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노경(魯卿) / 오하(梧下) |
본관 | 진주 형씨[1] |
출생 | 1892년 10월 9일[2] |
전라도 남원도호부 매내면 대산리 (現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대신리 대산마을[3] 463번지) | |
사망 | 1973년 7월 10일[4] (향년 80세) |
전라북도 남원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347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2년 10월 9일 전라도 남원도호부 매내면 대산리(현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대신리 대산마을 463번지)에서 아버지 형석두(邢錫斗, 1867. 11. 24 ~ 1911. 7. 8)와 어머니 고령 신씨(1870. 9. 4 ~ 1925. 4. 28)[5]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남원군 사매면 대신리 대산마을 467번지로 이주했다.1919년 4월 4일 남원면 장날에 군중을 모아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1919년 8월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경기도 경성부에서 결성한 독립운동단체인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에 입단했다. 이때 전라북도지단(全羅北道支團)의 총무부장에 선임되어 이후 김재구(金在九)·강경진(姜景鎭) 등과 함께 남원군 지방을 중심으로 지단의 조직 확대에 힘을 쏟는 한편, 각종 선전물의 배포를 통하여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또한 음력 8월에 김재구·강경진·이범수(李範壽)·정남용(鄭南用)과 함께 경기도 경성부 황금정4정목(現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4가) 249번지에 있던 전복규(全福奎)의 집에서 전협을 만나 100원을 군자금으로 납부해 조선민족대동단 본부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런데 1919년 11월 대동단 본부가 주도한 의친왕의 상하이 망명계획이 일본 경찰에 발각됨으로써 대동단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고, 이에 대동단 전라북도지단의 실체도 자연히 발각되었다. 이에 그는 곧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1920년 9월 21일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청에서 전주지방법원으로 이송되었으며, 1922년 3월 14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출옥하였다.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이후 1973년 7월 10일 전라북도 남원군에서 사망하였다.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본래 남원시 광치동에 안장되었다가, 2011년 4월 5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1] 판사공파(判事公派)-매안(梅岸) 문중 34세손 ○수(○洙) 항렬.(족보)[2] 족보상 12월 9일.[3] 진주 형씨 집성촌으로, 독립유공자 형광욱도 이 마을 출신이다. 대산마을은 1456년(세조 2) 단종복위운동 당시 형근(邢瑾, 1418. 9. 10 ~ 1453)이 사육신과 함께 순절하자, 형근의 아들인 형계선(邢繼善, 1442. 5. 8 ~ 1516. 3. 4)이 난을 피해 본래 살던 남원도호부 주포면 영촌리(現 남원시 주생면 영천리 영촌마을)에서 이곳 대산마을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형계선의 후손들이 이 마을에 세거하게 되었다.#[4]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7월 1일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진주형씨대동보 권1 416쪽에는 1969년 9월 7일 사망한 것으로 오기되어 있다.[5] 신신구(申兟求)의 딸이다. 아버지의 족보에는 배우자가 신광영(申光永)의 딸이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외가 고령 신씨의 족보에는 아버지가 신신구의 사위로 등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의 어머니는 신신구의 딸이다.(족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