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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횔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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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 프리드리히 횔덜린
Friedrich Hölderlin
<nopad>파일:Johann Christian Friedrich Hölderlin.jpg
본명 요한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횔덜린
Johann Christian Friedrich Hölderlin
출생 1770년 3월 20일
신성 로마 제국 뷔르템베르크 공국 라우펜[1]
사망 1843년 6월 7일 (향년 73세)
뷔르템베르크 왕국 튀빙겐
국적
[[뷔르템베르크 왕국|
파일:뷔르템베르크 왕국 국기.svg
뷔르템베르크 왕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2]
직업 시인, 작가, 철학자
서명
파일:프리드리히 횔덜린 서명.svg

1. 개요2. 생애3. 어록4. 주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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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왜 시가 시원으로 향하는 언어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시인으로서 시인 중의 시인.

마르틴 하이데거
독일을 대표하는 시인.

생전에는 괴테실러의 그늘에 가려져 인정받지 못했으며 반평생을 가난과 정신 착란에 시달리며 불운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20세기 초 그의 시들이 발굴되며 헤르만 헤세, 라이너 마리아 릴케, 발터 벤야민, 모리스 블랑쇼를 위시한 후대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오늘날에는 독일 시문학의 정점이자 현대시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2. 생애

1770년 슈바벤 지방 네카 강변의 작은 마을 라우펜에서 수도원을 담당했던 관리 하인리히 횔덜린의 아들로 태어났다. 2살 때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는 뉘르팅겐 시의 시장[3]과 재혼하며 뉘르팅겐에서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1779년 독감으로 인한 폐렴으로 새아버지마저 사망하자, 어머니는 절망과 비탄에 몸부림쳤고, 그걸 지켜보던 어린 횔덜린은 "나의 어머니가 그 짐을 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라고 신께 기도할만큼 불안과 슬픔의 시기가 찾아왔다. 다행히도 두 명의 남편은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을 만큼의 유산을 남겼으며 이 덕분에 부족하지 않은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으나, 횔덜린은 이때부터 자주 비감에 젖는 자신의 성격이 싹트기 시작했음을 훗날 밝혔다.

1788년, 수도원 학교를 졸업하고 개신교 기숙사 장학생으로 튀빙겐 신학교에 진학했다. 그가 성직자가 되길 원하던 어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헤겔, 셸링 등과 교류하며 임마누엘 칸트의 비판철학과 고대 그리스 고전에 심취했다. 이 무렵 발생한 프랑스 대혁명을 지켜보며 혁명의 이상에 고취되기도 했지만 급진파인 자코뱅파의 공포 정치에는 반대한다. 석사학위를 따낸 후에는 성직자의 길을 걷는 대신 독일 각지를 떠돌며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1793년, 횔덜린은 당시 유명한 작가였던 프리드리히 실러를 만나 얘기를 나눴다. 이를 계기로 이후 실러는 횔덜린에게 가정교사직을 소개시켜주고 자신의 간행물에 그의 작품들을 실어주는 등 여러 방면으로 횔덜린을 지원해줬다.[4] 또한 횔덜린은 실러를 통해 괴테, 피히테, 노발리스와 같은 대문호들과 만나 영향을 받으면서 그의 문학적 소양을 더 성숙시키는데 매진했다. 이때 그의 유일한 소설인 휘페리온을 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1795년, 횔덜린은 프랑크푸르트의 부유한 은행가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는데, 하필 그곳 안주인 주제테 공타르와 사랑에 빠져버렸다. 주제테는 온화하고 감수성이 넘치는 인물이었는데, 그녀는 그녀와 닮은 면이 많은 횔덜린의 심성에 끌려 그와 교제를 나누게 된 것이다. 횔덜린은 그녀를 '디오티마'라 부르고 자신의 작품에 반영하는 등 깊은 애정을 표현했다. 허나 그들의 밀회는 발각되었고 횔덜린은 곧 가정교사직에서 쫒겨났다. 이때부터 횔덜린은 가난과 이별이라는 이중고를 겪으면서 정신착란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창작욕은 불타올라 수많은 작품을 한순간에 써나갔다. 1800년에서 1802년까지 2년이라는 짧은 시기에 신이 축복이라도 내린듯 그의 대표작들이 쏟아졌으며, 이시기를 횔덜린 문학의 절정기라 부른다.

