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font-size: 0.92em; letter-spacing: -0.85px; word-break: keep-all" {{{#!wiki style="font-size:0.90em" | 전후기리그 | 단일리그 | |||||||||
1973년 | 1974년 | 1975년 | 1977년 | 1979년 | 1980년 | 1981년 | 1982년 | 2004년 | 2005년 | 2006년 | |
1976, 1978년엔 한큐 브레이브스의 전후기 통합우승으로 플레이오프가 개최되지 않았다. 2007년부터는 클라이맥스 시리즈로 개정. |
1975년 퍼시픽리그 우승 | |
한큐 브레이브스 | |
플레이오프 MVP | 나가이케 토쿠지 |
1. 개요
한큐 브레이브스 | 킨테츠 버팔로즈 |
전기: 38승 25패 6무 (.603, 우승) | 전기: 31승 30패 4무 (.5081, 3위[1]) |
후기: 26승 34패 5무 (.433, 6위) | 후기: 40승 20패 5무 (.667, 우승) |
종합: 64승 59패 7무 (.520, 2위) | 종합: 71승 50패 9무 (.587, 1위) |
1974년 10월 15일부터 10월 20일까지 개최된 제3회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 전기 우승팀 한큐 브레이브스와 후기 우승팀 킨테츠 버팔로즈가 맞붙어 한큐가 3승 1패로 킨테츠를 꺾고 3년 만에 통산 6번째 퍼시픽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전임 니시모토 유키오의 지휘 하에 전성기를 개막한 우에다 토시하루 감독의 한큐와 니시모토가 새롭게 이끄는 킨테츠가 맞붙는 일명 사제(師第) 시리즈로 주목받은 플레이오프로, 한큐는 지난 해까지 정규 시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도 플레이오프에서 2년 연속으로 밀려나 우승에 실패했던 굴욕을 이 해 완벽히 씻어냈다. 킨테츠는 플레이오프에서 아쉽게 패퇴했지만 정규 시즌 1위까지 달성하며 그동안 최약체팀으로 놀림받던 이전의 모습에서 완벽히 벗어난 모습을 보여줬다.
이 해부터 퍼시픽 리그가 지명타자 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에 처음으로 10인 선발 체제로 개최된 포스트시즌[2]이자, 후지이데라 구장에서 처음으로 개최된 포스트시즌 경기이기도 하다.
2. 일정 및 결과
경기 | 날짜 | 경기장 | 원정팀 | 점수 | 홈팀 | |
1차전 | 10월 15일(수) |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 킨테츠 버팔로즈 | 11 | 7 | 한큐 브레이브스 |
2차전 | 10월 16일(목) | 킨테츠 버팔로즈 | 4 | 5 | 한큐 브레이브스 | |
3차전 | 10월 19일(일)[3] | 후지이데라 구장 | 한큐 브레이브스 | 3 | 0 | 킨테츠 버팔로즈 |
4차전 | 10월 20일(월) | 한큐 브레이브스 | 5 | 3 | 킨테츠 버팔로즈 | |
우승: 한큐 브레이브스 |
2.1. 1차전
1975.10.15(수) |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관객 수: 14,000명) | |||||||||||||||||||||||||||||
<rowcolor=#ca252b>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
킨테츠 | 스즈키 케이시 | 0 | 2 | 0 | 2 | 0 | 7 | 0 | 0 | 0 | 11 | 17 | 1 | ||||||||||||||||
한큐 | 아다치 미츠히로 | 2 | 0 | 1 | 0 | 1 | 0 | 2 | 0 | 1 | 7 | 10 | 0 |
승리투수: 시바이케 히로아키(1승): 4.2이닝 3탈삼진 4피안타 2사사구 3실점(1자책)
패전투수: 야마다 히사시(1패): 5.1이닝 3탈삼진 8피안타 5사사구 7실점(7자책)
홈런
아리타 슈조(2회 초, 2점), 이세 타카오(6회 초, 만루) 1호
바비 마르카노(1회 말, 2점), 오쿠마 타다요시(5회 초, 1점) 1호
타격전의 진수를 보여준 경기로, 5회까진 한 쪽이 리드를 잡으면 바로 다른 한 쪽이 동점으로 따라잡으며 4:4 스코어로 흘러갔으나 6회 초에 킨테츠가 4회 초 도중 등판한 야마다 히사시의 투구 난조를 놓치지 않고 2회 초 동점 투런을 쏘아올렸던 아리타 슈조의 적시타를 시작으로 1사 만루에서 이세 타카오[4]가 만루 홈런을 쏘아올리고 3연타로 추가 득점까지 뽑으며 단번에 7점을 내고 경기의 흐름을 완전히 잡아냈다.
한큐는 7회와 9회에 3점을 뽑으며 어떻게든 쫓아갔으나 결국 야마다의 대량 실점을 만회하지 못하면서 킨테츠가 첫 포스트시즌 경기에서 승리를 거뒀다.
