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6-04-25 09:23:02

호장



1. 개요2. 역사
2.1. 기원과 성립2.2. 고려시대2.3. 여말선초2.4. 조선시대
3. 주요 업무와 권한
3.1. 문서 및 행정 실무의 장악3.2. 국가 의례의 지방 대표3.3. 조세 횡령과 수탈의 구조적 배경
4. 연조귀감5. '토호(土豪)'로서의 순기능과 한계6. 주요 호장 목록


1. 개요

호장()은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존재했던 향리()의 수장()을 일컫는 직책이다. 명칭 자체에서 알 수 있듯 본래 각 고을 민호()의 우두머리로서 조세 징수와 역() 동원 등 향촌 통치의 핵심 실무를 담당했다. 호장은 직임에 따라 섭호장(攝戶長), 정조호장(正朝戶長), 안일호장(安逸戶長) 등으로 나뉘기도 하였다. 이 중 섭호장의 '섭(攝)'은 겸임 또는 임시(假)를 뜻하는 것으로, 고을 관아에 소속되어 호장 직무를 겸임하는 자를 가리켰다.

흔히 현대 대중매체나 사극 등에서는 사또(수령) 옆에서 굽신거리며 백성을 착취하는 비열한 '아전()'의 이미지로 묘사되곤 하지만, 이는 강력한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진 조선 후기의 단편적인 모습에 불과하다. 실제 호장의 연원은 신라 말기 지방 사회를 장악했던 호족()에서 출발하며,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각 지역을 독자적으로 지배하는 명실상부한 토착 지배층을 의미했다.[1]

국가가 직접 전국의 모든 백성을 파악하고 통제하기 어려웠던 전근대 사회에서 호장은 중앙에서 파견된 외관()의 통치를 돕는 행정의 '팔다리'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때로는 중앙 권력의 과도한 수탈이나 폭주로부터 지역민을 방어하는 '방파제' 역할을 맡기도 했다.[2]

그러나 조선 건국 이후 지속적인 중앙집권화 정책과 향리 억압 정책으로 인해 그 지위가 점차 하락하였고, 종국에는 수령의 위세에 기대어 고을의 실무를 처리하는 6방() 아전으로 변모하게 된다.

2. 역사

2.1. 기원과 성립

호장의 연원은 신라 말기 지방 사회를 장악했던 호족(豪族)에서 출발한다. 후삼국 통일 이후 고려 정부는 지방 호족들을 회유하기 위해 일부는 중앙 관원으로 편입하고, 지방에 남은 호족들에게는 각자의 할거지를 관향(貫鄕)으로 승인해주었다.

이후 성종 2년(983년)에 이르러 12목에 외관(外官)이 파견되고 주·부·군·현의 직제가 개정되면서, 이들 토착 세력도 중앙의 제도권 내로 편입되었다. 이때 본래 신라 이래로 쓰이던 당대등(堂大等)이라는 명칭이 호장으로, 대등(大等)이 부호장(副戶長)으로 개칭되었다.[3] 또한 보윤(甫尹), 군윤(軍尹) 등의 명칭도 통합되며 향리의 체계가 일원화되었다. 이로써 '호장'이라는 직책이 지방 토착 세력을 대표하는 공식적인 명칭으로 확립되었다.

이후 고려 시대 중앙 진출의 사다리이자 지방 지배층이었던 호장 가문들은 향촌 사회에서의 권위를 혈연적으로 세습하고 연대하기 위해 족보 편찬을 주도하기도 했다.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인 1476년 간행 『안동권씨세보(安東權氏世譜, 성화보)』 등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호장 계열 가문들이 자신들의 지파를 확정하고 세력을 결속하던 핵심 수단이었다.

