하게 암기한 덕분에 건륭제의 느닷없는 질문에 정곡을 찌르는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시위들은 모두 무식한 줄만 알았던 건륭제는 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더구나 만주족 제일의 미남이라는 찬사를 듣는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또 건륭제가 맹자를 읽고 있을 때 일이다. 날이 어두워지자 주소가 잘 보이지 않았다. 건륭제는 화신에게 등불을 밝히게 했다. 화신은 그에게 어느 부분을 읽고 계시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화신은 그가 읽다만 나머지 부분을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줄줄이 암기하여 그를 기쁘게 했다.[2]

건륭 45년(1780)에 화신은 어명을 받고 운남성으로 가서 운귀총독 이시요(?~1788)의 독직 사건과 하급 관리들의 부패를 적발하여 이를 2개월 만에 말끔하게 일소하여 황제에게 더욱 신임을 받았다. 또 지방 관아의 적폐를 청산하는 시책을 올렸는데, 건륭제가 이를 칭찬하면서 화신에게 호부상서를 제수했다. 당시 호부상서는 청나라에서 국가의 재정을 총괄하는 막중한 직책이다. 이때부터 화신은 재부를 움켜쥐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화신은 무관직으로 상남기 만주 도통, 정백기 만주 도통, 상황기 만주 도통, 보군통령, 문관 직으로 내무부대신, 어전 대신, 의정 대신, 정백기 영시위 내대신, 정황기 영시위 내대신, 군기 대신, 영반 군기 대신, 협판 대학사, 문화전 대학사, 호부 상서, 이부 상서, 이번원 상서, 학직으로 전시독권관, 일강기기주관, 사고 전서관 정총재, 석경관 정총재, 국사관 정총재, 한림원 장원 학사, 재정직으로 숭문문 세무 감독, 궁중 내직으로 태의원, 어약방 사무 등 수많은 관직을 맡았고 작위는 태자태보, 백작, 공작에 이르렀다.

이때만 해도 화신은 탐관오리가 아니라, 건륭제 치세를 이끌어 나간 3대 명신으로 꼽혔다.

참고로 건륭 45년(1780), 서른한 살에 이미 권력의 정점에 있던 화신을 박지원이 열하에서 우연히 목격했다고 열하일기에 기록하였다. 박지원은 화신이 맑고 날카로우나 경망스럽고 덕이 없게 생겼다고 평했다.

2.2. 권력의 정점에 오르다

건륭제는 늙을수록 젊었을 때와 달리 신하들의 간언을 멀리하고 자신을 십전노인(十全老人)[3]이라 칭하며 자만에 빠졌다. 이를 잘 파악한 화신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건륭제에게 아부했다. 무엇보다 화신은 건륭제가 강희제옹정제보다도 더 위대한 황제라고 끊임없이 추켜세웠고, 건륭제의 생모 숭경황태후(1692~1777)가 사망하여 국상을 치를 때 화신은 여러 날 동안 침식을 끊고 어머니를 잃은 듯이 통곡하여 건륭제에게 환심을 샀다.

건륭제는 재위기간 중 여섯 차례 순행했다. 명목상으로는 할아버지를 본받아 백성의 삶을 보살피기 위하여 남방을 순행한다는 목적이었지만, 사실은 남방의 절경을 마음껏 즐기고 가는 곳마다 호화로운 연회를 베풀어 황제의 위세를 과시할 의도였기에 순행이라기보다는 여행에 가까웠다. 특히 숭경황태후가 살아있을 적에는 어머니에게 효도한다며 타이타닉급 크루즈선만 안 탔지 온갖 좋은 것은 다 때려넣은 풀패키지 효도여행 수준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순행할 때마다 막대한 자금과 인력이 필요했기에, 건륭제가 국고를 비축한 재화를 쓰면 황제가 국고를 탕진한다는 비난을 들을 수 있었고 실제로도 건륭제는 이 문제로 신하들과 갈등을 빚었다.

그래서 화신은 조정 대신들의 비난을 받지 않고 황제의 사치 욕구를 마음껏 충족시켜 줄 방법을 모색한 끝에 건륭 45년(1780)에 의죄은이라는 희한한 제도를 만들었다. 이는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잘못을 저질렀을 때 내무부에 은자를 상납하면 금액에 따라 죄를 경감해 주는 제도이다. 이것이 시행되자 부패한 관리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당시 내무부에 들어온 은자는 조정의 조세수입이 아니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황제를 위해 쓸 수 있었다. 화신의 수완에 감탄한 건륭제는 별도의 수입에 대만족했다. 하지만 부패한 관리들이 상납한 은자는 결국 백성의 고혈을 짜내 마련한 것이었다.[4] 결국 이 제도는 건륭 후반기에 이르러 청나라에 관리들의 부패가 독버섯처럼 퍼지는 원흉이 되었다.

