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38:21

홀로코스트/유대인 분류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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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r ein Jud' ist, bestimme ich!
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
- 헤르만 괴링[1]
1. 개요2. 폐해와 어이없는 기준3. 부작용4. 각종 어이없는 사례
4.1. 사회4.2. 군대

1. 개요

파일:external/cdn1.thr.com/1935_most_beautiful_aryan_baby.jpg
이 사진 속의 아기는 1935년에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에서 가장 아리아인다운 아기"를 뽑는 대회에서 1등을 한 아기이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우승자를 직접 선정한 대회였다. 부모에게는 막대한 상금이 내려졌고, 아기의 사진은 게르만의 우월성을 알리는 선전 잡지와 포스터에 실리기도 하는 등,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 아이는 사실 유대인 혈통이다. 아이의 이름은 헤시 레빈슨, 결혼 후 레빈슨태프트고 부모는 당시 베를린에 유학하러 왔다 서로 눈이 맞아 결혼했던 라트비아계 유대인 성악가 유학생 커플이었다.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노란색의 다윗의 별을 붙이고 다니지 않았고 철저하게 자신들이 유대인임을 숨기고 살았다. 그리고 간 크게도 세계에서 가장 아리아인다운 아기를 뽑는 대회에까지 나갔다! 유대인인 자신들의 아이가 최고의 아리아인으로 선정될 줄은 전혀 몰랐을 것이다. 실제로는 사진을 찍은 사진 작가가 대회에 부모 몰래 사진을 보냈다고 한다. 부모는 유대인이라는 게 들킬 것이 두려워 사진 작가에게 사실을 털어 놓았으나, 사진 작가는 원래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실제로는 나치들을 놀리기 위해서 했다고 한다. 심지어 이 소위 '완벽한 아리아인 아기'는 각종 엽서 디자인으로 발탁되기도 하여 온 독일에 얼굴이 팔려 나간 적도 있다.

1938년에 아이의 부모는 게슈타포에게 붙잡히기도 했으나, 그것은 아이를 아리아인이라고 속인 것이 들켜서가 아닌 단순한 탈세 문제였다(...). 심지어 감옥에 아주 잠깐 갇혔다가 일주일 만에 풀려났다고 한다! 그리고 괴벨스도 히틀러도 나치 독일이 패망하는 그날까지 저 아이와 저 아이의 가족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저 부모는 억수로 운좋게 독일 내 유대인들이 빠져나오기도 어려워질 만큼 본격적으로 홀로코스트가 심해지기 전 프랑스로 갔다가 또 나치의 프랑스 침공 이전에 쿠바로 이민을 떠났고, 거기서도 공산 혁명을 운좋게 피해 미국으로 옮겼다. 헤시 레빈슨은 미국에서 자라 뉴욕 세인트 존스 대학에서 화학과 교수로 일하다 은퇴했는데, 워싱턴 포스트에서 취재한 인터뷰에선 "지금 돌아보면 웃기는 일"이라 회고했다.


인터뷰 동영상. 팔순 노교수 치고 정정하신 분이 자기가 얼마나 이쁜 아기였는지 길가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멈춰 볼 정도였다고 회고하신다.
한 유대인 소년 한스가 있었다. 그의 부모는 신분을 세탁하는 데 성공하여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수용소로 끌려가지 않고, 독일인으로서 정상적으로 살게 되었으며, 한스도 "아리아인으로 인정받은" 다른 독일인 아이들과 함께 정상적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하루는 교사가 말하길, "내일은 골상학적, 그리고 유전학적 측면에서 우리 게르만족이 얼마나 우월한 인종인지 배울 거란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스는 겁이 덜컥 났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유대인인 것이 들통나면 학교에서 퇴학은 물론이거니와, 당장 소문으로만 어렴풋이 들리는 강제 수용소라는 곳으로 가게 될 것이 아닌가?[2] 갑자기 병을 핑계로 학교에 가지 않으면 그 또한 의심할 것이 분명했다. 그와 그의 부모는 크게 걱정하면서 살얼음판 같은 하루를 보냈고, 결국 그 다음 날 한스는 덜덜 떨면서 등교를 했다. 그리고 결국 수업이 시작되었고 한스는 줄자와 계측기로 한스의 키와 두상 형태를 측정했고, 체중계로 체중을 검사하고, 또한 유전자를 검사했다.[3] 이윽고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한스는 동프로이센 지역 바이킹 계통의 아리아인이네요! 아주 우월한 혈통이구나, 한스!"