2.2.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호장은 단순한 아전이 아니라 해당 고을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최고 권력자였다. 고려 초중기까지만 해도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수령)의 수가 매우 적었을 뿐만 아니라, 파견된 수령조차도 현지 사정에 어두워 호장 집단의 협조 없이는 고을을 다스릴 수 없었다. 당시 이들은 향리 신분으로서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 정부에 진출하면 수상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으며, 우리나라 명문거족 시조의 태반이 호장 출신이었다. 또한 우리 민족이 중국식 성씨를 널리 쓰기 시작한 것이 고려시대부터인데, 이때 호장과 부호장 등 지방 호족들도 본격적으로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호장의 막강한 위상은 국가로부터 보장받은 여러 특권에서 잘 드러난다. 1018년(현종 9년) 제정된 공복 규정에 따르면 호장은 자삼(紫衫, 보라색 예복)을 입었는데, 전근대 사회에서 자색이 중앙의 최상위 권력자들만 입을 수 있는 색이었음을 감안하면 이들의 권위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4] 또한 부호장 이상 관원의 자제들에게는 제술업이나 명경업 등 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5] 즉, 지방 토호의 자식으로 태어나 과거를 거쳐 중앙의 최고위 귀족 관료로 진출하는 신분 상승의 사다리가 제도적으로 활짝 열려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나이가 70세에 이르면 실무에서 물러나 안일호장(安逸戶長)이라는 명예직에 편제되었으며, 이들에게는 일종의 퇴직 연금 격으로 직전(職田)의 절반을 지급하며 노후를 보장했다.[6]

이러한 특권뿐만 아니라 고려의 호장들은 행정관인 동시에 지역의 방어 사령관 역할까지 겸했다. 정규군이 닿지 않는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이들은 향군(鄕軍)을 이끌고 최전선에서 싸웠다. 실제로 《고려사》에는 거란의 침입 때 통주 성벽을 사수했던 호장 김거(金巨)[7], 대몽항쟁 시기 몽골군을 대파한 온수군 호장[8], 왜구를 생포한 진주 호장 이부(李富)[9] 등 외적과 맞서 싸운 호장들의 활약상이 줄을 잇는다.

2.3. 여말선초

고려 후기 원 간섭기에 접어들며 호장들의 지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정부가 임시 세금인 과렴(科斂)을 남발하고 권세가들이 토지를 대농장으로 사유화하면서, 중간에서 조세 징수를 책임져야 했던 향리들의 부담이 극심해진 것이다.[10]

이에 경제적 기반이 든든했던 호장층은 군역이나 향역을 피하고 지배층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중앙의 관직을 얻거나(모수, 冒受) 품관(品官)으로 신분 세탁을 시도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고려 말 중앙 권력을 장악하고 조선을 건국한 신진사대부 세력은 바로 이 지방 호장 가문의 자제들이었다. 이들은 권력을 잡자마자 국가의 모든 권력과 세금을 중앙으로 집중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친척이기도 한 고향의 호장들을 철저히 탄압하기 시작했다. 향리가 받을 수 있는 관직의 품계를 제한하고, 자제들의 과거 응시를 원천 봉쇄하는 이른바 '사다리 걷어차기'에 나선 것이다.

2.4. 조선시대

조선이 건국되면서 호장의 위상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는다. 태종과 세종 대를 거치며 전국 모든 군현에 수령이 파견되었고, 호장이 사또 역할을 대신하던 임내(任內, 속현)마저 대거 혁파되었다. 가장 치명적인 조치는 1445년(세종 27년)의 전제(田制) 개편이었다. 이때 호장들이 읍사를 운영하던 재원인 공수전(公須田)과 향리 개인의 급여 성격인 인리위전(人吏位田)이 모두 혁파(몰수)되었다.[11]

독자적인 경제적 기반과 관사(읍사)를 잃은 호장들은 결국 수령이 주재하는 관아로 들어가 이방(吏房), 수형리(首刑吏) 등과 함께 6방(六房) 중 하나인 아전(衙前)으로 편입되어 생존을 모색해야 했다. 무록직(無祿職) 속관이었던 이들을 임명할 때 관아의 장은 차첩(差帖)이라는 문서를 발급하였다. 차첩에는 국왕의 결재를 받아 임명하는 구전차첩(口傳差帖)과 봉교차첩(奉敎差帖), 그리고 수령 직권으로 발급하는 관장차첩(官長差帖)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국가의 녹봉이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관아에서 내려주는 미미한 요(料)를 받거나 아예 무급으로 일해야 하는 처지였다.

