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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평가를 서술하는 문서.2. 평가
2.1. 그의 지휘/세간의 평가
그의 지휘를 최고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고 무작정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까는 사람들은 그의 상업주의나 나치전과 등을 이유로 많이 까고[1] 최고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의 다이나믹한 음향 또는 기름진 음향. 그리고 청중을 사로잡는, 현악의 마술사[2] 등과 같은 이유로 많이 추앙한다. 국내에는 극도의 카라얀까들이 만든 와전된 이야기들이 상당히 많다. 대표적인 예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나치에 어쩔 수 없이 강제로 협력한 사람인 피해자였고 푸르트벵글러가 카라얀의 앞길을 막고 디스한 것은 상업주의와 야욕에 물든 카라얀에게서 베를린필을 지키려는 목적이었다는 이중잣대식의 해석[3]이다. 푸르트벵글러는 생전 내내 이유 없이 카라얀을 싫어한 인물로서 카라얀이 피해를 많이 봤다. 이상한 점은 카라얀은 푸르트벵글러를 존경했다는 점. 심지어 푸르트벵글러는 카라얀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싫어해서 미스터K, 혹은 카씨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러한 행동에 "베를린 필을 지키려는 숭고한 행위"등을 들먹이는 것은 이지매나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카라얀의 나치당적을 언급하며 정당화하는 것 역시 물타기나 내로남불에 불과하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사후 세르주 첼리비다케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으로 선정되지 않은 이유가 카라얀의 정치질과 이간질이라는 설,[4] 베를린필 단원들이 카라얀보다 귀도 칸텔리를 원했다는 설[5] 등이 대표적이다.그렇게 카라얀-크랑크[6]로 불리는 극도의 팬들과 극도의 안티가 공존한 거장이었지만, 클래식계에서 내로라 할 만한 거장이었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하자면 음의 세공사 정도로 비유해야 맞을 것이다. 즉 카라얀은 비발디,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 바그너, 차이콥스키, 브루크너, 말러 등 대부분의 오페라와 교향곡들을 그 시대의 가장 표준적 규범에 맞춰서 연주한 지휘자였다. 그 규범을 세운 게 사실상 카라얀 자신이었으니 당연한 얘기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의 지휘에서 토스카니니풍의 과감한 시도나 푸르트벵글러의 장점이었던 "극적이고 감동적인 울림"은 없었지만, 대신 카라얀은 오케스트라에서 최상급의 아름답고 정제된 소리를 뽑아낼 줄 아는 지휘자였다. 다만 주선율 위주의 진행으로 곡의 짜임새를 왜곡하거나 금관 및 타악기의 과용으로 밸런스를 무너뜨리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물론 카라얀이 항상 이런 식의 해석만을 보여준 것은 아니며, 또 카라얀의 주된 활동 시기는 상대적으로 이러한 해석이 큰 문제가 되지 않던 시대였다는 것, 그리고 카랴얀이 한 시대를 주름잡은 지휘자가 아니었다면 굳이 이렇게까지 비판받지는 않았을 거라는 점도 감안하는 것이 공정한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카라얀이 이런저런 녹음을 많이 남기다보니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녹음도 있고 안티역시 인정할 수 밖에 없을 만큼 잘된 녹음도 있다. 웬만한 녹음은 1순위는 아니라도 해당 레퍼토리에서 명반 3~5장을 고르라하면 카라얀의 녹음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그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대중이 얼마나 카라얀을 원하는지를 보여주는 투표.