한스는 크게 안심함과 동시에 어리둥절함을 느꼈다. 속으로 계속 헛웃음만 나왔다. 훗날 그는 독일 국방군에 입대하여, 동부 전선에서 복무하였는데, 종전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쾨니히스베르크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자기 의사로 루터파로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 여자와 결혼한 아버지를 둔 1/2 유대인인 베르너 골드베르크(1919년생)는 1938년 12월 1일에 독일 국방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폴란드 침공에 참전했으며, 이때 육군 소속 사진사가 찍은 골드베르크의 사진이 이상적인 아리아인 병사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실리는가 하면 모병 포스터에까지 사용되었다. 골드베르크는 다음 해 프랑스가 항복한 뒤 1단계 혼혈 유대인을 군에서 추방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제대 처분되었고, 입대 전에 일하던 의류 회사에 복직했다. 개종하긴 했어도 순수 유대인이었던 아버지는 결국 전쟁 중에 죽었지만 베르너 골드베르크는 살아남아 자식 셋을 얻고 2004년에 사망했다.

2. 폐해와 어이없는 기준

홀로코스트의 대상이 주로 유대인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피해자들은 그 자신의 정체성은 물론이고 일반 상식으로 보아도 유대인이라고 볼 수 없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럽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을 거치거나, 자신의 종교에 냉담해지면서 서구 사회에 동화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종교보다 국가가 중요하게 된 근대 시기에는 이런 사례가 더 많이 나타났다.

유대인이기 이전에 '자신들이 속한, 흔히 말하는 우리나라의 국민' 이라는 사고방식이 강해졌던 것이다. 그런데 인종주의에 경도된 나치의 유대인 판정법은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조상까지 봐서 유대인 혈통이 조금 섞여 있으면 유대인'으로 보는 정신나간 기준이었다. 유대인의 정체성을 꼼꼼하게 따져서 판정해도 학살을 정당화할 수 없는 일인데 그조차도 아니었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자신의 몇 대조 조상 할아버지가 유대인이라고 유대인으로 분류당하는 사람도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몇 대조 할아버지가 유대인이라고 한들, 자신이나 그전 세대에서 이미 개종을 해서 유대교를 믿지도 않고 문화적으로는 유럽인과 아무런 차이가 없고, 자신도 자기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당연히 100년 전 조상이 유대인이었다고 해서 그 후손이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질 리가 없는 것이다. 히틀러가 집권하기 한참 전부터 유대인을 욕하고 다녔는데도 수많은 유대인들이 독일에 있다가 봉변을 당한 이유 중 하나도, 그들 자신들부터가 자신은 유대인이기 이전에 독일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 부작용

독일 TV 미니시리즈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에서 묘사하기를 주인공들 중 1명인 유대인의 나이먹은 아버지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며 독일을 탈출해야 한다는 아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난 1차대전 때 독일을 위해 싸웠던 참전용사인데 설마 어떻게야 하겠느냐'[4], '진정한 독일 시민이라면 정부의 정책을 믿고 지시에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 도리다'라며 가만히 있다가 결국 강제수용소에 끌려가서 사망한다.[5][6]

다만 이 사람은 1차대전 참전 경험 때문에 같은 참전용사 출신인 히틀러를 지지하고 나치 독일에 동조하는 인물이었다. 자신이 유대인이면서도 말이다. 자신도 유대인이라는 사실 여부를 떠나서 '유대인이기 이전에 독일 국민'이라고 확고하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정서는 19세기에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졌는데, 시오니즘의 아버지 테오도르 헤르츨조차 젊을 때 합스부르크에 충성하는 독일민족주의자로서 "중부유럽 유대인들이 적극적으로 주류사회에 편입하여 선진국민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 당시 유대인들 중에 이러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실화를 베이스로 한 이야기기 때문에 적어도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고는 할 수 있는 셈. 사족이지만 히틀러와 나치는 집권 초기만 해도 대단히 인기가 많았고, 유대인에 대한 차별/탄압도 단계적으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블라덱[7]: 어느 노인이 있었는데 우리가 점호 받을 때마다 늘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거야...
(회상)
남자1: 난 저 유태인 놈들과 폴란드 놈들 사이에 있을 수 없어요! 나도 당신들처럼 독일인이란 말이요! 난 황제에게서 받은 훈장도 있어요. 내 아들은 군인이구요!
블라덱: 하지만 때리고 비웃기만 했지.
(회상 끝)
아티[8]: 그는 정말 독일인이었나요?
블라덱: 누가 알겠니, 독일인 죄수들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독일인들에겐 이 친구 역시 유태인이었지! 어느 날 점호에 그가 똑바로 서지 않자 경비병이 끌고 갔단다. 그가 노인을 쓰러뜨리고 목을 우악스럽게 밟는 소릴 들었지... 아니, 가스실로 보냈나? 기억은 못하겠다만, 어쨌든 그렇게 죽은 그는 다신 투덜대지 않았지.
2부 2장 中.[9] 이 일화에 나온 수감자가 항의하는 장면에서는 처음에는 쥐(유태인)으로 나오고 두번째는 고양이(독일인)으로 나온다. 수감자는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수용소 경비병들한테는 그냥 '유대인'이었다는 이야기다. 이 수감자는 이렇게 항의하다가 결국 독일군에게 밖으로 끌려나가서 죽었다.

