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FE4E1> 튀링겐의 방백부인 가톨릭 • 성공회 • 루터교회 성인 헝가리의 에르제베트 Magyar Erzsébet | ||
| ||
이름 | 헝가리어 | 헝가리의 에르제베트 (Magyar Erzsébet) |
크로아티아어 | 헝가리의 엘리자베타 (Elizabeta Ugarska) | |
슬로바키아어 | 헝가리의 알주베타 (Svätá Alžbeta Uhorská) | |
독일어 | 헝가리의 엘리자베트 (Elisabeth von Ungarn) | |
출생 | 1207년 7월 7일 | |
헝가리 왕국 포조니[1] | ||
사망 | 1231년 11월 17일 (향년 24세) | |
신성 로마 제국 튀링겐 방백국 마르부르크[2] | ||
배우자 | 튀링겐 방백 루트비히 4세 (1220년 결혼 / 1227년 사망) | |
자녀 | 헤르만 2세, 조피, 게르트루트 | |
아버지 | 언드라시 2세 | |
어머니 | 메란의 게르트루트 | |
형제 | 언너 마리어, 벨러 4세, 칼만, 언드라시 | |
종교 | 가톨릭 | |
세례명 | 엘리사벳 | |
성인 정보 | ||
성인명 |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Sancta Elisabeth Hungariae) | |
시성 | 1235년 5월 27일 | |
페루자, 그레고리오 9세 주례 | ||
축일 | 11월 17일 | |
상징 | 장미, 왕관, 음식 바구니 | |
수호 | 간호사, 미망인, 제빵사, 거지, 간병인 |
[clearfix]
1. 개요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티아 왕국의 공주이자 튀링겐의 방백부인이며, 기독교의 성인. 언드라시 2세와 메란의 게르트루트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벨러 4세의 여동생이다.가난한 사람과 환자들을 위한 자선에 힘쓰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이를 통해 성녀로 공경받고 있는 인물이다.
본명은 헝가리의 에르제베트지만 보통은 튀링겐의 엘리자베트라고 불린다.
2. 생애
1207년 7월 7일,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티아 왕국의 국왕이었던 언드라시 2세와 메란의 게르트루트의 차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이모였던 실롱스크 공작부인 안데흐의 헤트비히는 가톨릭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으며 시성된 가톨릭, 정교회의 성인이자 키예프 루스의 블라디미르 1세의 후손이기도 하다. 4살 때까지 포조니 성에서 살았다. 정략결혼을 위해 튀링겐 방백이었던 헤르만 1세(Hermann I. von Thüringen 1155~1217)의 맏아들 헤르만(Herman von Thüringen 1202~1216)과 약혼을 해 튀링겐으로 떠나 그곳에서 살았다. 당시 튀링겐 궁정은 화려했는데도 불구하고 에르제베트는 자주 기도를 드렸다. 1213년, 어머니 메란의 게르트루트가 헝가리인 귀족들에게 살해당했고, 1216년 12월 31일, 에르제베트의 약혼자 헤르만이 사망하는 등 시련이 계속되었다. 헤르만 1세는 자신의 차남인 루트비히(Ludwig IV. der Heilige 1200~1227)와 에르제베트는 다시 약혼시켰다. 튀링겐 궁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시기를 받았지만 약혼자였던 루트비히와 시어머니가 될 비텔스바흐의 조피아(Sophia von Wittelsbach 1170~1238)는 에르제베트를 보호했다.14세가 된 1221년 루트비히와 결혼했고, 같은 해 루트비히는 튀링겐 방백 루트비히 4세로 즉위했다. 두 사람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냈고, 에르제베트는 1남 2녀를 얻었다. 1223년 튀링겐에 도착한 프란치스코회의 영향을 받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자선과 구휼 활동에 힘썼으며, 역시 경건한 삶을 살았던 남편 루트비히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다. 문제는 이때 마르부르크의 콘라트(Konrad von Marburg 1180~1233)라는 심문관이자 사제를 만났는데 콘라트는 에르제베트의 영적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에르제베트가 과부가 된 이후 폭력을 행사하는 등 지나친 폭력과 이단 심문의 잔혹함으로 악명을 떨쳤다.[3]
남편 루트비히 4세는 1227년 제6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던 도중 이탈리아반도 오트란토에서 열병으로 사망했다. 막내딸 게르트루트가 태어나기 몇 주 전에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들은 그녀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심정이었다고 일기를 남겼으며 루트비히 4세의 유해는 1228년 에르제베트에게 반환되었다. 남편 사후 어린 아들 헤르만 2세의 섭정으로 루트비히 4세의 동생 하인리히 라스페(Heinrich Raspe 1204~1247)가 임명되었고, 에르제베트는 마르부르크로 물러났다. 친정으로부터 재혼을 권유받기도 했지만 그녀는 독신으로 살겠다며 수녀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 반환받은 막대한 결혼 지참금은 모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했다. 1231년 마르부르크에서 사망했다.