화신에게는 풍신은덕(豐紳殷德, Fengšenyende, 1775~1810)이라는 유일한 아들이 있었다. 아들의 이름은 건륭제가 하사했다. 건륭제는 열 번째 공주이자 막내딸인 고륜화효공주(固倫和孝公主 1775~1823)를 가장 총애했다. 사실 고륜(固倫)은 청나라에서 황제의 정실부인인 황후가 낳은 공주에게, 혹은 몽골 친왕과 결혼할 공주에게 하사하는 칭호이다. 화효공주의 생모는 평범한 후궁이었고 화효공주의 남편 풍신은덕은 친왕도 아닌 평범한 귀족이었으므로 화효공주에게는 화석(和碩)이라는 칭호를 내려야 청나라 황실의 법도에 맞았다. 하지만 건륭제는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륜'이란 칭호를 하사했다.[5]

무엇보다 건륭제가 65세(건륭 40년)에 얻은 딸이라 화효공주를 매우 예뻐했다. 더구나 화효공주는 자신을 빼어 닮고 영특했을 뿐만 아니라 무예도 뛰어났다. 하루는 공주가 남장을 하고 부친과 함께 사냥을 나갔을 때 달리는 사슴을 보고는 화살 단 한 발로 명중시켰다. 건륭제는 그 모습을 보고 기뻐하며 "네가 황자였다면 짐은 너를 황태자로 책봉했을 것이다."라고 공주를 칭찬했다. 고륜화효공주는 부친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성장했다. 화효공주가 세 살일 적(건륭 42년, 1777)에 건륭제는 마음속으로 화신의 아들 풍신은덕을 배필로 결정했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딸을 화신의 집안에 시집보냄으로써 그에 대한 변함없는 총애를 보여주고 싶었다.

건륭 54년(1789) 풍신은덕과 고륜화효공주는 열다섯 살 나이에 성대한 혼인 예식을 치르고 부부가 되었다. 이로써 건륭제와 화신은 나이 차이가 39세나 되는데도 사돈 관계가 되었다. 시위에서 출발하여 조정의 중추기관을 장악하고 마침내 황제의 사돈이 된 화신은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었다. 청나라에서 그를 건들 사람은 황제뿐이었다. 황제의 총애뿐만 아니라 공주를 며느리로 둔 화신 입장에서는 더는 무서울 게 없었다.

건륭 55년(1790)에 건륭제의 80세 생일을 축하하러 열하에 간 황인점과 서호수는 귀국 후 정조에게 "황제가 어지간한 60세 장년 수준으로 정정하긴 한데 화신을 총임하여 그 권세가 지나치게 무거워 민심이 답답해하고 있다"고 전했고, 건륭 58년(1793) 청나라를 방문한 영국 사절단장 매카트니는 "많은 중국인들은 화신을 두 번째 황제라고 몰래 칭한다." 하고 토로했을 정도로 화신은 실제로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절대 권력은 반드시 부패하기 마련이다. 특히 이때부터 화신은 재물에 집착하기 시작해 매관매직, 뇌물수수, 이권개입, 금품갈취 등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을 닥치는 대로 긁어 모았다. 게다가 자신의 비리를 고발하거나 치부가 적힌 상소문은 건륭제가 못 보도록 빼돌리고 대신들을 포섭하여 자신을 탄핵하지 못하도록 술수도 썼다. 나중에는 숭문문 세무 감독 등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국가 예산을 횡령하고[6] 뇌물을 모으는 등의 엄청난 횡포를 부렸다.

또한 영국의 동인도 회사와 밀무역을 하여 엄청난 은화를 벌어들였다. 광동 지방에서 무역을 하는 서양상인들은 그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저택 앞은 언제나 화신을 배알하러 온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젊었을 적 건륭제는 부패를 엄단했지만, 나중에가면 입 안의 혀처럼 구는 화신이 부리는 전횡에 대해서는 알아도 모르는 척했다. 왜냐면 화신이 매년 건륭제한테 막대한 선물을 바쳤으며 건륭제가 원하는 일이면 모든 것을 해결해주었기 때문이었다.