2.2. 2차전
1975.10.16(목) |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관객 수: 10,500명) | |||||||||||||||||||||||||||||
<rowcolor=#000000>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
킨테츠 | 칸베 토시오 | 3 | 0 | 0 | 0 | 1 | 0 | 0 | 0 | 0 | 4 | 12 | 1 | ||||||||||||||||
한큐 | 야마구치 타카시 | 0 | 0 | 1 | 0 | 0 | 1 | 1 | 2 | X | 5 | 10 | 0 |
승리투수: 야마구치 타카시(1승): 9이닝 5탈삼진 12피안타 5사사구 4실점(4자책)
패전투수: 칸베 토시오(1패): 7.2이닝 1탈삼진 10피안타 무사사구 5실점(5자책)
홈런
바비 마르카노 2호(6회 말, 1점), 카와무라 켄이치로(7회 말, 1점), 나가이케 토쿠지(8회 말, 2점) 1호
없음
킨테츠가 1회 초부터 야마구치 타카시를 공략하며 3실점을 뽑아냈고, 칸베 토시오도 3회에 후쿠모토 유타카에게 1타점 적시타를 허용한 것을 빼면 5회까지 한큐 타선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여기서 한큐는 야마구치를 조기 강판시키는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었으나, 우에다 토시하루 감독은 오히려 야마구치가 아닌 포수 나카자와 신지를 카와무라 켄이치로로 교체하며 야마구치에 대한 믿음을 보여줬다.[5]
그리고 이 선택이 적중한 듯 야마구치는 5회 초 시마모토 코헤이에게 1타점 적시타를 맞은 것을 제외하면 2회부터 9회까지 12안타를 맞고도 꾸역꾸역 버텨냈고, 타자들도 끝까지 버틴 야마구치에게 답하듯 5회 이후에도 계속 던지던 칸베를 상대로 바비 마르카노와 앞서 언급한 카와무라 켄이치로가 6, 7회 말에 솔로포를 뽑으며 점수차를 줄이다 8회 말에 주포 나가이케 토쿠지가 역전 투런을 뽑아내며 한큐가 극적인 역전승으로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2.3. 3차전
1975.10.19(일) | 후지이데라 구장 (관객 수: 32,000명) | |||||||||||||||||||||||||||||
<rowcolor=#000000>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
한큐 | 야마구치 타카시 | 0 | 1 | 2 | 0 | 0 | 0 | 0 | 0 | 0 | 3 | 9 | 0 | ||||||||||||||||
킨테츠 | 스즈키 케이시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3 | 0 |
승리투수: 아다치 미츠히로(1승): 9이닝 4탈삼진 3피안타 무사사구 무실점 완봉승
패전투수: 스즈키 케이시(1패): 2.2이닝 0탈삼진 5피안타 무사사구 3실점(3자책)
홈런
나가이케 토쿠지 2호(3회 초, 2점)
없음
1차전에서 선발로 나온 아다치와 스즈키가 그대로 선발로 나섰다. 한큐는 2, 3회 초에 각각 모리모토 키요시의 적시타와 나가이케 토쿠지의 투런으로 3점을 뽑으며 스즈키를 2.2이닝만에 넉아웃시켰고, 수비에선 아다치 미츠히로가 9회 내내 단 3안타만 내주는 완벽한 투구로 완봉승을 거두면서 한큐가 리그 우승까지 단 1승만을 남겨놓게 되었다.
2.4. 4차전
1975.10.20(월) | 후지이데라 구장 (관객 수: 21,000명) | |||||||||||||||||||||||||||||
<rowcolor=#000000>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
한큐 | 야마구치 타카시 | 2 | 0 | 0 | 0 | 0 | 1 | 0 | 0 | 2 | 5 | 9 | 1 | ||||||||||||||||
킨테츠 | 이모토 타카시 | 0 | 0 | 0 | 0 | 0 | 3 | 0 | 0 | 0 | 3 | 7 | 1 |
승리투수: 야마구치 타카시(2승): 9이닝 3탈삼진 7피안타 1사사구 3실점(1자책) 완투승
패전투수: 시바이케 히로아키(1승 1패): 4이닝 3탈삼진 3피안타 3사사구 2실점(2자책)
홈런
후쿠모토 유타카, 카토 히데지 1호(9회 초, 1점)
없음
운명의 4차전에서 한큐는 야마구치의 무실점 투구와 함께 1회 초부터 나가이케 토쿠지, 쇼가키 야스히로의 적시타로 2점을 뽑아낸 데 이어 6회 초엔 바비 마르카노의 희생 플라이로 리드를 3점까지 벌렸다. 그러나 킨테츠도 직후인 6회 말에 야마구치 타카시에게 무사 만루를 잡아내고 사사키 쿄스케의 2타점 적시타, 니시무라 슌지의 스퀴즈 번트로 동점을 만들어냈다.