3. 사후
그녀의 맏아들 헤르만 2세는 숙부 하인리히 라스페의 영향력 하에 놓여 직접 통치도 못하고 19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사망했다. 장녀 조피는 브라반트 공작 앙리 2세/헨드릭 2세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얻었는데 하인리히 라스페가 후사 없이 사망한 후 튀링겐을 두고 친척인 베틴 가문의 마이센 변경백 하인리히 3세(Heinrich der Erlauchte 1215~1288)[4]와 17년 동안의 튀링겐 계승 전쟁을 벌인 끝에 튀링겐 일부를 받아내 아들 하인리히를 헤센의 초대 방백으로 만들었다. 즉, 에르제베트는 헤센 가문의 시조의 할머니인 셈이다. 막내딸 게르트루트는 수녀원장이 되었다.그녀가 죽은 뒤 안장된 엘리자베트 성당 근처에서 치유와 관련된 기적들이 연이어 보고되었으며 1235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로부터 시성되었다. 마르부르크의 엘리자베트 성당은 14~15세기 신성 로마 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순례지가 되었으며, 그녀의 딸 조피와 외손자 하인리히(Heinrich I. von Hessen 1244~1308)가 헤센 가문의 시조였기 때문에 독일 귀족들 사이에서도 오랫동안 명성을 얻었다. 종교 개혁 시기에 그녀의 후손인 헤센 방백 필리프가 가톨릭 순례를 끝장내기 위해 튜튼 기사단에게 에르제베트의 유해를 넘길 것을 요구하여 성찬배를 빼앗는 패륜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슈말칼덴 전쟁 이후 카를 5세에 의해 반환되었다.
1283년 헝가리 왕국 커셔의 독일인 공동체에서는 그녀를 위해 봉헌된 성 엘리자베트 대성당을 지었다. 이후 이 성당은 헝가리어로 성 에르제베트 대성당(Szent Erzsébet-székesegyház)으로 알려졌고, 오늘날에는 슬로바키아어인 성 알주베타 대성당(Dóm svätej Alžbety)으로 불린다. 동유럽에서 가장 큰 성당인 성 알주베타 대성당에는 헝가리의 독립운동가 라코치 페렌츠 2세와 그의 어머니 옐레나 즈린스카(Jelena Zrinska 1643~1703)가 안장되어있다.
4. 가족관계
4.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튀링겐 방백 헤르만 2세 (Hermann II, Landgrave of Thuringria) | 1222년 3월 28일 | 1241년 1월 3일 | 브라운슈바이크의 헬레네 |
1녀 | 브라반트 공작부인 소피아 (Sophia, Duchess of Brabant) | 1224년 3월 20일 | 1275년 5월 29일 | 브라반트 공작 헨드릭 2세 슬하 1남 1녀[5] |
2녀 | 알텐베르크의 프레몽트레 수녀원장 게르트루트 (Gertrude, Abbess of Fremontre, Altenberg) | 1227년 9월 29일 | 1997년 8월 13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