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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52년 인도 총선 | |||||||||
선거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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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일 | 1951년 10월 25일 ~ 1952년 2월 21일 | |
선출 대상 | 로크 사바(하원) 의원 총 499석 일반 의원 314석 카스트 및 소수민족 의원 175석 대통령 임명 의석 10석 | |
투표율 | 61.2% | |
선거 결과 | ||
▼ | ||
<rowcolor=#006E46,#ff671f> 정당 | 의석수 | 비율 |
[[인도 국민 회의| 인도 국민회의 ]] | 364석 | 72.9% |
그 외 정당 | 88석 | 17.6%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37석 | 7.4% |
대통령 임명 의원 | 10석 | 2.0% |
1. 개요
1951년부터 1952년까지 치러진 인도의 총선거. 1951년 10월 25일부터 이듬해 2월 21일까지 총 105,950,083(투표율 61.2%)명이 투표해 총 489명[1]의 초대 로크 사바 의원을 선출하였다.인도 독립 이후 처음으로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였다.
2. 설명
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함에 따라 1949년 11월 26일 신헌법이 채택되었고, 이 헌법에 따라 1951년 첫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헌법의 개정에 따라 인도의 의회 제도도 크게 변하였는데, 1945년까지는 일종의 자치의회인 중앙 입법 의회(Central Legislative Assembly)가 하원 기능을 맡았다면 1949년 헌법은 로크 사바(Lok Sabha, 직역하자면 국민원)가 하원의 기능을 하도록 명시했다. 102명만을 제한적으로 선출하였던 중앙 입법 의회와 달리 로크 사바는 489명의 의원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도록 하였으며, 지위 고하와 남녀에 상관 없이 투표할 수 있도록 하는 보통 선거제도가 처음으로 자리잡았다.314명은 소선거구제에 따라 선출했으나, 175명의 의원은 86개의 선거구에서 2명씩 선출하였다. 175명은 소수인종 및 하위 카스트를 위한 특별 의원으로 배정되었다. 또, 10명의 의원은 인도 정부에서 지명하도록 하였다.
새 헌법에 따른 초대 국회의원 선거였던만큼 행정적으로 여러 시행착오가 있었다. 우선 인도가 자력으로 치르는 첫번째 국회의원 선거였던데다가, 처음으로 치러지는 보통선거였던만큼 유권자 명부를 짜는 것부터 수년이 걸렸다. 거의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려 철저한 인구조사를 통해, 총 1억 7천만명에 달하는 인도 국민들을 유권자로 등록시켰는데, 이는 당시 가장 많은 사람이 유권자로 등록된 선거 기록을 세우는 것이었다.
또 선거를 치르는 것 자체도 힘들었는데, 당시 인도 정부의 행정력으로는 인도의 방대한 국토를 아울러 동시 선거를 치루게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인도 정부는 총 68번에 걸쳐 각 지역에서 따로 따로 투표를 진행하였고, 선거 기간도 총 4달이나 걸렸다. 1951년 10월 25일 처음으로 투표가 시작되어, 그 다음해 2월 21일에서야 겨우 투표가 끝났다.[2]
3. 선거 결과
<rowcolor=#fff> 초대 로크사바 의원 선거 결과 | |||||
<rowcolor=#000,#fff> 정당 | 당수 | 득표수 | 득표율 | 의석수 | |
인도 국민회의 | 자와할랄 네루 | 47,665,951 | 44.99% | 364석 | |
인도 공산당 | 아자이 쿠마르 고시 | 3,487,401 | 3.29% | 16석 | |
인도 사회당 | 나렌드라 데바 | 11,216,719 | 10.59% | 12석 | |
농민노동자인민당 | J. B. 크리팔라니 | 6,135,978 | 5.79% | 9석 | |
인민민주전선 | 집단 지도 체제 | 1,367,404 | 1.29% | 7석 | |
기타 정당[3] | 19,226,541 | 18.15% | 44석 | ||
무소속 | 16,850,089 | 15.90% | 37석 | ||
대통령 지명 의석 | 잠무 카슈미르 대표의원 | 6석 | |||
영국계 인도인 대표의원 | 2석 | ||||
아삼 원주민 대표의원 | 1석 | ||||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 대표의원 | 1석 | ||||
<rowcolor=#000,#fff> 계 | 유권자 수 | 173,212,343 | 투표율 61.17% | ||
<rowcolor=#000,#fff> 총 득표수 | 105,950,083 |
3.1. 인도 국민회의
선거를 치르게 하는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던 반면, 자와할랄 네루 총리에 대한 민중의 압도적인 지지 때문에 선거 결과는 별다른 이변 없이 끝았다. 여당 인도 국민회의는 45%를 득표, 499석 중 364석을 차지해 단독 개헌선을 확보했다. 제2당인 공산당과는 340석 넘게 차이나는 압승이었다.인도 국민회의의 압승으로 인하여 초대 로크사바에는 인도국민회의 외의 공식적인 교섭단체가 없게 되었다.[4]
3.2. 그 외 정당
제2당인 인도 공산당은 케랄라 주와 서벵골 주를 중심으로 3.29%를 득표해 16석을 확보했다. 한편, 저명한 독립운동가 자야프라카시 나라얀[5]이 이끈 인도사회당은 10.59%를 득료해 국민회의에 이은 득표율 2당의 지위를 차지했지만 12석에 그쳐 참패했다. 무소속 의원은 37명이 당선되었다.불가촉천민 권리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가 인도공화당 소속으로 봄베이 노스센트럴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근소한 차이로[6] 국민회의 후보에게 패배했다. 암베드카르는 이후 라자사바(상원) 의원으로 지명되었다. 그는 1954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했으나 또 패배했고 얼마 안가 사망해 생애에 하원의원으로 재직한 경력이 없게 되었다.
4. 정부 구성
잡음 없이 자와할랄 네루가 의회에서 압도적 동의를 얻어 초대 총리로 선출되었다. 초대 국회의장으로는 국민회의 소속인 가네시 바수데브 마발란카르가 당선되어 1956년까지 재임하였다.5. 같이 보기
[1] 대통령 임명 의원 10석을 포함해 의석 정원은 499석[2] 현재도 인도는 전국단위 선거를 1달에 걸쳐 나눠서 한다.[3] 5석 이하 획득 정당[4] 인도에서 교섭단체 요건은 의회의 10% 이상 의석 차지로 한국에 비해 약간 더 높은 편이다. 당시에는 49석이었는데, 제1야당인 인도 공산당의 의석이 16석에 불과했다. 참고로 1977년까지 이 요건을 충족하는 정당이 인도국민회의 외에 없었다.[5] Jayaprakash Narayan. 한국에는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민중의 양심"이라 불린, 인도에서 안창호+장준하 급의 위상을 가진 독립운동가로, 마하트마 간디의 수제자로 유명하다. 후일 인디라 간디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에도 투신했다.[6] 국민회의 후보 52.3%, 암베드카르 4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