4. 각종 어이없는 사례

이처럼 '독일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유대인' 집단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반유대주의가 철저히 금기시되기 이전까지 서구 문화권 국가 전반에서 반유대주의가 만연해 있었고, 이처럼 반유대주의가 만연했던 근세~근대 초중반까지는 오히려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권으로 유대인을 억누른 다른 지역에 비해 독일 문화권이 오히려 유대인들이 터 잡고 살기에 유리한 지역이었던 것부터 생각해야 한다. 일본의 동유럽 문제 전문가이자 작가인 요네하라 마리에 따르면 루마니아 등 원래 독일계 인구 비중이 적은 지역에서는 독일식 성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대인을 구별할 수 있다는 인식이 퍼져있을 정도로 독일 문화권이 중-동부 유럽의 유대인 사회의 거점이었던 것. 이처럼 상대적으로 차별이나 박해가 덜 한 독일 문화권 지역에서 여러 대에 걸쳐 정착하고 대를 이어 살아온 유대인들이 그 지역 사회에 정착하고, 국가에 대한 소속감 역시 가지게 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이런 상태에서 대학살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나치가 정한 유대인 기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유대인 외모를 가진 자는 유대인으로 규정한다거나 상당수 독일계 유대인은 제외되는 등의 객관성, 일관성은 아예 없는 왜곡된 기준들이다. 충공깽한 수준. 즉 히틀러는 그저 감정의 희생양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이 다시 세계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선 전쟁이 필수였고, 전쟁은 곧 돈이다. 막대한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자국민을 갈취해댔다간 히틀러 자신이 찍혀나가니, 자국 내 필수품 사업체 여러 개를 운영하는 돈 많은 떠돌이 민족 유대인은 여러모로 히틀러의 좋은 타깃이었다. 또 당시 유대인들은 영토나 국가가 없어 차후 합법적 보복이 불가능하다 판단될 정도로 만만한 희생양들이기도 했다… 만약 유대인이나 집시들이 영토를 가진 정식 국가였다면 종전 후 구체적 피해 금액 요구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이스라엘이 건국된 직후까지만 하더라도 홀로코스트라는 게 있었다 수준이었지만, 미국의 중동/아랍지역에 대한 인식 변화로 인해 이스라엘이 주목받고, 홀로코스트가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른 것에 비해, 집시, 공산주의자, 기타 반 나치주의자들에 대한 보상 및 사과는 매우 미흡하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거기다 나치 고관들은 자신의 친구나 지인이 유대인이거나 했으면 그들은 학살에서 쏙 빼주기도 했다. 당장 위에 언급된 돼지는 물론이요 그 히틀러마저도. 가령 에두아르트 블로흐(Eduard Bloch)라는 유대인 의사는 히틀러의 어머니를 치료해주고 치료비를 깎아준 적이 있어서 히틀러가 그를 대단히 좋아했다. 1940년까지 히틀러의 특별 보호를 받았고 "모든 유대인이 블로흐 같았다면 유대인 문제는 있을 수가 없다"라는 발언까지 할 정도였다. 블로흐는 유대인 탄압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1940년에 미국으로 이주하긴 했지만 재산을 제대로 챙겨서 갈 수 있을 정도로 대우를 받았다. 또한 1차세계대전 때 본인이 속한 연대의 지휘관이었던 에른스트 헤스(Ernst Moritz Hess)도 특별히 봐준 적도 있으며 거기에 에밀 마우리스(Emil Maurice) 또한 유대인 혈통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당원 초기부터 같이 지내던 인맥으로 하인리히 힘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직접 명예 아리아인 칭호를 주면서 슈츠슈타펠의 장교직에 붙었다.

