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FF200><colcolor=#fff> 헤르만 칸츨러 Hermann Kanzler | |
출생 | 1822년 3월 28일 |
바덴 대공국 바인가르텐 | |
사망 | 1888년 1월 6일 (향년 65세) |
이탈리아 왕국 로마 | |
학력 | 칼스루에 사관학교 (졸업) |
군사 경력 | |
복무 기간 | 교황군 |
1845년 ~ 1870년 | |
최종 계급 | 총사령관(Proministro delle armi) |
주요 참전 |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1860년 교황령 합병 작전 · 카스텔피다르도 전투 1867년 교황령 합병 작전 · 멘타나 전투 1870년 교황령 합병 작전 |
서훈 | 비오 9세 기사단 훈장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 기사단 훈장 양시칠리아 왕국 성 페르디난도 공로 기사단 대십자훈장 프란체스코 1세 왕립 기사단 대십자훈장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마리아 테레지아 기사단 대십자훈장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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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르만 칸츨러는 교황군의 마지막 총사령관이다. 교황군 최후의 명장이자 충신으로, 교황령의 몰락이 시작된 근대 시대에 교황군을 맡아 교황령 역사의 대미를 장식했다.2. 생애
2.1. 초기 생애
1822년 3월 28일, 독일 남부의 바덴 대공국 바인가르텐에서 세무 공무원 막스 안톤 칸츨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 온 가족이 더 큰 도시인 브루흐잘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했다. 장성한 후 바덴 대공국의 수도 칼스루에로 가서 사관학교에서 공부했고, 1840년에 졸업하여 바덴 대공국군 용기병로 중위로 복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곧 이에 염증을 느꼈다. 칸츨러는 상당히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자라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성향을 띄었는데, 당대 바덴 대공국의 군주였던 레오폴트 대공은 반가톨릭주의와 공화주의를 띌 수 밖에 없는 자유주의 사상에 관용적이었기 때문이다.[1] 관용적인 대공의 통치 아래 자유주의의 바람이 불던 바덴 대공국의 분위기를 견딜 수 없던 칸츨러는 결국 1844년에 바덴 대공국군에서 퇴역하고, 영국에 잠시 체류하다가 로마로 가서, 교황을 지키는 교황군이 되기로 마음먹었다.2.2. 교황군 복무
1845년, 로마에 도착한 칸츨러는 보병 대위로 교황군에 입대했다. 입대한 지 얼마 안되어 1848년에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참전하여 오스트리아 제국군과 교전하였다. 이때까지는 아직 계급이 그리 높지 않아 어느 전투에 참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전후 영관급으로 승진했다. 이후 연차가 쌓이며 1859년에 대령 계급에 도달하여 교황군 제1연대 연대장을 맡게 되었다.1860년에,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이 끝난 후 주세페 가리발디가 이끄는 의용군이 양시칠리아 왕국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가리발디에게 시칠리아와 남이탈리아를 양도받게 된 사르데냐 왕국은, 사르데냐 왕국과 양시칠리아 왕국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교황령이 심히 거슬렸다. 그래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재상 카밀로 카보우르는 교황령에 비이탈리아인들로 이루어진 교황군의 해산을 요구했다. 교황은 이를 거부했고, 카보우르는 이를 명분 삼아 교황령 합병을 위한 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교황령도 방어에 나섰다. 사르데냐군은 엔리코 치알디니와 만프레도 판디가 이끄는 2개 군단을 내어 9월 11일에 교황령의 마르케와 움브리아 지방으로 진입하였다. 교황군은 총사령관 크리스토프 드 라 모리시에르와 소장 조르주 드 피모당의 지휘 아래 안코나를 거점으로 방어에 나섰으면, 칸츨러도 연대를 이끌고 참전했다. 이들은 9월 18일에 안코나 남부의 카스텔피다르도 마을에서 조우하여 카스텔피다르도 전투를 치렀다. 이 전투에서 교황군은 장비도 우월하고 수도 2배 이상 많은 사르데냐군에게 패배하며 마르케와 움브리아를 빼앗겼지만, 칸츨러와 제1연대는 불리한 전황에서도 적진을 돌파해내는 용맹을 보여주어, 전후 라 모리시에르 장군의 추천으로 소장 직위에 올랐다. 또 이 시기에 로마 전통 귀족 가문인 반누텔리 가문의 라우라 디 반누텔리 결혼하였고, 1864년에 아들 루돌프가 태어났다.
1865년9월, 오랜 시간 동안 교황군의 총사령관을 맡았던 라 모리시에르 장군이 사망하자, 칸츨러는 교황군 총사령관에 올랐으며 전임 무기장관[2] 드 메르드 몬시뇰에게 장관직도 물려받아 교황군의 전권을 쥐었다. 그는 드 메르드와 라 모리시에르가 진행하고 있던 군 현대화를 물려받아 이에 매진하였다. 군 현대화 내용에 대해서는 교황군 문서 참조.