아전으로 전락한 호장들은 권한은 크게 줄어들었으나 법적 책임은 오히려 막중해지는 가혹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관할 구역 내에서 살인 사건이 나거나 도둑을 잡지 못하는 치안 문제가 발생할 경우, 혹은 환곡에 포흠(횡령)이 생기는 등 재정 사고가 터지면 파견된 수령보다는 현지 실무자인 호장이 가장 먼저 의금부나 관찰사의 추국(국문)을 받고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장의 도장(인신)은 향촌 행정에서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가진 공권력의 상징이었다. 조선시대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부터 후기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호장의 인장을 위조한 자는 사면령에 관계없이 외딴섬의 노비로 삼는다(絶島爲奴, 勿揀赦前)"는 엄벌 규정이 계속 유지되었는데[12], 이는 비록 신분은 깎였을지언정 이들이 조세 징수와 인력 동원이라는 지방 행정의 핵심 실무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시대의 호장은 겉으로는 수령의 지휘를 받는 하급 관속으로 격하되었으나, 실제로는 수십 년간 쌓아온 토착 기반과 실무 능력을 바탕으로 이면에서 향촌 사회를 통제하는 이중적인 지위를 갖게 되었다.

3. 주요 업무와 권한

고을의 수장으로서 호장이 수행했던 업무는 크게 행정 실무의 집행, 국가 의례의 수행, 그리고 조세 징수로 나뉜다. 이들은 파견된 파견된 수령(사또)을 보좌하는 하급 관속의 형식을 취했으나, 현지 사정에 밝고 오랜 기간 축적된 향촌 행정망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실제 고을을 굴러가게 하는 핵심 축이었다.

3.1. 문서 및 행정 실무의 장악

호장의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권한은 관할 지역의 호구(戶口)를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백성들의 노동력(요역)과 군역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대규모 성곽 보수나 토목 공사가 있을 때면 호장은 기관(記官) 등과 함께 지역민을 징발하여 공사를 총괄하는 실질적인 현장 감독관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막강한 권한은 호장의 직인인 인신(印信)에서 비롯되었다. 호장의 도장이 찍힌 공문서는 향촌 사회에서 절대적인 효력을 지녔기에, 호장의 인장을 위조한 자는 절해고도의 노비로 영구히 귀양 보내는 절도위노(絶島爲奴)에 처해졌으며, 국가적인 경사로 대사면령이 내려지더라도 인장 위조범만은 사면 대상에서 예외 없이 제외하는 물간사전(勿揀赦前)의 원칙이 적용되었다. 이는 국가가 지방 행정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호장의 공문서 장악력을 얼마나 높게 평가하고 경계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3.2. 국가 의례의 지방 대표

호장은 고을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국가적 의례와 프로토콜의 핵심을 담당했다. 중앙에서 새로운 수령이 부임하거나 이임할 때, 호장은 여타 향리와 장교(將校)들을 이끌고 가장 먼저 나서서 영접했다. 이때 반드시 관복인 공복(公服)을 갖춰 입고 5리 밖의 정자(오리정, 五里亭)까지 마중을 나가 땅에 엎드려 맞이하도록 국가 예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또한 매년 정월 초하루가 되면 각 고을을 대표하는 정조호장(正朝戶長)이 궐문에 나아가 국왕에게 새해 문안을 올리는 원단숙배(元旦肅拜) 의식을 치렀다.[13] 이 자리에서 국왕은 호장들에게 직접 붉은 홑옷이나 쌀 등을 하사하며 고을의 민심과 농사의 풍흉을 캐물었다. 평소 수령에게 지방 통치를 위임했던 국왕이 현지 토착 세력의 입을 통해 직접 바닥 민심을 듣는 유일한 공식 창구였던 셈이다.[14]