결국 나치 기준으로도 자기가 유대인이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고, 조상님들 가운데 유대인이 있다는 걸 알지도 못했던 사람도 하루 아침에 유대인으로 찍혀서 끌려가서 살해당할 수 있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당사자들로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이는 편협한 인종주의가 극단적으로 치달을 때 얼마나 위험하게 변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사실 이전에도 유대인에 대한 반감은 있었지만 나치처럼 무조건적 말살을 당연시한 사례는 없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결정적으로 유대 사회는 모계 사회이다. 이 원칙은 기원 후 70년 이스라엘이 로마에게 완전히 멸망하고 유대인들이 전 세계[10](특히 유럽)로 흩어지면서 아버지가 누군진 몰라도 엄마는 누군지 확실히 알 수 있기에 지켜져 왔던 원칙이다. 즉, 유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남자가 현지인 여자랑 결혼해 아이를 낳고 그 자식도 현지인들과 결혼해 후손을 낳고 또 낳아서, 유대인 사회를 떠나 현지인 사회 일원의 하나로 정착해버린 경우도 많았다. 유대인 남자들이 여기저기서 사고 쳐서 낳은 사생아들도 많다. 70년부터 시작된 유대인 민족 대이동은 1933년 나치당이 집권하기 전까지 무려 1863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이뤄졌는데 히틀러 그 자신이 그렇게 사랑했던 자신의 어머니도 가계를 쭉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유대계 피가 한 방울이라도 안 섞였다고 장담할 수 없으며 순수 혈통이란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짬뽕 혈통이 된 지 오래이다.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에서도 순수 혈통으로만 이루어진 민족 따위는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다 해도 그건 인구가 부족급 단위로 적고 교류도 없었던 곳에나 가능하지 인구는 몇백만 이상의 광역급+교류의 역사도 있었던 곳에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4.1. 사회

그리고 이미 19세기부터 독일의 유대인들은 독일 사회로 적극적으로 진입하고자 했다. 19세기 초부터 독일은 유대인에 대한 제한을 풀어주기 시작했고 말에 이르러서는 종교를 개종하면서까지 법학자가 된 사람과 작위를 받은 판사가 배출된 정도였다. 물론 독일에서 인종적 관점에서 관대해진 것보다는 성장한 유대계 상인과 중산층들을 보장해주는 방식으로 거래적인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거래를 통한다고 해도 유대인들에게 독일 주류 사회로 입장하는 최종 관문이 있었는데 바로 독일의 전통적인 기독교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자발적으로 개종을 할 정도로 유대인들은 독일 사회에 편입하는 것이 적극적이었고 중산층에 유대인들이 증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11] 이 때문에 유대인이라는 자각 없이 자신은 혈통은 유대인이지만 독일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가 영문도 모르고 자신이 충성했던 독일에 의해 홀로코스트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존재했다.

4.2. 군대

거기다 상술된 제1차 세계 대전의 유대계 독일군의 케이스 및 제2차 세계 대전의 사례를 더 자세히 들어 보면 독일 국방군 뿐 아니라 아주 충격적이게도 빡빡한 혈통 검사로 유명한 슈츠슈타펠 산하 일반친위대나 무장친위대 소속 포로들을 잡아 제2차 세계 대전 전후에 조사한 결과 놀랍게도 위의 경우처럼 최소 수만 인의 순수 유대인 내지 유대계 독일인 장병들이 근무했고, 실제 전투에 참전했음이 밝혀졌다![12]

이러한 병크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SS 중장 등의 인물들의 주도 등에 의해 나치 인종법이 계속해서 적용되면서 꼬투리를 잡아 아군마저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이 되는 비효율적이기 그지없는 상황들만 아주 태산이었음에도 그 깐깐하기 그지없었던 친위대 오야붕 하인리히 힘러는 물론, 히틀러와 라인하르트마저도 그들의 존재를 일부 증명자들만 명예 아리아인 내지 그냥 순혈주의 관점의 순수 아리아인으로 취급하면서 눈 밖에 나서 추방할 사람들은 추방당했으나 알건 모르건 자기 소속 군에 인맥 깔고 근속중인 유대계/유대인 군인들을 그냥 지나가는 나부랭이 취급하며 계속 종전시까지 군에 남겨뒀다는 것.[13]