그 성과는 1867년에 확인할 수 있었다. 가리발디가 의용군 1만을 이끌고 교황령을 침공한 것이다. 칸츨러는 로마에 주둔하던 프랑스 수비대와 함께 로마 인근의 마을 멘타나에서 가리발디군을 요격했다. 양군 총 병력 수는 비슷했지만 교황군은 상당수가 거점 방어에 투입되어 있어 실제 군사 수는 가리발디가 1.5배 이상 많았다. 하지만 칸츨러는 다른 나라들보다도 선제적으로 도입된 전신과 수준 높은 암호 등으로 빠르게 가리발디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그들을 포위하여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가 바로 멘타나 전투다. 멘타나 전투 승리로 장병들과 함께 멘타나의 십자가 훈장을 수여받았다. 또 비오 9세는 칸츨러에게 고위 귀족 작위를 수여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자신이 부유하지 못해 고위 귀족이 되면 품위 유지비를 감당하지 못한다며 정중히 사양했다. 대신 승전 직후 바로 전신의 추가 도입과 육군 재편성 등 안보 강화에 나섰으며, 로마가 직접 공격받을 경우에 레오 4세가 쌓은 성벽과 산탄젤로 성의 요새화에 착수했다.
2.3. 교황령의 멸망
1870년, 보불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때무에 교황령과 이탈리아의 전쟁 시 프랑스의 개입을 보장하던 프랑스 수비대가 철수했다 이에 교황령 점령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를 간파한 칸츨러는 9월 초, 교황령 서북부에 5천에 달하는 교황군을 분산 배치했는데, 남하하는 세력이 가리발디 의용군이면 맞서 싸우되 이탈리아 왕국 정규군이면 로마로 퇴각하라고 지시했다. 이윽고 12일에 나타난 군대는 불행하게도 라파엘 카도르나가 이끄는 6만 5천 명의 이탈리아 왕국군이었다. 당초의 명령대로 교황군은 차례로 퇴각하면서 로마로 집결했다. 14일에 이탈리아군 선발대가 로마에 당도했고, 17일에 본대가 당도했다. 이탈리아 왕국 측은 교황의 신변 안전을 보장할테니 항복하라고 제안했으나, 칸츨러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로마를 방어하겠다는 답장만 보냈다. 그러자 이탈리아 왕국 측은 19일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전면 공격하겠다고 선언했다. 비오 9세는 이탈리아군의 형세를 보고 패배하였음을 직감했으나, 교황의 기백을 보이고 세계에 교황령이 평화롭게 항복한 것이 아닌 이탈리아의 탄압에 짓밟힌 것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전투에 임하라고 지시했다. 단, 큰 유혈사태는 피하기 위해 교황령 국무원장 자코모 안토넬리를 통해, 칸츨러에게 일정 수위 이상의 저항은 하지 말라고 지시하였다.20일 새벽부터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에 포격이 감행되었다.[3] 칸츨러는 콜론나 광장에 지휘부를 세우고 직접 성벽 곳곳을 다니며 전황을 살폈다. 그가 진행한 요새화 프로젝트 덕분에 성벽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으나, 끝내 포르타 피아 성문 일대의 성벽이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 틈으로 이탈리아군 최정예 베르살리에리가 진입하기 시작했다. 이를 주아브가 틀어막았는데, 베르살리에리를 상대로 2배가 넘는 전사자를 강요하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이 차츰 밀려들어오자 더 이상의 저항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교황령 수뇌부는 오전에 항복을 선언했고, 칸츨러가 이를 각 수비대에 전달했다. 그러자 교황군은 찬송가를 부르며 울다가 성 베드로 성당으로 집결하여 마지막으로 비오 9세를 알현하고 축복받은 후 무기를 내려놓고 이탈리아군에게 투항했다.[4] 당일 오후 5시 30분에 빌라 알바니에서 이탈리아군 사령관 카도르나와 교황군 사령관 칸츨러가 항복 조약에 서명하였다. 결국 칸츨러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교황군은 해산되었고 교황령은 천년 역사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교황군 장군들은 대부분 외국인들이라 군대 해산 이후 신변의 자유가 보장되었는데, 교황에 대한 충성심이 무척 강했던 칸츨러는 로마에 남았다.