그의 명반은
1. 베토벤에서 브루크너, 브람스로 이어지는 게르만 교향곡
2. 그리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관현악
3. 베르디, 푸치니 등의 이탈리아 오페라
4. 차이스키와 시벨리우스[7][8]의 교향곡
5. 베토벤과 바그너, 슈트라우스로 이어지는 독일 오페라
이상을 우선적으로 언급할 수 있겠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 교향곡 9번(1) | 안톤 브루크너 : 교향곡 8번(1) | |
요하네스 브람스 : 교향곡 1번(1)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2) | |
주세페 베르디 : 레퀴엠(3) | 자코모 푸치니 : 나비부인(3) | |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 교향곡 6번(4) | 장 시벨리우스 : 교향곡 2번(4) | |
리하르트 바그너 : 탄호이저(5)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 살로메(5) |
카라얀은 의외로 게르만 낭만 교향곡들 중에서 슈베르트 - 멘델스존 - 슈만으로 이어지는 비오페라라인의 교향곡들과는 거리가 있는 편인데, 멘델스존 교향곡과 슈만 교향곡 전곡은 70년대에 게르만 주요 교향곡 녹음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1차례 녹음했을 뿐이다.[9] 본인이 좋아하는 곡은 몇번이고 반복해서 다시 녹음하는 카라얀의 습관을 생각할 때, 관심이 별로 없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슈베르트의 8,9번 교향곡[10], 슈만의 4번 교향곡은 그런 와중에도 아꼈고, 말러에도 그렇게 관심은 크지는 않았지만,[11] 말러 9번 교향곡을 언급할 때 카라얀의 이름이 언급되는 빈도는 매우 높은 편이다. 교향곡 9번의 경우에는 카라얀이 선호하는 곡이라 자주 연주하기도 했다. 반대로 유명한 푸치니의 라 보엠의 경우에는 파바로티, 프레니, 갸우로프를 캐스팅해서 진행한 데카 녹음이 워낙에 흡족해서 다시 녹음하지 않았다고도 하나, 출처는 명확하지 않다.
사실 카라얀의 디스코그래피 중에서 명반이라고 손꼽히는 음반들을 보면, 카라얀이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고 단 한번 녹음한 음반들도 꽤 있는가 하면 바로 위에 있는 순서에 없는 곡들도 많다. 예를 들어 홀스트의 행성의 1961년 DECCA반은 이모겐 홀스트가 수많은 음반 중 최고라고 평을 남기기도 했고, 훔퍼딩크의 헨젤과 그레텔의 경우는 카라얀이 '녹음 전에 이곡을 몰랐으나 알고 보니 좋은 곡'이라고 했을 정도로 곡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 않았고, 슈바르츠코프의 증언에 따르면 시간에 쫒겨 리허설도 다 못 마치곡 녹음한 연주이기도 하다.[12] 그럼에도 이곡은 동곡의 명반으로 손꼽히고 있다.[13]
특히 말년인 80년대에 빈필과 녹음한 곡들은 대개가 카라얀이 특히 아낀 곡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80년에 베르디 팔스타프, 81년에 푸치니 투란도트, 82년에 하이든 천지창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장미의 기사, 83년에 브람스 독일 레퀴엠, 84년에 차이콥스키 교향곡 4,5,6번, 베르디 레퀴엠,85년에 드보르자크 8,9번 교향곡, 슈만 4번 교향곡, 모차르트 대관식 미사, 86년에 모차르트 레퀴엠, 87년에 요한 슈트라우스 왈츠, 바그너 서곡집,88년에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브루크너 8번 교향곡, 89년에 베르디 가면무도회, 브루크너 7번 교향곡를 녹음했다.
바로크 녹음의 경우 특유의 기름진 해석과 구조보단 멜로디를 중시하는 스타일 상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전체적으로 현악기의 사운드는 최상급으로 평가받지만 정격적으로 해석하면서도 고전적인 녹음인지라 평론가들의 비판을 받을 때가 있다.
그의 특성은 녹음시기마다 조금씩 다른데 50년대 녹음은 가장 기름기가 덜하지만 토스카니니의 영향을 많이받은지라 흔히 토스카라얀이라고 불리기도 했다[14]. 그리고 말년인 80년대로 갈수록 좋게 말하면 디테일이 다듬어져 있고 나쁘게 말하면 기름기가 묻어 나온다.[15] 80년대에는 상기했던 대로 빈필과 녹음한 음반이 많은데, 카라얀의 말년 미학과 빈필의 궁합은 어떤 측면에서는 베를린필과의 궁합을 상회하는 면도 있어서, 좋은 시너지 효과를 보인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오히려 이 시기에 베토벤, 브람스 교향곡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관현악곡을 빈필과 녹음하지 않아서 아쉬워 하는 애호가도 있다.