물론 유대인 출신들도 전장에선 독일인 동료들한테 물들어서 잔악한 전쟁범죄를 반복한 탓에 은둔하며 살다 간 전범들의 비율도 상당히 있겠으나, 그들 중 일부는 혈통에 관계없이 국가에 의하여 행해진 부당한 명령과 살인 제도로 인해 아무런 진실조차 모른 채 자신의 손으로 이웃과 수많은 인명들을 부조리한 환경 속에서 죽여야만 했으니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이다. 진실을 안 이들은 뒤늦게 그것을 알았더라도 죄책감에 빠진 채 입을 열지 못하고 쓸쓸히 생을 마감했거나 지금도 어딘가에서 그 때의 악몽 속에서 여전히 괴로워하며 그 때의 쓰라린 기억을 잊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기에 이 황당한 분류 기준은 결국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참전용사들을 낳게 된다.



[1] 저 말을 처음 한 자는 19세기 후반의 반유대주의자이며 오스트리아 빈 시장 카를 루에거. 그 이유도 가관인 게, 빈에 오래 살던 부유한 유대인은 괜찮고 동유럽 이민자 출신(=가난한) 유대인만 박해하겠다는 뜻이었다. 괴링이 이런 말을 한 이유는, 괴링이 아끼는 부하인 에르하르트 밀히가 유대인이라는 논란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괴링은 의외로 반인륜 범죄와의 연관성은 히틀러, 괴벨스, 힘러 같은 다른 나치당 고위 간부들보다는 덜한 편이었다. 거의 빈털터리로 만드는 수준이긴 했지만 돈을 받는 대가로 유대인들이 안전한 국가로 피신하도록 도와준 적도 여러 번 있다고 한다. 심지어는 동생인 알베르트 괴링이 유대인을 구해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묵인해 줬다고 하며, 이런 점을 감안하여 사형은 면해 달라는 탄원서가 제출된 적도 있다. 여담으로, 1차 대전 시절의 전우였던 프리츠 베크하르트가 수용소로 잡혀가자 그를 풀어주고 포르투갈로 망명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2] 나치 독일 시절의 민간인들은 수용소에 대한 소문만 들었지 그것이 진짜 있는지는 몰랐다.[3] 문제는 DNA의 발견은 1953년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전자에 대한 의미 있는 분석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은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완료된 2003년 이후였고 각 개인의 민족적 기원을 추적할 수 있게 된 것은 이후로도 몇 년이 더 지나서였다. 초중등과정 학교 수업 시간에 유전자 검사를 한다는 건 현대에도 불가능한 유사과학의 영역이고 심지어 현대의 기술 수준으로 각 개인의 혈통적 근원을 역추적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순혈주의자들이 개탄스러워할 혼파망 수준의 혼혈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치가 뒷목을 잡을만한 유전자에 기록된 진실은 인류아프리카로부터 기원했다는 것이었다.[4] 작중 나레이션에 의하면 병으로 입대해서 부사관까지 진급했다고 한다.[5] 실제로 유대계 독일인들 중 1차대전때 참전한 사람이 많았다. 당시 독일내 유대계는 약 50만명으로 추정되는데, 이중 10만명이 1차대전에 참전했으며 18000명이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나치는 그들이 참전을 했든 안했든 신경을 안 쓰고 그냥 죄다 유대인으로 취급해서 강제수용소로 보냈다.#[6] 멀리갈 것도 없이 나치의 유대인 탄압을 대표하는 일기를 쓴 안네 프랑크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도 독일 제국군 장교 출신이었다.[7] 브와디스와프 슈피겔만.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이자 아티의 아버지.[8] 아트 슈피겔만. 블라덱의 아들이자 쥐의 작가.[9] 한국판 합본 214페이지[10] 중국까지 진출. 카이펑 유대인 항목 참조.[11] 이것은 당시 독일에서 토지를 가지고 농업에 종사하던 유대인의 비율이 적었다는 것, 그리고 중산층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교육을 시키는 유대인들이 점점 늘어난 덕분이다.[12] 옛 고서적에서는 무려 살아서 포로로만 잡힌 유대인들이 1만 5천여명이나 되었다는 보고가 있다.[13] 심지어 인맥이 없더라도, 단순히 처리가 귀찮으면 군에 그대로 남겨두기도 했다. 당시의 나치 독일이 매우 감정적인 일처리란 게 무엇인지 알 만큼의 일을 얼마나 벌였는 지를 알 수 있는 반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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