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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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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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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환왕(桓王)
(姬)
림(林)
아버지 희예보(姬洩父)
생몰 기간 기원전 ???년 ~ 기원전 697년
재위 기간 기원전 719년 ~ 기원전 697년

1. 개요2. 재위 기간
2.1. 진(晉)나라의 내전에 개입2.2. 정 장공과 사이가 갈라지다.2.3. 노나라와의 관계2.4. 정나라와 싸우다2.5. 진후 옹립
3. 사망

1. 개요

주나라의 제14대 . 평왕의 손자이며, 장왕의 아버지다. 진(晉)곡옥의 내전(곡옥대진)에 개입했고, 주 천자를 무시하며 멋대로 영토를 넓히는 정 장공을 토벌하려다가 수갈 전투에서 화살에 맞는 굴욕을 당했다.

2. 재위 기간

2.1. 진(晉)나라의 내전에 개입

환왕 2년(기원전 718년) 봄, 환왕은 곡옥 장백뇌물을 먹고, 정나라, 형나라와 함께 진(晉)의 도성인 익을 포위했다. 환왕은 대부 윤씨와 무씨를 보내 곡옥 장백을 돕게 했다. 그러자 당시 진(晉)나라의 군주인 악후는 그 힘에 밀려 수읍으로 달아났고, 같은 해 여름에 그 땅에서 죽었다. 그리고 곡옥 장백은 그 소식을 듣자 기가 살았는지 진나라에 맹공을 가했다. 당시 곡옥 장백은 환왕을 배반하였다. 결국 환왕은 그 해 가을, 배신을 응징하기 위해 진나라와 손잡고 곡옥 장백을 쳤다. 그리하여 장백은 패배하여 곡옥 땅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환왕은 악후의 아들인 애후를 세웠다.

2.2. 정 장공과 사이가 갈라지다.

환왕 3년(기원전 717년), 정 장공이 주나라에 입조하였다. 그런데, 장공이 주나라의 기장을 수확한 것에 분노해 그에게 짐짓 무례하게 대했다. 그러자 주공 흑견이 간했다.

"전하. 정나라의 백작 정백 우가 유왕을 지키다가 죽었으니 그에게 예의를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일단 환왕은 그 말을 듣고 참기로 했다. 주환왕은 기실 정장공을 매우 싫어했다. 정장공은 선대 주평왕 시절 할아버지 정환공, 아버지 정무공의 뒤를 이어 3대째 주왕실 경사를 맡았지만 간웅인 정장공은 이 지위를 활용해 자국의 국력 강화에만 힘을 썼고 왕실의 정사는 돌보지 않았다.[1] 이에 주평왕은 괵공 임보를 공동 경사로 임명하려 했는데 벼락같이 이 정보를 알게 된 정장공은 주평왕을 찾아와 경사 지위를 반납했다.

하지만 사람좋은 주평왕은 자신과 주나라의 위기에 온몸을 바쳐 헌신한 정장공 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정장공을 달래 경사를 계속 맡아 줄 것을 말 그대로요청했다. 그래도 정장공은 완강히 경사 지위 반납을 청했고 결국 주평왕은 태자 호(狐)와 정 세자 을 인질로 교환하는 파격적인 조건을 걸어 정장공을 경사로 복귀시켰다.

그러나 정장공 부조의 헌신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데다 할아버지와 달리 강단있는 주환왕은 달랐다. 정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하던 태자 호는 주평왕의 죽음에 너무 슬퍼하다 곧 사망했는데 그 원인이 정에서 인질 생활을 고달프게 했기 때문일 것이란 게 정장공의 인간성을 볼 때 충분히 그랬을 듯 주환왕의 생각이었다. 또 감히 제후국 주제에 천자국과 인질을 교환했다는 점 때문에 주환왕은 정장공을 증오하고 있었다. 그 똑똑한 정장공도 이를 모를 리 없는 바 환왕 등극 이후 주왕실을 찾지 않았고 이를 구실로 환왕은 정장공을 경사에서 해임한다. 이 때문에 정장공도 주환왕을 매우 싫어하고 꺼리게 됐다.

환왕 4년(기원전 716년) 겨울, 노나라에 범백을 보냈다. 범백이 복귀할 때 융인들이 초구를 막아 그들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환왕 5년(기원전 715년) 봄, 정 장공은 환왕이 무례하게 군 것에 앙심을 품고 노 은공과 협의해 노나라탕목읍인 팽읍과 정나라의 허전을 바꾸었는데, 이 땅은 모두 주나라 천자가 태산에서 제사를 지낼 때 쓰는 곳이었다. 이는 주 천자의 권한을 무시하는 행위였다. 그 해 여름에 괵공 기보를 경사에 임명했다.

2.3. 노나라와의 관계

환왕 6년(기원전 714년) 봄, 환왕은 남계를 노나라에 보냈다.

환왕 12년(기원전 708년) 봄, 환왕은 재관인 거백 규를 노나라에 보냈다. 같은 해 겨울, 환왕은 진(秦)나라와 함께 예나라를 포위해 그 군주인 예백 만을 사로잡았다.

2.4. 정나라와 싸우다

환왕 13년(기원전 707년), 정 장공은 경사의 신분으로 환왕에게 입조할 때마다 전권을 휘둘렀다.[2] 당연히 환왕은 그런 대우가 달가울리 없었다. 이에 환왕은 정 장공의 권력을 거둬갔다. 그러자 분노한 정 장공은 다시는 입조하지 않았다. 같은 해 가을 환왕은 병사를 거느리고 오만방자한 정나라를 정벌했다. 왕은 중군, 괵공 임보는 우군장, 채나라와 위나라는 그를 돕게 했으며, 좌군은 주공 흑견, 그리고 진(陳)나라는 좌군에 속했다.

한편 침략을 당한 정나라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는데, 제중(祭仲), 원번(原繁), 고거미(高渠彌) 등을 거느리고 맞서 싸우니 이 전투를 수갈 전투라 한다. 여기서 환왕은 패배했는데, 정 장공의 부하인 축첨이 환왕의 어깨에 화살을 맞추었다. 결국 부상을 입은 환왕은 퇴각하였다. 정 장공은 환왕과 싸우기는 했지만 천자가 다치는 것을 바라지 않아 축첨을 해고했고, 축첨은 그 충격으로 죽었다.[3]

2.5. 진후 옹립

환왕 15년(기원전 705년) 겨울, 곡옥 무공이 익, 즉 진(晉)의 소자후살해했다.

환왕 16년(기원전 704년) 겨울, 환왕이 진(晉) 애후의 동생인 희민을 진(晉) 후로 임명하니 그가 바로 진(晉) 문후의 후손 계열의 마지막 진 후인 희민이었다.

환왕 18년(기원전 703년), 괵공이 첨보를 모함했다. 그래서 환왕이 첨보에게 벌을 주었는데, 나중에 괵공이 그를 모함했음이 드러나자 괵나라를 쳤고, 괵공은 우나라로 달아났다.

3. 사망

환왕 23년(기원전 697년), 병이 무거워진 환왕은 주공 흑견을 불러 총애하는 막내 아들인 희극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가 3월 을미일에 죽자 주공 흑견이 유언을 따라 희극을 보필하였다. 그러다가 태자 희타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장왕이다.

[1] 할아버지는 친조카 주유왕과 왕도 호경에서 생을 함께 했고 아버지도 재위 대부분을 새 왕도 낙읍에 머물며 주왕실 경사 일만 했다[2] 대표적으로 송나라를 친다던가 하는 등의 일.[3] 축첨은 달리 축담이라고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