그가 연주한 레퍼토리는 상당히 방대해서 그가 녹음한 음반수를 기네스북에 올려도 될 정도.[16] 최근 들어 전집 박스 세트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는데 카라얀도 예외는 아니다. 2014년에 EMI의 카라얀 전집이 나왔고 2015년까지 해서 카라얀 60, 카라얀 70, 카라얀 80과 함께 오페라 전집[17]과 데카 전집까지 해서 카라얀 전집 음반이 나와있다.[18] 이제 2017년에는 유니텔에서 녹화한 영상, 30년대~80년대 DG녹음, 데카 녹음을 모두 모은 초거대 전집까지 나왔다.
현대음악에 소홀히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카라얀의 레퍼토리가 매우 넓기 때문에 카라얀도 적지 않은 수의 현대음악을 다루었다. 리처드 오스본이 제시한 자료를 보면 카라얀이 꽤나 많은 현대음악을 다루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쇤베르크나 카를 오르프, 거슈윈의 음악도 다루었다. 사실 카라얀이 초연한 현대음악들도 꽤 많은 편이고 녹음된 것도 생각보다는 많다. 그러나 카라얀이 현대음악보다는 낭만주의 이전 음악에 주력한 것은 사실이다. 사실 이러한 경향은 대부분의 지휘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다. 불레즈 같은 일부 지휘자들이 예외적으로 현대음악을 많이 지휘하는 것일 뿐. 현대음악을 많이 지휘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아바도, 래틀 등도 전체 레퍼토리에서 볼 때 현대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이러한 양상은 동시대 음악이 잘 연주되지 않는 현대 클래식 음악계의 사정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카라얀이 작곡을 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소수지만 있는데, 특히 10살 후배인 레너드 번스타인과 비교할 때 이 특징이 많이 거론된다. 하지만 실제 작곡을 하는 지휘자, 정확히는 작곡으로도 성공한 지휘자는 많지 않으며, 지휘와 작곡은 별개의 직업으로써 두 가지를 모두 잘 하는 사람이 대단한 것이지, 작곡을 하지 않는다고 지휘자로써의 자질을 낮게 평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특히 카라얀은 번스타인과 비교하면 피아노를 치는 번스타인에 비해 하프시코드를 치면서 지휘하는 영상이 있는데 꽤 많이 남아있다. 카라얀의 이런 점을 볼때 번스타인에 전혀 뒤쳐지지 않는다.[19]
오페라 지휘에서는 극도의 먼치킨이다. 사실 카라얀 세대의 독일/오스트리아 지휘자들 대부분이 오페라 지휘자로 커리어를 쌓아왔지만, 카라얀이 다른 이들과 넘사벽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이탈리아 오페라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독일 오페라와 이탈리아 오페라에 모두 능한 지휘자가 드물 뿐만 아니라 양쪽에서 모두 거장급의 성과를 일궈낸 지휘자는 거의 없다. 독일 오페라에서도 카라얀의 해석은 출중하지만, 특히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최고의 결과물을 보였다. 특유의 완벽주의적 성격 때문에 대다수의 지휘자들이 상대적으로 연출에는 등한시하는 반면, 카라얀은 직접 연출에까지 관여했으며 섬세하고 꼼꼼한 지휘로 호평을 받았다[20]. 장대한 대편성의 오페라도 카라얀의 지휘 아래에선 실내악적인 꼼꼼함을 보여주며 집중력을 더욱 극대화했다.[21] 그리고 성악가 발굴에 일가견이 있어 지속적으로 참신한 성악가들을 발굴해냈는데, 군둘라 야노비츠, 미렐라 프레니, 캐슬린 배틀, 안나 토모와 신토우, 조수미 등등등 수많은 성악가들이 카라얀의 발탁과 전폭적인 지원으로 세계적인 거장으로 거듭났다.