3.3. 조세 횡령과 수탈의 구조적 배경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이나 임내(任內)의 경우, 호장은 사실상 사또나 다름없는 권한을 쥐고 세금을 걷었다. 그러나 1445년(세종 27년) 전제 개편으로 호장들이 읍사를 운영하던 재원인 공수전(公須田)과 향리 개인의 급여 성격인 인리위전(人吏位田)이 전면 혁파되면서 큰 구조적 모순이 발생한다. 차첩을 통해 막중한 국가 행정망을 돌리면서도 국가로부터 어떠한 공식적인 급여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무급으로 일해야 하는 생존의 기로에 놓인 호장(아전)들은 결국 자신들의 행정 실무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백성들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이윤을 창출하기 시작했다.[15] 대표적인 수법은 조세 장부 조작, 공민의 사유화, 그리고 각종 수수료 착복이었다.

먼저, 토지의 풍흉에 따라 세금을 차등 부과하는 공법이 도입된 1442년(세종 24년)의 사례를 보면, 성주 호장 이흘(李屹) 등은 농사를 망친 땅을 잘 된 땅으로, 잘 된 땅을 망친 땅으로 거짓 기록하여 막대한 조세 차액을 횡령하다 적발되기도 했다.[16] 또한 이들은 국가에 세금을 내야 할 양민들을 호적에서 고의로 누락시킨 뒤 자신의 개인 농장에 예속시켜 사적인 노동력으로 부려먹는 영점(影占)을 일삼기도 했다. 나아가 세금을 대신 내주고 고리를 뜯어내는 방납(防納)에 개입하거나, 관아에 필요한 물품이나 소금 등을 시세보다 비싸게 강제 할당하는 억매(抑賣)를 통해 관청 운영비와 자신들의 비자금을 충당했다.

이러한 행태는 겉보기에는 부도덕한 탐관오리의 횡포였지만, 학술적으로는 독자적인 관사(읍사)와 경제적 기반을 잃어버린 호장층이 수령의 권위에 기대어 향촌 내에서 자신들의 지위와 기득권을 어떻게든 유지하려 했던 치열한 생존 전략이자 그 부작용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렇듯 구조적으로 얽힌 수령과 아전(호장)의 팽팽한 긴장 관계는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기록을 통해서도 입체적으로 조명된다. 다산은 아전을 단순한 처벌 대상이 아니라 교화의 대상으로 보았으며, 당시 만연했던 뇌물과 부패에 얽힌 일화들을 다수 남겼다. 가장 대표적인 일화로, 비리를 일삼던 과천 현감이 영전하여 한양으로 떠날 때 아전들이 관례에 따라 송덕비를 세우겠다고 하자 현감이 알아서 하라고 일임했는데, 제막식에서 비문을 보니 '오늘 이 도둑놈을 보내노라(今日送此盜)'라고 적혀 있어 수령을 역으로 조롱했다는 웃지 못할 민담도 전해진다.

4. 연조귀감

조선 후기에 이르러 신분 질서가 크게 동요하자, 억압받던 호장과 향리 계층은 자신들의 역사적 기원과 긍지를 되찾기 위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 대표적인 산물이 바로 1777년(정조 1) 상주(尙州)의 향리 이진흥(李震興)이 편찬한 《연조귀감(掾曹龜鑑)》이다.

이진흥은 이 책을 통해 향리의 연원과 위업을 기록하여, 양반과 향리가 본래 같은 신분에서 출발했음을 증명하고자 했다. 이 책의 권 1에는 조선 건국에 불복하여 향리로 강등된 사족들의 명단인 '불복신벌정록(不服臣罰定錄)'과 '사족강리록(士族降吏錄)'이 수록되어 있어, 향리가 본래 양반과 같은 신분이었음을 고증하였다. 또한 권 2와 권 3의 '관감록(觀感錄)'에는 뛰어난 향리들의 전기를 모은 일종의 향리 열전이 수록되어 있다.