2.3. 몰락

그러나 화신의 권력도 오래가지 못했다. 특히 건륭제 사후에야 신하들이 화신을 탄핵하고 비리를 고발하면서 비로소 화신의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부정축재와 비리가 낱낱이 밝혀졌다. 가경 4년(1799) 건륭제가 사망하여 비로소 가경제실권을 잡자, 가경제는 그동안 눈엣가시였던 화신을 건륭제의 장의도감(황제의 국상을 책임지는 직위)으로 두었다가 나중에는 파직시킨 뒤, 스무 가지 죄목을 들어 체포하고 그의 가산을 모두 몰수했다. 가경제는 화신이 그동안 저질러왔던 비리들과 부정축재들을 알게되어 충격을 받고는 분노하여 그를 능지처참하려 했으나 이복누이 고륜화효공주(화신의 며느리)의 간청을 받아들여 스스로 목을 매 자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결국 화신은 제 뜻과 상관없이 목을 매달아 자결했다.[7]

근데 가경제는 화신에게서 몰수한 재산을 국고로 환수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내탕금(군주의 사유재산)으로 꿀꺽 삼켰다. 이 때문에 민간에서 "화신이 무너지니 가경이 배부르다."(和珅跌倒,嘉慶吃飽) 하는 말까지 나왔다. 그래서 현대에는 화신이 실제로는 자신을 위해 부정축재를 한 것이 아니라, 건륭제의 비밀 내탕금을 자기 이름으로 관리했던 것이라고 추정할 정도다.

3. 여담

허션과 건륭제의 관계는 단순히 총애 관계를 넘어 남색 관계라는 설이 있다. 영국 사신 매카트니의 기록[8] 관련 기사 건륭제의 할아버지 강희제는 태자 윤잉의 남색설을 전해듣고 하다하다 남자까지 건드리냐며 경멸했다.

건륭제의 부마가 된 그 아들 풍신은덕은 허션이 실각할 때 파직당했으나, 백련교도의 난 진압을 계기로 복직에 성공했다. 그러나 오래 살지는 못하고 가경 15년(1810) 서른여섯 살에 질병으로 사망했다. 건륭제의 막내딸이자 풍신은덕의 아내인 고륜화효공주는 이후 십여 년을 더 살다가 도광 3년(1823)에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조선 사신들도 북경에 다녀와서 정조 임금에게 보고하길 청나라 조정에서 화신이 황제의 총애를 받아 큰 세력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보고했다.[정조실록] 이외에도 조선 사신을 접대하는 책임을 맡았는지 조선왕조실록에 여러번 등장한다.

악명이 얼마나 자자했던지 화신이 악역으로 나오는 고전소설이 청나라도 아니고 조선에서 출간되기도 했다. #

화신의 가산이 국고가 아닌 황실 자산으로 몰수되면서 화신이 살던 북경의 대저택도 황실 자산으로 귀속되었고, 건륭제의 막내아들이자 가경제의 동복 아우인 17황자 경의친왕 영린에게 하사되었다. 그러나 30여년이 지나 3대 경군왕인 혁채가 부패 혐의로 작위를 박탈[10]당해 가산 몰수 조치가 내려지면서 저택 역시 다시 황실에 귀속되었는데, 함풍제가 즉위한 후 함풍제의 아우이자 도광제의 6황자인 공친왕 혁흔이 물려받아서 이 저택은 현대에는 공왕부(恭王府)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아예 부지에 칭화대학이 들어서버린 돈왕부나 건륭제가 직접 지시하여 티베트 불교 사원이 된 옹왕부 등 여러 왕부들이 헐리거나 개조당한 것과 달리 공왕부는 북경에서 옛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왕부로 꼽히며[11] 많은 중국 드라마 세트장의 원형이 되었다. 중국 드라마를 많이 봤다면 이 곳이 처음 왔어도 낯익어보일 정도로 예전에는 공왕부에서의 직접 촬영도 흔했지만, 문화재 보존 의식 함양으로 영상물 촬영이 전보다는 드물어졌다.

젊은 강희제가 중병에 걸린 할머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목욕재계한 후 친필로 쓴 복(福)자 앞에서 3일 밤낮으로 기도하자 할머니가 쾌차하여 그 후로도 십수년을 더 장수하였는데 훗날 건륭제가 강희제의 친필 福자가 새겨진 비석을 화신에게 하사하며 화신의 인생이 활짝 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복자비[12]를 비롯해 많은 유적이 남아있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중국5A급여유경구로 지정되었다. 가보면 사진은 물론 실물 인형까지 전시되어 있는 혁흔만큼의 체감은 아니지만 화신이 남긴 흔적도 상당히 많다.