음악에서 상업주의를 지향할 뿐만 아니라 간지나게 보이도록 자기연출을 하며[22] 또한 이를 사진으로 찍어 뿌리는 등 음악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자신의 이미지메이킹에 신경을 많이 썼다. 덕분에 그의 명성과 독특한 캐릭터가 결합하여 현대인들이 자주 떠올리는 지휘자의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2008년에 방영한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은 지휘자 캐릭터 강마에 역시 성격이 깐깐하고 입이 거친 점은 사실 카라얀의 캐릭터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23]
심리학자 김정운은 저서 '에디톨로지'에서 카라얀은 음악에 시각적 편집의 개념을 도입한 최초의 아티스트라 평가했다.[24] 이 점은 훗날 베를린 필의 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디지털 콘서트홀)로 이어지는 밑바탕이 되었다.
2.2. 클래식 대중화의 선각자
“아무리 음향효과가 좋은 홀이라 할지라도, 자리마다 그 조건은 달라진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2,000~3,000명 정도 들어가는 홀이라면, 좋은 음향효과를 만끽할 수 있는 자리의 수는 대략 200~300석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 경계를 넘어가면 음질은 현격하게 떨어진다. 그러나 음반은 음악을 최고의 조건에서 즐길 수 있게 해준다. 음반은 한 명 한 명 모든 청중에게 지휘자가 머릿속에 그린 바로 그 음악을 들려준다.”
― <불꽃의 지휘자 카라얀>, 455쪽
― <불꽃의 지휘자 카라얀>, 455쪽
카라얀이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1960년대부터 영상물 제작을 직접 기획할 만큼 예술과 마케팅을 이상적으로 결합하여 클래식 음악을 대중화시킨 선각자였다. 카라얀은 음반과 영상매체를 통해 대중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널리 알렸고, 사람들로 하여금 연주회장을 찾지 않더라도 위대한 음악가들의 작품을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통해 보고 들을 수 있게 만든 대표 주자였다.
1940년대 후반, 막 LP 시대가 열릴 때 카라얀은 어떤 지휘자보다 먼저 레코드음악의 무한한 가능성을 알아차렸다. 그때까지 적지 않은 지휘자가 음반 녹음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레코딩은 죽은 음악’이라며 음반 녹음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카라얀은 앞으로는 굳이 공연장에 오지 않고 집에서 편하게 음악을 즐기는 시대가 올 것임을 내다보았다.
1980년대 들어 CD라는 새로운 매체의 가능성을 먼저 알아본 사람도 카라얀이었다. 당시 클래식음악 관계자들은 차갑고 기계적인 음색의 CD가 LP를 대체할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카라얀은 CD가 등장한 이상, LP의 시대는 끝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CD 녹음에 앞장섰다.[25]
2.3. 유명인들의 평가
기자: 클렘페러는 어떻습니까?
크리스타 루트비히: 아주 냉정해요
기자: 뵘은요?
크리스타 루트비히: 지능이 뛰어나죠.
기자: 솔티는요?
크리스타 루트비히: (잠시 있다가)..... 매우 헝가리인답고요.
기자: 번스타인은요?
크리스타 루트비히: 환희, 활기가 있어요.
기자: 카라얀은요?
크리스타 루트비히: 그는 신이에요.
― 프랑스 음악, 1995년 8월
크리스타 루트비히: 아주 냉정해요
기자: 뵘은요?
크리스타 루트비히: 지능이 뛰어나죠.
기자: 솔티는요?
크리스타 루트비히: (잠시 있다가)..... 매우 헝가리인답고요.
기자: 번스타인은요?
크리스타 루트비히: 환희, 활기가 있어요.
기자: 카라얀은요?
크리스타 루트비히: 그는 신이에요.
― 프랑스 음악, 1995년 8월
"카라얀은 한 사람의 음악가이기도 하지만 한 시대 그 자체였다.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그는 이미 한 시대였다."
― 오토 쉥크
― 오토 쉥크
"어린아이와 나이 지긋한 중국의 현자, 이 두 가지 기이한 조합이 바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다."
