舊 현대자동차써비스 배구단에 대한 내용은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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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써비스 HYUNDAI MOTOR SERVICE Co., Ltd. | |
정식 명칭 | 현대자동차써비스 주식회사 |
한자 명칭 | 現代自動車써비스 株式會社 |
영문 명칭 | HYUNDAI MOTOR SERVICE Co., Ltd. |
국가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설립 | 1974년 2월 26일 |
해산 | 1999년 4월 1일 |
업종명 | 자동차 신품 판매업 |
기업 분류 | 대기업 |
상장 여부 | 상장 폐지 |
상장 시장 | 유가증권시장 (1977년~1999년) |
주식 코드 | 009650 (보통주) 009651 / 009655 (우선주)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 86 (원효로4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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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대자동차의 舊 자동차 정비 및 자동차 판매 자회사.2. 역사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의 자동차 정비사업 경험은 1940년 서울 북아현동 일대에 세운 '아도서비스'에서 시작됐다. 초기에는 사업에 잘 됐으나 창업 25일만에 화재로 전소됐고, 오윤근으로부터 돈을 빌려 신설동에 무허가 수리공장을 차렸으나 1942년 일제의 '기업정비령'에 따라 아도서비스가 일본인 기업 일진공작소에 흡수되었다. 8.15 광복 후인 1946년 서울 용산의 적산대지를 불하받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차려 점차 성업했지만 1950년 1월 현대토건사에 합쳐져 '현대건설'이 되면서 자동차 정비 사업을 접었다. 1967년 현대자동차를 세우면서 자동차 생산 외에 수리 및 부품 공급업도 같이 맡았으며, 1968년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 서비스센터 1호점을 열었다.1974년 현대자동차에서 분리되어 독립법인 '현대자동차써비스'로 출범했다. 그런데 현대자동차 한 회사로 운영되는 게 현대그룹 차원에서도 효율적인데 정주영이 굳이 현대자동차를 현대자동차와 현대자동차써비스로 분리시킨 이유는 차남 정몽구. 현대자동차는 애당초 정몽구가 아닌 정주영의 동생이자 현대자동차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정세영과 그의 아들인 정몽규가 경영했던 회사인데다가 정세영은 1980년대 후반부터 5공 비리의 정치적 타격을 받고서 정치에 참여하느라 회장에서 물러난 형을 대신하여 현대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한 현대그룹의 실세였다. 반면 정몽구는 정세영이 현대그룹 회장에 취임할 당시에는 현대자동차의 창립 초기부터 일등공신으로 활약한 정세영에 비해 사업 경력이 한참 모자라서 현대자동차의 후계자로 등극하기에는 이르다는 인식이 많았다. 현대그룹의 창업주이자 총수인 정주영의 입장에서 본다면 장남인 정몽필이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장남의 역할을 담당하던 정몽구에게 주요 사업을 물려주는 일도 중요하지만 갖은 노력으로 현대자동차의 창립과 발전에 공헌한 정세영을 의리없이 내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후 현대자동차 창립 당시 해외에서 인력을 섭외하고 포드와의 기술 제휴를 맺는데 중요한 역할을 맡아 현대자동차 최초의 고유 모델인 포니의 개발을 주도한 정세영은 '포니 정'으로 불릴만큼 인망이 좋았다. 결국 현대자동차써비스를 정몽구에게 맡기면서 정몽구가 현대자동차를 이어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사실 현대자동차는 1990년대 후반 당시 현대그룹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던 주력 계열사여서 정주영도 양보할 수 없는 회사였는데, 여기에는 씁쓸한 뒷사정이 있다. 정주영은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자신의 평생의 한을 풀어준[1] 6남 정몽준에게[2] 그룹을 물려줄 생각을 해봤으나 정몽준 본인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정몽준에게는 정치자금 겸 현대중공업만 주었고, 정몽준이 정계에 진출한 후에는 공부를 잘 하고 책읽기를 좋아한 5남 정몽헌에게 그룹을 물려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3] 그렇다고 해서 오랫동안 장남 역할을 하며 자신을 보필해온 정몽구를 아무거나 대충 던져주고 내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름 그룹의 주력 분야인 자동차를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식으로 정몽구에게 쥐어준 것.[4] 아무리 정세영이 일등공신이어도 창업주인 정주영의 남동생인 덕분에 중책을 수행할 수 있었으니 결과적으로 정세영이 정주영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도 아니었다.
출범 이후 'HMC' 브랜드로 순정부품을 팔기 시작했고, 1977년 기업공개를 단행하고 1983년 경기도 남부 지역[5], 제주, 영남, 호남, 충청권, 강원 등지에서 자동차 판매업을 개시하며[6] 실업 남자 배구단인 현대자동차써비스 배구단을 창단했다.[7] 1991년부터는 현대정공에서 제작된 SUV '갤로퍼'의 판매를 맡기 시작했고, 1994년 현대정유의 유류 판매업도 맡고 1996년 세차기 판매업 및 현대정공의 싼타모 판매, 1998년 가스시설 시공업에도 각각 진출했다. 1998년 현대자동차가 기아를 인수하면서 정몽구와 정세영이 현대자동차를 두고 본격적으로 경쟁을 시작하는데 결국 정주영에 의해 현대자동차는 1999년 정몽구에게 넘어가고 현대자동차써비스는 현대자동차에 합병됐다. 정몽구가 현대자동차를 차지한 이상 별도 회사로 유지할 필요가 없으므로 합병한 것이다.[8]
3. 역대 임원
- 대표이사 회장
- 정몽구 (1987~1999)
- 대표이사 사장
- 정몽구 (1974~1987)
- 조양래[9] (1987~1999)
4. 관련 문헌
[1] 정주영은 지금 기준으로 초등학교 졸업 수준의 학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주영은 이 짧은 학력을 평생의 컴플렉스로 여겼다.[2] 정주영은 만나는 동료 총수마다 "우리 몽준이가 서울대에 갔소이다."라며 자랑하였다.[3] 정주영은 초졸이라는 짧은 학력이 평생의 한이어서 학구파인 정몽헌, 정몽준을 제일 예뻐한 반면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현장에서 발로 뛰는 스타일의 정몽구에게는 아주 엄했다. 그래서 정몽구는 형 정몽필이 사망하기 전까지 정주영에게 인정받지 못했으며, 직접 현장에서 실적을 보이고서야 비로소 어렵사리 정주영에게 인정받을 수 있었다. 물론 정몽구 같은 현장파도 기업 경영에 있어 아주 중요한 자세이나, 정주영은 본인이 그 현장파로서 온갖 생고생을 다 했었기에 정몽구를 볼 때마다 옛날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정몽구도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출신이었으니 학벌 자체는 높았다지만 SKY 출신인 정몽헌, 정몽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4] 물론 이는 알다시피 왕자의 난이라는 희대의 집안싸움으로 번진다.[5] 양평군, 여주시, 이천시,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 부천시, 김포시 제외[6] 경기도 북부지역, 양평군, 여주시, 이천시,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 부천시, 김포시와 인천, 서울에 있는 현대자동차 영업소들은 현대자동차에 남았다.[7] 현재의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1999년 현대자동차써비스가 현대자동차에 합병되는 과정에서 배구단 역시 같이 넘어가면서 현대자동차 배구단으로 변경됐으나 2001년 현대자동차그룹 내 개편을 통해 모기업이 현대캐피탈로 다시 한 번 변경되어 현재에 이른다.[8] 정세영은 현대산업개발을 넘겨받는다.[9] 한국앤컴퍼니 회장과 동명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