1802년, 주제테가 병으로 사망하자 그의 정신착란 증세는 더욱 심각해졌다. 결국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과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며 요양을 했지만, 상태는 잠시 나아지는듯 싶다가도 증세는 점점더 악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정신분열증세를 보이는 와중에서도 그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주제테의 죽음을 잊기위해 미친듯이 일에 몰두했다. 송시들을 쓰고 그리스 비극들을 완역해서 출판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그럼에도 정신착란 때문에 정상적인 일을 하지 못해 먹고살기가 힘들어지자, 이 무렵 친구가 된 이자크 폰 싱클레어가 그에게 도서관 사서직을 마련해주며 겨우겨우 생계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1805년, 그러던 싱클레어마저 반체제활동을 했다는 무고를 당하며 구속되었고, 심지어 횔덜린 역시 공모자로 조사받게 되었다. 그리고 횔덜린은 조사받는 도중에 정신착란 증세를 들켜서, 튀빙겐의 정신병원에 강제로 이송되었다. 이때의 이송 광경을 보고 귀족부인 카로리네는 자신의 딸에게 이렇게 적어 보냈다.
불쌍한 횔덜린이 오늘 아침 그의 가족에게 돌려보내려고 이송되었단다. 그는 마차에서 뛰어내리려고 온 힘을 다했지만, 그를 책임진 사람들이 그를 안으로 밀어 넣었어. 횔덜린은 소리 내어 외치고 무장된 사람들이 그를 넘어뜨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 맞서 싸웠고, 엄청나게 긴 그의 손톱으로 그 사람을 할퀴어서 그의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단다. [5]

8개월만에 퇴원이 결정났지만 횔덜린은 더이상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 이 때 그의 소설 『휘페리온』을 감명깊게 읽은 목수 에른스트 치머가 "그렇게 아름답고 찬란한 영혼이 파멸해야 한다는 것을 몹시 애석해" 하면서 후견인을 자처하고는 횔덜린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다. 치머 집안의 친절한 보살핌 덕에 횔덜린은 의사로부터 3년을 못 넘길 것이라는 진단과는 달리 36년이라는 세월을 더 보낸다.[6] 그리고 1843년 6월 7일 밤 11시, 횔덜린은 평온하게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은 6월 10일 튀빙겐 공동묘지에서 거행되었으며, 백여명의 신학교 학생들이 장례 행렬을 뒤따랐다. 그의 의붓동생 카를이 세운 묘비에는, 그의 시 《운명》의 마지막 연 첫 4행이 새겨져 있다.
폭풍 중 가장 성스러운 폭풍 가운데
나의 감옥 벽 무너져 내리기를,
또한 내 영혼 한층 찬란하게
그리고 한층 자유롭게 미지의 세계로 물결쳐 가기를!

3. 어록

궁핍한 시대에 시인은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빵과 포도주〉
지구상에 지옥이 만들어졌던 것은 항상 인간이 자신들의 천국을 만들려고 할 때였다.
Immerhin hat das den Staat zur Hölle gemacht, daß ihn der Mensch zu seinem Himmel machen wollte.
『휘페리온』
삶 속에서 예술을 배우고 예술 속에서 삶을 배운다.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 또한 있느니라.
〈파트모스〉

4. 주요 작품



[1] 라우펜(Lauffen): 독일 서남부 슈투트가르트 북쪽, 네카 강변의 작은 마을이다.[2] 본래 공국이었으나 1806년 왕국으로 승격했다. 뷔르템베르크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국이었으나 나폴레옹 전쟁 중에 제국이 해체되었고 전쟁이 끝난 1815년에는 독일 연방의 구성국이 되었다.[3] 요한 크리스토프 고크(Johann Christoph Gock): 죽은 횔덜린의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이자 포도주상 동업자이기도 했다.[4] 실러의 소개로 횔덜린은 샤를로테 폰 칼프 집안의 가정교사로 들어가는데 샤를로테가 독일에 체류하던 중이라 샤를로테와 가까이 지내던 22세의 과부 빌헬미네 키름스가 여러 일을 처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키름스는 이듬해 딸을 낳고 사망하는데 그 아버지가 횔덜린이라는 설이 있다.[5] 1806년 9월 11일, 가족의 동의하에 정신병원으로 이송되는 장면. 《궁핍한 시대의 시인, 횔덜린》 장영태 저. p.496 에 나온다.[6] 현재 치머의 집에는 횔덜린이 거주하던 방과 각종 기록물이 보존되어 있다.[7] 프랑스의 영화 감독 듀오인 스트로브-위예가 두 차례 영화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