― 미셸 글로츠
― 미셸 글로츠
"카라얀은 독특한 지휘자였다. 나는 카라얀만큼 폭넓은 레퍼토리를 가진 사람을 상상할 수 없다. 그는 거의 모든 것을 지휘했고 항상 매우 높은 수준에서 지휘했으며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음악가들의 멋진 합주를 가졌다. 누군가가 그렇게 환상적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특별하다. 여러분은 그에게서 브람스, 리차드 스트라우스, 바그너, 베르디로부터 대단한 것을 기대했지만, 그는 스트라빈스키도 아름답게 만들어냈다: 그의 봄의 제전은 믿을 수 없이 훌륭했다! 그는 오페라또한 정말 잘 했고 이것이 그가 프로듀서로서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이유이다. 나는 항상 그가 하늘을 나는 새 같다고 말한다. 그가 날 때 그는 지구상의 우리보다 훨씬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카라얀의 방식이었다. 그는 세계적인 아이디어와 가능성,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한 모든 일은 정말 국제적이고 수준 높은 것이었다."
"그는 지휘를 하는 것을 인기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유명한 직업으로 만들었다. 카라얀은 지휘자가 되는 것의 일종의 상징이었다. 그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지휘자 중 한 명이자 가장 훌륭한 지휘자였다."
― 마리스 얀손스[27]
"그는 지휘를 하는 것을 인기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유명한 직업으로 만들었다. 카라얀은 지휘자가 되는 것의 일종의 상징이었다. 그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지휘자 중 한 명이자 가장 훌륭한 지휘자였다."
― 마리스 얀손스[27]
2.4. 유명인들을 평가
[1] 예를 들어 동료 지휘자였던 첼리비다케는 그를 가리켜 "뛰어난 장사꾼이지만 음악을 듣는 귀가 없다"고 평가했다."[2] 카라얀이 확실히 현악은 잘 부리는 게 다른 지휘자 음반하고 비교했을 때 카라얀 까들도 인정할 정도라고 한다. 아무리 대편성의 교향곡이라고 할지라도 실내악적인 분위기를 나게 만드는 본좌급 지휘력을 가지고 있다.[3] 푸르트벵글러의 나치부역은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엄청난 논란이 있는 부분이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참고[4] 첼리비다케의 고집불통 독불장군 성격으로 베를린필 단원들은 일찌감치 첼리비다케를 제외했다[5] 당시 칸텔리가 떠오르는 신예로 인정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 당시 베를린필의 상임 자리에 명함을 내밀 정도는 아니었다.[6] karajan krankheit(카라얀 열병)이라는 독일어. 카라얀 신드롬이 극에 달했던 당시 만들어진 신조어[7] 작곡가 본인에게 자신의 곡을 자신이 의도한대로 연주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평을 들었다.[8] 시벨리우스의 작품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인기가 없는 편이다. 보통 영국이나 핀란드의 지휘자가 교향곡 녹음을 많이 남기는데, 시벨리우스의 작품에 애착을 가진 카라얀이 특이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9] 다만 슈만교향곡 4번은 많이 남긴편이다. 50,70,80년대에 녹음을. 60년대는 리허설을 포함한 연주 영상을 남겼다.[10] 단 슈베르트 9번 '그레이트' 교향곡에 대해서는 도무지 작품을 이해할 수 없어서 그냥 내 방식대로 지휘한다고 언급했고, 실제 60년대 토스카라얀적인 특색대로 정교하고 템포 변화 없는 빠른 연주로 일관한다.[11] 카라얀이 말러를 시작하게 된 것은 말러의 '대지의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하면서이다. 70년대 중반부터 카라얀은 말러 교향곡 4,5,6,9번을 녹음했다. 이후에는 말러에 대해 이야기하며 본인의 말러를 좋아하는 팬들에게는 미안하나 너무 힘들어서 시도하기 힘들다고 언급하기도 했다.[12] 헨젤과 그레텔은 연주금지 시절 레그와의 계약에 의해 거의 처음 녹음한 곡으로 당시 녹음곡 선정에 있어 카라얀은 발언권이 거의 없었고, 당시의 EMI도 자사가 보유하지 않은 레퍼토리를 카랴얀에게 맡겨 채우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13] 영국 그라모폰지 동곡의 Recommended Recording에 선정.