이후 1848년 그의 증손 이명구(李明九)가 당대 저명한 사대부들의 서문과 발문을 받아 간행을 마쳤으며, 증보 과정에서 뛰어난 향리들의 전기를 모은 '효·열녀 별전(別傳)'이 추가되고 역리(驛吏)와 중앙의 경아전(京衙前)까지 포괄하는 등 내용이 더욱 확장되었다. 이 책은 향리들의 실태를 파악하는 귀중한 사료일 뿐만 아니라, 향리 출신에게도 관직에 나아갈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향리층의 새로운 역사의식과 자각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5. '토호(土豪)'로서의 순기능과 한계

현대인들은 흔히 역사가 발전하는 방향을 중앙집권화와 동일시하며, 지방 분권적인 토착 세력(토호, 향리)을 국가 발전을 가로막는 기득권이나 적폐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전근대 향촌 사회에서 호장이 발휘했던 영향력과 존재 의의를 단순히 '수탈'이라는 단어로만 정의하기는 어렵다.

우선 호장층은 중앙 권력의 폭주와 가혹한 조세로부터 지역민을 보호하는 방파제 역할을 수행했다. 대대로 해당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뼈를 묻어야 하는 이들에게 백성은 자신들의 권력과 부를 유지하게 해주는 소중한 '자산'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백성을 무자비하게 수탈하여 지역 사회 자체를 파탄에 이르게 하지는 않았다.[17] 반면, 짧은 임기를 채우고 떠나는 중앙 파견 관료(수령)들은 종종 뒤탈을 제쳐두고 임기 내에 한탕 챙기려는 '뜨내기 수탈자'가 되기 쉬웠다. 중국이나 한국의 역사적 대규모 민생 파탄 사례들을 보면, 향리의 독단적인 수탈보다는 무리한 토목 공사나 매관매직 등 중앙 권력의 맹목적인 탐욕이 원인인 경우가 훨씬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호장들은 수령을 제어하며 조세를 협상하는 등 지방 사회의 완충 지대 역할을 했다.

또한 지도가 부실하고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전근대 환경에서, 현지 사정에 훤한 호장의 협조 없이는 기본적인 국가 행정망 자체가 굴러갈 수 없었다. 중앙 정부라는 '두뇌'가 아무리 훌륭한 법령을 내려도, 수십 년간 얽히고설킨 향촌의 혈연 및 지연 네트워크를 장악한 호장들이 '사지육신'이 되어 움직여주지 않으면 세금 징수나 치안 유지는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론적으로 조선이 건국 이래 호장 세력을 무장해제 시키고 철저한 중앙집권을 이룩한 것이 반드시 기층 민중의 안락으로 이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중앙 정부는 호장들에게서 합법적인 지배력과 경제적 보상을 빼앗은 채 세금 징수의 할당량이라는 악역만 떠넘겼고, 무급으로 일해야 했던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 고안해 낸 부조리에 대한 원성은 고스란히 '아전의 횡포'라는 프레임으로 덧씌워졌다. 따라서 호장은 대중매체에서 묘사되는 얄팍한 악당의 이미지를 넘어, 국가의 통제력과 지역 사회의 자율성 사이에서 묵묵히 실무를 지탱해야 했던 전근대 지방 행정의 중추로서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6. 주요 호장 목록