건륭제 시대를 다룬 두 사극 여의전연희공략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청년 건륭제의 여성편력을 다루는 드라마인 만큼 노년기에 그의 측근이었던 허션이 나올 리가 없는 것이다. 다만 허션이 건륭제의 눈에 들어 출세하는 계기가 되었던 논어 인용은 연희공략의 주인공 위영락이 근 20년 먼저 했다는 소소한 설정이 추가되었다. 황후에게 배우기 전까지 영락은 글을 몰랐으나, 허션이 훗날 인용한 그 구절만큼은 옆집 사는 서생이 맨날 읊던 구절이라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병음] Niǔhùlù Héshēn[2] 생원과가 이렇게 경전 암기를 평가하는 시험으로 이방원처럼 여러 사람이 이렇게 경전 암기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화신이 특별하게 보였던 것은 만주인들은 이러한 유학 소양이 없더라도 가문의 도움을 받아서 고위직에 나아갈 수 있었음에도 그가 유학적 소양을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중원 입관 이후의 청나라 황족들은 기본적으로 고급교육을 받았기에 한족 왕조 황족들 못지 않게 유학 같은 학문에서 소양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3] 열 번 원정을 나가 모두 승리한 노인이라는 뜻이다.[4] 상납한 금액에 따라 죄를 경감하기에 많이 바칠수록 죄도 경감되거나 사면받을 확률이 높아지기에, 벼슬아치들에게 사면을 받고 싶다면 앞다투어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라고 권장하는 격이다.[5] 건륭제는 화효공주가 태어나기 몇 년 전 건륭 35년(1770)에도 7번째 공주인 영귀비 위가씨(훗날의 효의순황후) 소생 화정공주(和靜公主)에게 고륜 칭호를 내린 적이 있긴 하지만, 화정공주는 건륭제의 사랑을 많이 받긴 했지만, 몽골 친왕 납왕다이제와 오래전부터 약혼한 사이였기 때문에, 남편과 격을 맞춰주기 위해 건륭제가 친왕과 같은 격의 고륜공주로 책봉해준 것이다. 그런데 화효공주는 일반 귀족과 결혼함에도 고륜공주로 책봉된 것이다.[6] 가장 악질적인 행위가 황하를 쌓는 제방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공사비를 횡령한것과 백련교도의 난을 비롯하여 반란 진압에 들어가는 군사비를 횡령한것이다. 당연히 월권 행위에다 당시의 법률로는 사형에 해당되는 범죄였다.[7] 말이 좋아서 자결이지 실상은 교수형에 처하는것이다. 사약은 안 내렸지만 실질적으로 사사의 개념에 가깝다. 사실 청나라에서는 황족이나 외척들이 죽을 죄를 지어도 직접적으로 천번씩 사시미질을 하기보다는 알아서 자결하라는 식으로 처형을 하는 일이 많았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청나라 황족이나 외척이 공식적인 처벌로 목을 내놓은 경우는 부관참시당한 도르곤을 빼면 강희제가 망나니 황태자 윤잉을 반역죄로 벌하면서도 차마 죽일 수 없어 윤잉 대신 목을 날린 황태자당의 영수 허서리 송고투, 기상정변서태후공친왕에게 털린 보정8대신 중 실세였던 이혁보국군왕 숙순 정도에 그친다.[8] 당대 관리들이 허션의 전횡을 못마땅하게 여겼기에 돌아가면 다시 볼 일이 없는 외국인 앞에서 '황제와 허션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식으로 의분을 표출했다고 본다.[정조실록] 4년 11월 4일.[10] 이후 친척인 아이신기오로 이쾅이 다시 패자, 패륵, 군왕, 친왕으로 승급하며 경친왕작을 회복하였다.[11] 공친왕 혁흔은 비록 결과적으로 실패했을지언정 망해가는 나라를 살리려 분투한 미완의 개혁가 내지는 황족 중 보기 드문 현인 정도로 평가받으며 현대 중국인들에게도 서태후와 대조되며 동정받는데다 당대에 주로 외교업무를 담당하며 19세기 외교가에서 인지도도 높았기 때문에 사망한지 몇 년 안되어 터진 의화단의 난신해혁명에서 군벌들의 난장판과 중일전쟁, 국공내전, 문화대혁명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중국사를 휩쓴 역사적 풍파 속에서도 원형이 매우 잘 보존되었다. 전제군주정을 지키고자 했던 인물이라 박살날 수도 있었는데 운이 좋았던 셈.[12] 원래 복자는 금으로 새겨져 있었으나 복을 기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만지고 가서 금박은 다 벗겨져버렸고 유리를 씌워 보존해놨지만 수많은 관광객들은 다들 유리라도 만지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