이후 8회까지 점수가 안 나오다가 9회 초에 후쿠모토 유타카와 카토 히데지가 솔로포를 터뜨리며 한큐가 다시 리드를 잡았고, 6회 동점을 제외하면 점수를 안 내준 채 완투 행진을 벌이던 야마구치가 9회 말에도 등판해 킨테츠 타선을 무실점으로 막으면서 연속 완투승과 함께 팀의 3년 만의 리그 우승을 자신의 손으로 확정지었다.
2.5. 타이틀 시상
- 최우수선수상(MVP):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5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00000; font-size: 0.8em"
한큐
}}} 나가이케 토쿠지- 감투상: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5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ca252b; font-size: 0.8em"
킨테츠
}}} 아리타 슈조- 수위타자상, 우수선수상: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5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00000; font-size: 0.8em"
한큐
}}} 바비 마르카노- 기능상: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5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00000; font-size: 0.8em"
한큐
}}} 아다치 미츠히로- 우수투수상: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5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00000; font-size: 0.8em"
한큐
}}} 야마구치 타카시3. 기타
- 한큐 브레이브스는 이 우승으로 역대 최저승률(.520) 및 최소승수(64승) 리그 우승팀이라는 타이틀을 얻었고, 뒤이어 일본시리즈까지 제패하며 첫 일본 제일의 영광과 함께 역대 최저승률 및 최소승 일본시리즈 진출 및 우승팀이란 타이틀까지 얻었다. 이 중 리그 기록은 1982년 주니치 드래곤즈가 승수 타이 기록을 세운 것을 빼면[6]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고[7], 일본시리즈 기록은 2024년에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71승, .507)가 경신했다. 경기수가 143경기로 늘어나고 클라이맥스 시리즈 도입 후에도 리그 순위를 그대로 인정하는 현행 제도상 한큐의 리그 기록은 특별한 상황이 없는 이상 깨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8]
- 킨테츠 버팔로즈는 정규시즌 1위를 기록하고도 플레이오프에서 패퇴하는 굴욕을 안았으나, 2위로 맞이한 4년 뒤의 재대결에서 한큐를 누르며 순위가 뒤바뀐 4년 전의 복수를 달성했다.
다만, 이때와는 달리 1979년과 1980년엔 포스트시즌 경기를 난카이 호크스의 홈구장 오사카 구장을 빌려 개최했다.
- 킨테츠는 이 플레이오프에서 우승 시 일본시리즈도 후지이데라 구장에서 개최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다만 당시 후지이데라 구장엔 조명시설이 없어서 일본시리즈 개최 규정인 '3만명 이상의 야간경기를 개최할 수 있는 구장'에 맞지 않았고 대체 구장으로 쓰던 일본생명 구장도 관중수용량이 2만여명에 불과해서 마찬가지로 규정에 어긋났는데, 실제로 상술했듯 1979년과 1980년에 이 이유로 오사카 구장을 빌려 포스트시즌 경기를 진행한 것을 보면 규정 미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 했는지는 불명.
- 앞서 서술한 리그 성적을 보면 알겠지만, 한큐는 전기에서 준수한 성적으로 우승을 해놓고 후기에서 꼴찌로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종합 2위에 그쳤다. 만약 1975년 시즌이 단일리그로 진행됐다면 놀림감이 될 DTD가 생겨났을 수도.
[1] 당시 전기 2위였던 타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에게 불과 3모 차로 밀려 3위를 차지했다.[2] 단, 일본시리즈에서는 1984년까지 지명타자 제도를 적용하지 않다가 1985년 일본시리즈부터 격년제로 지명타자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고, 1987년부터 리그 홈구장에 따라 지명타자 유무를 정하는 현행 체제가 확립됐다.[3] 본래 10월 18일에 개최 예정이었으나 우천으로 하루 연기.[4] 2008~2009년에 SK 와이번스에서 타격코치를 맡았다.[5] 이 포수 교체는 이나오 카즈히사의 4연승 역스윕으로 유명한 1958년 일본시리즈 4차전에서 초반에 공략당한 이나오를 미하라 오사무 감독이 강판시키는 게 아닌 포수를 교체해 다시 투구 컨디션을 되찾고 역전승 및 역스윕까지 잡는 데 성공한 일화를 떠올린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6] 단 승률은 주니치가 .577(64승 47패 19무)로 더 높다. 1980년대까지의 일본프로야구는 경기 시간이 3시간이 넘어갈 경우 9회, 혹은 연장전 도중 그 3시간이 넘어간 이닝에서 경기를 마치도록 했기 때문에 무승부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고, 이 환경을 잘 이용하면 적은 승수로도 무승부를 많이 잡아서 상위권을 노릴 수 있었기 때문.[7] 참고로 정규시즌 1위인 리그 우승팀의 기록은 1973년 요미우리 자이언츠(66승, .524)가 보유하고 있다.[8] 실제로 코로나19 때문에 경기수가 120개로 줄어든 2020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63승을 기록한 시점에서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에 남은 9경기에서 1승 이하만 거둘 시 타이 혹은 신기록을 수립할 수도 있었으나, 남은 9경기에서 4승 4패 1무를 거두면서 실현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