2.4. 교황령 멸망 이후, 말년
교황은 현대의 바티칸 시국보다도 작은 초미니국가를 세워주겠다는 이탈리아 왕국의 협상안을 거부하고,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파문한 후 가톨릭교회에 교황이 이탈리아 왕국에게 사로잡혔다고 선언하고 칩거에 들어갔다. 이를 바티칸 유수라고 한다. 이때 교황을 지지하는 전통 로마 귀족들은 검은 귀족이라 하여, 이탈리아 왕국 국적 취득을 거부한 채 같이 칩거하였다.[5] 칸츨러는 귀족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명예직이 되어버린 교황군 총사령관 및 무기장관 직을 계속 맡고 있었고, 개인적으로도 검은 귀족 가문인 반누텔리 가문의 사위였기 때문에 이에 동참했다. 이 시기 그는 교황군 해체 이후 몇 안되게 남은 교황의 군사들인 근위대들[6]과 헌병대를 종종 감독하는 것 말고는 종종 교황을 알현하며 로마 귀족으로서 평범한 시간을 보냈다. 이 시기부터 죽을 때까지 튜튼인 및 플랑드르인 묘지라고 하는 독일계 민족 사람들의 전용 공동묘지를 관리하는 위원회에 참가하여 회장 안톤 드 발과 친교를 맺기도 했다.1878년, 그가 교황군 복무 내내 모셔온 비오 9세가 선종하였다. 그러자 이탈리아 왕국 측에서 득달같이 칸츨러에게 접근해, 연금을 줄테니 이탈리아 왕국으로 전향하라고 설득했다. 교황령의 상황이 궁핍하여 칸츨러의 살림살이는가 넉넉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를 노린 것이었다. 하지만 칸츨러는 정중하고 품위 있게 연금을 거부했다. 교황에 대한 충성심을 굽힐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이후 1887년, 레오 13세에게 고위 귀족 작위가 부담된다면 남작위 정도는 어떻냐는 제안을 받자, 이를 수락하여 1대 칸츨러 남작위에 올랐다. 그는 친척에게 쓴 편지에서, 남작위를 받은 것은 자신의 재산 문제 때문이라면서도 작위를 받은 것은 내가 교황군을 이끌고 한 일들을 교황께서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증명해주는 것이라고 기쁜 마음을 드러냈다.
남작이 된 다음 해인 1888년, 통풍으로 의심되는 증상으로 발에 통증을 호소하던 칸츨러는 1월 6일에, 가족들과 교황청에서 파견된 성직자들에 둘러싸여 거창한 종부성사를 받고 평화로운 죽음을 맞았다. 죽은 후 자신이 관리하던 튜튼인 및 플랑드르인 묘지에 묻혔다가, 로마에서 가장 격 높은 묘지 중 하나인 베라노 묘지에 칸츨러 가족묘가 지어진 후 이장되었다. 가족묘의 위치는 교황군 주아브 묘지 바로 옆으로, 죽어서도 그들과 함께하게 되었다. 묘지명에는 많은 글이 적혀 있지 않으나 라틴어로 BONVS MILES, 즉 훌륭한 군인이라는 명문만이 뚜렷히 새겨져 있다.
3. 사후
그의 아들 2대 칸츨러 남작 루돌프는 저명한 고고학자로 성장하였다. 그는 1896년 교황청 고고학위원회에 참여하여, 20세기 초까지 고대 로마 지형의 최고 권위자로 불리며 성 베드로 성당 지하 및 로마 카타콤 발굴 등에 참여하였다. 같은 검은 귀족 가문인 비텔레스치 가문의 줄리아 디 비텔레스치와 결혼하였다. 사망연도는 불명이며 후손은 없었다.현재 칸츨러 가족묘에는 헤르만 칸츨러와 그의 아내 라우라, 그들의 아들 루돌프와 그의 아내 줄리아, 1916년에 이탈리아 왕국군 소속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나갔다가 전사한 헤르만의 조카 안젤로가 합장되어 있다. 안젤로 이후 칸츨러의 혈손은 단절되었다. 그 때문에 오래동안 베라노 묘지 한켠에서 관리해 줄 후손 없이 방치되었으나, 2017년에 '1867년 수비아코 위원회'라는 조직에서, 멘타나 전투 15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가족묘를 대대적으로 청소하고 단장해주었다.
[1] 이러한 레오폴트 대공의 관용은 자유주의에 우호적이던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했으나 이 때문에 결국 3월 혁명 시 일시적으로 퇴위당한다.[2] 현대 국가의 국방장관에 상당하는 직.[3] 실제 공격 명령이 떨어진 19일에, 교황은 이탈리아군에 포격을 가하는 사람은 모조리 파문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자 카도르나는 유대인 장교를 내세워 공격을 시작하였다.[4] 이후 외국인 병사들은 프랑스 배를 통해 자국으로 송환되었고, 이탈리아인 병사들은 북부로 끌려가 가혹한 징역살이를 해야 했다.[5] 반대로 이탈리아 왕국에 복종한 귀족들은 하얀 귀족이라 불렸다.[6] 그 유명한 스위스 근위대를 비롯해 검은 귀족들로 구성된 정예병인 귀족 근위대와 평민들로 구성된 팔라티노 근위대가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