[14] 푸르트뱅글러리즘의 표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푸르트벵글러는 카라얀을 싫어했지만 카라얀은 푸르트벵글러를 존경해서 몰래 공연을 관람했다고 한다.[15] 카라얀의 녹음/연주성향은 60, 70, 80년대 딱 세 종류로 나눠지는데 60년대가 패기와 박력(다이나믹), 70년대는 60년대와 80년대의 중간, 80년대는 웅장함 에서 묻어나오는 기름진 연주다. 60년대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80년대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며 대다수는 60, 70년대를 좋아하는 듯 하다. 명반시리즈(디 오리지날)에는 주로 60년대가 많다. 사실 60년대(당시 카라얀 연령 50중반~60대초반)가 카라얀의 일생에서는 전성기로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 칼 뵘은 전성기가 60년대로 알려져 있지만 남아있는 음반은 70년대 빈 필과의 녹음이 많다.[16]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보면 정말 안한 게 뭐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다. 심지어 그의 음악관 및 장점과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비발디의 사계까지 있다. 그런데 사계도 그 많은 음반 중에서 명반이라는 평론가들이 많다. 하지만 물량이 많은 만큼 일부 음반은 음악의 본질을 왜곡했다는 혹평도 있다.[17] 오페라 전집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DG, 데카, 필립스의 전집으로 구성되어있다.[18] 물론 이미 일본에서는 130여장(!)으로 1930년대 녹음부터 전집으로 내놓았다.[19] 물론 선배들인 구스타프 말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역시 당대 최고의 지휘자 겸 뛰어난 작곡가였다. 다만 슈트라우스와 달리 말러와 푸르트벵글러는 생전에는 작곡가로서는 무시받았고 지휘자로서만 추앙받았으며, 무엇보다 지휘자 말러는 지휘 음반을 남기지 않았고 작곡가 푸르트벵글러는 오늘날에도 대중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20] 라 스칼라에서 처음으로 원어 공연을 시작하기도 했다.[21] 이러한 카라얀의 진가를 느끼고 싶은 사람은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발매한 오페라 간주곡집을 꼭 들어보길 바란다.[22] 가장 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그의 '키'에 대한 연출이다. 그는 자신의 작은 키를 커버하기 위해 자신의 옆에 서 있는 가수를 약간 자신의 뒤에 배치하는 등 많은 신경을 썼다. 참고로 카라얀의 영상 감독 중 휴고 니벨링이 강판당한 이유가 이것인데 니벨링은 카라얀을 영상의 중심에 놓지 않았다.[23] 실제로 강마에 역을 연기한 김명민이 지휘 연기를 위해 카라얀의 DVD를 보며 연습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24] 카라얀이 감독한 영상은 65년도부터고 음악사 최초의 뮤직비디오인 비틀즈의 Paperback Writer는 1966년 나왔다.[25] 여기서 생겨난 작은 에피소드가 있다. 한 장의 CD에는 최대 74분 분량의 음악이 들어간다. 이 분량을 74분으로 결정한 사람이 카라얀이라는 얘기가 있다. 처음으로 CD를 상용화한 필립스와 소니 기술진은 CD 1장 분량으로 LP 음반 앞뒷면을 합한 분량과 같은 60분이 적당하다고 생각했으나, 카라얀이 “60분으로 하면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전곡을 녹음할 수 없다”며 74분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의 진위에 대해서는 사실 논란이 있다(필립스의 일부 기술진은 ‘74분’과 카라얀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 여하튼 이런 일화들이 카라얀의 양면성-뛰어난 지휘자인 동시에 탁월한 비즈니스맨-을 뒷받침해주는 것만은 분명하다.[26] Quotes 부분 참조[27] #[28] https://www.digitalconcerthall.com/ko/interview/206-2[29] 근데 이 말, 칭찬이 아니라 험악하게 생겼다고 까는 말이다(…)[30] 카라얀은 모스크바를 여행을 가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을 연주하는 므라빈스키를 보고 압도적인 음량에 압도 되었다며 이후로는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섣불리 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