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LOUDNESS의 멤버 |
히구치 무네타카 |
역대 LAZY의 리더 | ||||||
밴드 활동 시작 | → | 히구치 무네타카 (1977년~1981년) | → | 밴드 공백기 (1981년~1997년) | → | 이노우에 슌지 (1997~) |
樋口宗孝
1958년 12월 24일 ~ 2008년 11월 30일
일본의 드러머 겸 음악 프로듀서. 나라현 나라시 출신.
1. 생애
중학교 시절 레드 제플린의 존 본햄을 동경하여 드러머가 되기로 결심했고,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드럼에 입문했다. 이후 레인보우의 코지 파웰, 토토의 제프 포카로, 더 폴리스의 스튜어트 코플랜드, 러쉬의 닐 피어트 등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다.고등학교 3학년 때 이미 프로 밴드에게서까지 가입 제의를 받았으나, 같은 학교 후배 타카사키 아키라의 권유로 LAZY에 가입했고 1977년에 메이저로 데뷔한다. 1981년, LAZY가 음악성 문제로 해체될 때 타가사키 아키라와 함께 LOUDNESS를 결성해 다시 데뷔했다. 멤버 중 최연장자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리더였다고 한다.
1994년, '현재의 음악성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LOUDNESS를 탈퇴해 원 보컬인 니이하라 미노루, EARTHSHAKER의 멤버였던 이시하라 신이치로[1], 블리자드의 멤버인 테라사와 코이치의 4명으로 SLY라는 밴드를 구성해 1998년까지 활동하게 된다.
1998년에 SLY의 사실상 해체를 선언한 이후 LAZY를 재결성했고,[2] 2001년에는 라우드니스에도 복귀해 왕성하게 활동한다.
2008년 3월에 간세포암 때문에 활동을 중지하고 재활치료를 해 왔으나, 2008년 11월 30일, 구토를 한 상태로 쓰러진 것을 가족들이 발견하고 오사카의 병원으로 후송했으나 당일 오전 10시 44분에 향년 49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그의 사망 소식은 일본 전역에 방송되면서 큰 충격을 안겼다.
영결식은 고인의 생일인 12월 24일에 도쿄 아오야마 장의소에서 거행되었고, 니이하라 미노루, 야마시타 마사요시를 비롯한 라우드니스의 멤버와 카게야마 히로노부, 이노우에 슌지 등 LAZY 멤버, 그의 옛 연인이며 유명 록 보컬리스트였던 하마다 마리, 그리고 이이지마 나오코등을 비롯한 저명인사 1,500명이 참가해 그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라우드니스와 LAZY의 기타리스트인 타카사키 아키라가 추도사를 낭독했다. "아직 세계 최고의 밴드가 되자는 약속도 못 이뤘는데 먼저 가다니 너무하다"는 그의 추도사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장면.
그의 사망은 LAZY의 광팬이던 오쿠이 마사미 등 유명한 뮤지션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VOW WOW의 기타리스트 야마모토 쿄지나 44magnum, Ziggy의 드러머 미야와키 '죠' 사토시, 호테이 토모야스 등이 각자의 사이트에 그의 사망에 대한 애도의 글을 올렸으며 B'z와 TUBE는 사망한 당일 멤버 전원이 도쿄에서 오사카까지 왔을 정도. 2006년에 LAZY의 멤버이자 절친한 친구인 타나카 히로유키를 먼저 보냈던 카게야마 히로노부는, JAM Project 공연 준비 중에도 그의 묘지를 직접 찾아 고인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고인의 묘지는 오사카시가 내려다 보이는 산에 있다. 카게야마 히로노부가 직접 다녀왔다.
골프를 즐겼고, 실력은 프로 수준이었다. 마지막으로 애용한 차는 BMW의 M6이었다고 한다.
엄연히 말해 라우드니스의 리더는 아니었지만, 흔히 대중들에게 그렇게 알려진데다가 아키라도 딱히 부정하진 않았다.
2. 음악적 평가
생애 내내 전성기 드러머라는 평을 들었던 인물.드럼에 관해 연구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으며 히구치 드러밍, 라우드 드러밍이라 불리는 그만의 스타일을 정립할 수 있었다. 레드 제플린의 드러머 존 본햄을 좋아해서 언제나 베이스 드럼을 하나만 세팅하는 원 페달 세팅으로 연주했고, 플로어 탐을 적절히 이용해 더블 베이스 페달과 유사한 뉘앙스를 내기도 했다.
그를 사사한 제자들 역시 명 드러머의 경지에 오른 인물들이다. 일본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걸즈 록 밴드 'PRINCESS PRINCESS'의 토미타 쿄코, LUNA SEA의 신야, 전 SEX MACHINEGUNS의 히마와리, La'cryma Christi의 레빈
3. 기타
2009년 이후 고인을 추도하는 라이브가 열렸는데 첫 라이브부터 그 면면이 상당히 화려했으며, 고인이 홀로그램으로 나와 다른 드러머들과 드럼 배틀을 벌이기도 했다. LAZY 멤버인 카게야마 히로노부와 이노우에 슌지, 타카사키 아키라, 제자인 신야, 전 LOUDNESS의 베이시스트 타이지, LAZY의 팬 오쿠다 타미오 등이 참가해 눈길을 끌었다.드럼 실력만큼이나 훌륭한 인품으로, 일본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록계의 수많은 후배들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다.