문헌과 역사적 기록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주요 호장들이다. 이들은 외적과 맞서 싸운 영웅이기도 했고, 목숨을 걸고 충의를 지킨 충신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국가의 세금을 빼돌리거나 적에게 협력한 반역자이기도 했다.
  • 최기열(崔基烈): 고려 시대 등주(登州, 현 안변) 호장. 조선의 추존왕인 익조(翼祖, 태조 이성계의 조부)의 장인이자, 태조 이성계의 증조모인 정비 최씨(貞妃 崔氏)의 아버지이다.[18]
  • 김거(金巨): 고려 통주(通州) 호장. 1010년 제2차 여요전쟁 당시 거란군이 쳐들어왔을 때 성벽을 견고하게 고수하여 막아낸 공로로 1032년 진위부위(振威副尉)로 승진했다.[19]
  • 이부(李富): 고려 진주(晉州) 호장. 우왕 4년(1378년) 남해안에 출몰한 왜구 10여 명을 생포하는 전공을 세웠다.[20]
  • 이흘(李屹): 조선 세종 대의 성주(星州) 호장. 조세 제도인 공법을 도용하여 재상(災傷, 농사 피해) 수치를 임의로 조작하고 백성들의 세금을 횡령하다 적발된 대표적인 부패 향리이다.[21]
  • 엄흥도(嚴興道): 조선 영월(寧越) 호장. 1457년(세조 3년) 수양대군에 의해 사사된 단종의 시신이 강물에 버려지자,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고 몰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른 충신이다. 훗날 그의 충절이 인정되어 공조참의 등에 추증되고 장릉(莊陵) 배식단 등에 배향되었다.[22]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호장 중 한 명이다.
  • 국세필(鞠世弼): 조선 경성(鏡城) 호장.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가 함경도로 진격해 오자, 가장 먼저 배반하여 판관 이홍업을 붙잡아 일본군에 넘겨주었다.[23] 이후 북관대첩을 이끈 정문부의 함경도 의병에 의해 처형되었다.
  • 박걸(朴傑): 조선 고성(固城) 호장. 임진왜란 당시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수령(고성 현령 권길)과 함께 고립된 성을 끝까지 지키다 전사했다. 국가를 저버리지 않은 공로로 훗날 숙종 대에 이르러 증직을 받았다.[24]

[1] 여말선초 시기까지만 해도 호장층은 경제적 부는 물론 향군()을 통솔하는 군사력까지 갖춘 실질적인 지역 권력자였다.[2] 중앙에서 부임한 수령은 길어야 몇 년 머물다 떠나는 임시직이었지만, 호장은 대대로 그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자기 영지의 백성을 '자산'으로 여겨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3] 《고려사》 지 권제29 향직을 개정하다[4] 《고려사》 지 권제26 장리의 공복을 정하다[5] 《고려사》 지 권제27 향리 자제의 응시자격을 정하다[6] 《고려사》 지 권제29 호장의 정년을 70세로 하다[7] 《고려사》 세가 권제5[8] 《고려사》 세가 권제23[9] 《고려사》 열전 권제46[10] 고통을 견디다 못한 하급 향리(차리)들은 아예 고을을 버리고 도망치는 유망(流亡)을 택하기도 했다.[11] 이태경, 〈조선초기 호장(戶長)의 향촌 지배와 그 변화〉, 《한국사연구》 187, 2019.[12] 《숙종실록》 23권, 숙종 17년 윤7월 28일 및 《속대전》 형전 위조조항 참조.[13] 《영조실록》 37권, 영조 10년 1월 1일[14]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던 영월 호장 엄흥도(嚴興道)의 사례처럼, 지역 내 주요 제사를 주관하며 향촌 사회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하기도 했다.[15] 이 때문에 조선시대 민란의 원인을 보면 항상 향리들의 수탈이 지목되곤 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세금 징수 할당량만 쥐여준 채 월급은 주지 않고 착취를 방조했던 중앙 정부의 구조적 문제가 깔려 있었다.[16] 《세종실록》 96권, 세종 24년 6월 1일 당시 이 범행은 사면령 이전에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예산의 데이터를 조작하여 조세 시스템의 근간을 흔들었다는 이유로 사면 대상에서 제외되어 엄벌을 받았다.[17] 일본 센고쿠 시대다이묘나 서양의 봉건 영주들이 자기 영지의 농노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18] 《태조실록》 1권, 총서 10번째기사[19] 《고려사》 세가 권제5, 전공을 세운 장졸을 승진시키다[20] 《고려사》 열전 권제46, 이부가 왜적을 생포하다[21] 《세종실록》 96권, 세종 24년 6월 1일[22] 《영조실록》 58권, 영조 19년 10월 8일 등 다수의 실록 기사에서 그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23]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7월 1일[24] 《순조실록》 27권, 순조 25년 9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