음악 동료인 타카사키 아키라가 불 같은 성격에 다소 메탈 씬에 한정된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데 비해, 히구치는 실력있으면 장르 불문하고 누구든 포용했었다. X JAPAN에서 넘어와서 기존 라우드니스 팬들에게 반감을 사던 TAIJI를 누구보다 따뜻하게 격려한 장본인이었으며, 90년대 자파메탈 암흑기 시절 니이하라 미노루가 "이제 나 같은 가수는 설 곳이 없다"며 은퇴하려던 걸 간곡히 설득해 말리기도 했다. 그가 생전에 매우 싫어했던 사람은 굉장히 드문데 X JAPAN의 Yoshiki와 기타리스트 켈리 사이먼스를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LAZY로 활동하던 시절에는 란티스 소속 아티스트들 중 두 번째로 연장자였다.[4] 첫번째는 당연히 미즈키 이치로.[5]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그의 영결식 때의 So Lonely.
4. 어록
- 음량이 안 나오면 빠르게 쳐 봐야 쓸 데 없다.
- 심장이 울릴 것 같은 드럼 플레이를 하지 않으면, 드러머는 아무나 해도 되는 게 돼 버린다.
- "역시 히구치가 치면 이렇게 되는구나"로 끝나고 싶지 않다.
- 기초를 연습할 때도 항상 그루브를 느끼며 연습했으면 한다.
- 나는 드럼 장인이 아니라 록스타이고 싶다.
- 드럼 튜닝에 익숙해지려면 레코딩을 경험할 것. 마이크를 통해서 나오는 자기 소리가 얼마나 촌스러운지 깨달아야 한다.
- 심벌을 얼마나 잘 다루느냐로 드러머의 가치는 결정된다.
- 연주에 집중하면서도 공연장 전체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것. 그것이 좋은 라이브를 할 수 있는 드러머의 조건이다.
- 중요시하는 건 '혼'. 분명히 소리에 남기 때문이다.
- 현재 음악에서는, 같은 템포 안에서도 어떤 뉘앙스로 연주하느냐가 중요하다.
- 무슨 소리야, 전곡을 쳐줘야지.(히구치 덕에 프로 세션맨이 될 수 있었던 마츠모토 타카히로가 B'z 결성 이전 제작한 자신의 첫 솔로앨범에서 한 곡만 드럼 연주를 부탁했을 때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6])
- 록의 부흥은 한두 명 잘 나간다고 될 게 아니야.(그 신념대로, 그는 수많은 후배들의 프로듀싱과 세션을 맡았다.)
- 뮤지션은 칭찬만 들으면 현상 유지에만 머무르게 돼. 모두들 계속 노력해서 날 뛰어넘길 바라거든.(그는 후배 뮤지션들을 면전에서 칭찬하는 법이 없었다. 다만 그들이 없는 자리에서는 그들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 저 녀석은 '멋진 드러밍'이 뭔지 잘 알고 있어.(그의 제자인, 라크리마 크리스티의 레빈을 두고 한 말.)
5. 참가 음반 목록
본인 저작 목록은 편의상 한글을 적고 뒤에 일본어 원문으로 기재한다.- 感じてKnight와 Reckless를 제외한 LAZY의 모든 음반. 전자는 고인이 생전에 녹음했던 곡을 리메이크했다.[7]
- Ghetto Machine 3부작을 제외한, THE EVERLASTING까지의 LOUDNESS의 모든 음반, 단 THE EVERLASTING은 고인이 생전에 녹음했던 드럼 트랙을 사용하였다.
5.1. 본인 저작
- Destruction~파괴개선록~{ディストラクション ~破壊凱旋録~}(1983년 12월 10일)
- 히구치 무네타카 with dream castle~free world{樋口宗孝 with dream castle~free world} (1997년 2월 21일)
- MUNETAKA HIGUCHI DRUM COLLECTION(2006년 8월 23일)
5.2. 프로듀싱 작품
- 하마다 마리「LUNATIC DOLL」、「Romantic Night」
- Blizard - Show Me The Way(1988)
- COZY POWELL FOREVER ~ TRIBUTE TO COZY POWELL(1998년 9월 19일)
5.3. 레코딩 참가
- 아타카 미하루「IMAGE DOWN」(原曲:BOØWY)
- ANIMETAL 싱글「アニメタルサマー」
- JAM Project「疾風になれ」、「CRAZY REVOLUTION」、「TORNADO」
- 하마다 마리「LUNATIC DOLL」、「Romantic Night」
- 마에다 노부테루(TUBE)「Feel Me」「SMASH」「GAMBLE」
- 마츠모토 타카히로(B'z)「Thousand Wave」、「Rock'n Roll Standard Club」
[1] 니이하라와 이시하라 모두 EARTHSHAKER 출신이다.[2] 다만 실제로 모이기 시작한 것은 1997년이고, 재결성 이후 사실상 리더는 프로듀서 역할을 겸하던 이노우에 슌지가 맡았다고 봐도 무방했다.[3] 준지의 경우는 LUNA SEA의 신야의 제자다. 인디즈 시절에 루나씨의 로디도 했었다고.[4] 하야미 쇼와 같은 해에 태어났는데, 히구치의 생일이 4개월 늦다.[5] 잼 프로젝트 한정 활동.[6] 위키피디아에서는 '1곡만이라면 난 하지 않아' '나 이외의 녀석이 들어가는 건 설령 리듬머신이라도 용서못해' '다른 사람과 같이 취급받는게 싫은거야' 라고 했다고도 한다.[7] 원곡은 1980년대 초에 발표된 感じてナイ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