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에 발발한 전쟁에 대한 내용은 남오세티야 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
1. 개요
1991~1992년 조지아와 남오세티야 분리주의자 사이에서 1년간 일어난 전쟁. 조지아 내전의 일부다.2. 배경
러시아 제국이 무너진 후 조지아인은 조지아 민주공화국을 세워 독립했다. 반면에 오세트인은 소비에트 러시아와 동맹하여 조지아와 전쟁을 벌였다. 처음에 조지아에 우세했던 전쟁은 1921년 소비에트-조지아 전쟁으로 조지아가 패망함으로써 끝났다. 러시아는 협력에 대한 보답으로 이듬해 그루지야 SSR 산하의 남오세티야 AO(자치주)를 세워주었다. 하지만 볼셰비키의 경계선 확립으로 양측에 다수의 조지아인/오세트인 민족월경지가 발생했으며 특히 남오세티야 AO의 주도 츠힌발리는 조지아인 다수지였다. 이는 훗날 조지아인-오세트인 민족분규의 원인이 된다.오세트인은 처음부터 그루지야 SSR의 일개 자치주로 편입된 것 자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러므로 자연스레 오세트 민족주의는 다른 SSR의 민족주의와는 달리 압하스 민족주의와 마찬가지로 친소 성향을 띠게 되었다.[1] 1988년 창설된 최초의 오세트인 민족주의 조직 아데몬 느하스(Адемон Ныхас)는 조지아로부터의 분리를 주장했고, 1989년 11월 10일 남오세티야 AO 정부도 남오세티야를 "자치공화국"으로 전환하는 결정을 내렸다. 당연히 그루지야 SSR 중앙정부는 남오세티야의 결정을 반려하였다. 1989년 11월 23일에는 조지아인과 오세트인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벌어졌다.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는 츠힌발리 거주 조지아인들의 반소 민족주의 시위를 조직했다. 그러나 친소적인 오세트인은 여기에 협조하지 않고 도로를 막아서 시위 조직을 방해했다. 이때 조지아인과 오세트인 사이에서 격렬한 충돌이 일어나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루지야 SSR이 독립을 위한 정책을 연이어 추진하면서 그루지야 SSR과 남오세티야 AO 간의 갈등도 점차 골이 깊어졌다. 그루지야 SSR 최고소비에트(Supreme Soviet)는 1990년 3월 특별회기에서 소비에트-조지아 전쟁을 소비에트 러시아에 의한 점령이자 병합이라고 비난하는 결의안을 가결했고 5월에는 주권선언(Declaration of state sovereignty)을 가결하여 사실상 독립을 공식화했다. 그루지야 SSR 정부 또한 소비에트-조지아 전쟁을 "불법적인 점령"이라고 공식 규탄하였고 1990년 10월에 공화국 최초의 다당제 선거를 치를 것이라고 선언했다. 11월 14일에는 공식적으로 국명이 그루지야 SSR에서 조지아 공화국(Republic of Georgia)으로 변경되었다. 조지아 중앙정부의 행보에 대한 대응으로 남오세티야 AO 소비에트는 9월 11일 그루지야 SSR로부터의 독립, 남오세티야 소비에트 민주 공화국(South Ossetian Soviet Democratic Republic) 선포 및 소련 잔류를 선언했다. 이에 조지아의 반체제 인사들은 소련 정부가 오세트인의 분리주의를 이용해 조지아의 소련 잔류를 강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1990년 10월 28일 그루지야 SSR 최초이자 마지막 자유총선이 실시되어 친독립 정당의 연합이 의석의 다수를 차지했으며 감사후르디아는 최고소비에트 의장이 되었다.[2] 남오세티야 AO는 조지아의 총선을 보이콧하고 남오세티야 자체 국회를 조직하기 위한 투표를 조직했다. 이에 감사후르디아는 12월 11일 남오세티야의 자체 투표를 불법이라고 선언하고 남오세티야 AO의 자치주 지위를 박탈했다.
1991년 3월 31일 조지아 공화국은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국민투표를 하여 98.9%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4월 9일 조지아 최고회의가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5월 26일 대선에서는 조지아 최고회의 의장이었던 감사후르디아가 압도적인 지지율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동안 남오세티야 일대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상에 사로잡혔다. 1990년 말 츠힌발리에서는 조지아인과 오세트인 준군사조직에 의한 다수의 약탈 및 폭력 사태가 기록되었다. 1990년 12월 12일에는 츠힌발리에서 차를 몰던 괴한들이 조지아인들에게 기관단총을 갈겨 조지아인 3명을 살해하고 2명을 부상 입히는 일이 있었다. 이에 조지아는 남오세티야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조지아 내무부(MVD) 및 국가보안부(KGB) 소속 부대들을 급파했으며 내무부 부대 지휘관을 츠힌발리 시장으로 임명했다. 오세트인들은 츠힌발리 시내에 바리케이드를 세워 조지아 정부에 저항할 준비를 갖췄으며 이듬해 1월 초 다수의 조지아인 민병대원들을 살해했다.
3. 전쟁
조지아는 1991년 1월 5일 밤 조지아 내무군 및 방위군(National Guard) 3천명을 츠힌발리 시내로 증원하고 남오세티야에 경제적 봉쇄를 가해 츠힌발리로 통하는 도로를 차단했다. 이날이 1991~1992년 남오세티야 전쟁의 개전일로 여겨진다. 오세트인들도 남오세티야 내 조지아인 마을들을 고립시켰다.조지아군이 증원된 후 츠힌발리에서 3주간 시가전이 벌어졌다. 시내는 오세트인이 통제하는 서부와 조지아인이 통제하는 동부로 쪼개졌다. 1월 7일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소련 내무부 병력을 제외한 모든 무장조직의 츠힌발리 철수를 명령했으며 이는 조지아군도 철수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고르바초프는 한발 더 나아가 아예 조지아로부터의 남오세티야 독립을 선언했으며 이에 조지아 최고회의는 고르바초프가 내정간섭을 벌인다고 규탄했다. 1월 25일 소련군의 중재로 조지아군은 도시 주변의 언덕으로 철수했지만 봉쇄는 유지되었다. 이후 조지아 내무군 병력은 츠힌발리에서 철수했다.
1월 30일 츠힌발리 시내에 바리케이드가 다시 세워졌고 이튿날 소련군 병력이 바리케이드를 허물려고 하자 공격을 당했다. 조지아측에 따르면 오세트인이 조지아인 소유 가옥에 방화하고 마을 주변을 포위했으며, 남오세티야측에 따르면 조지아측이 고지에서 시내를 포격했다. 츠힌발리 시내에 산발적인 교전이 발생하자 2월 소련군 부대는 츠힌발리 시내를 순찰했다.
남오세티야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대체로 정적이었다. 조지아군은 츠힌발리 시외의 고지를 점령하고 도시를 포위했으며 인근 마을과 도로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가장 치열한 시기는 1991년 3월과 4월이었다. 1991년 3월 23일 보리스 옐친은 조지아 북동부 카즈베기에서 감사후르디아를 만나 남오세티야 내 소련군 철수 및 조지아와 러시아의 공동 경찰 창설을 통한 역내 안정화에 합의했다. 3월 24일 임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SFSR 최고회의는 이 안건을 거부했다.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는 소련 지도부가 남오세티야의 분리주의를 조장하여 조지아의 분리독립을 막으려 한다고 비난했다.
1991년 4월 조지아는 독립을 선포했다. 5월 분쟁 해결을 위한 조지아-남오세티야-소련-러시아간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후 8월까지 대체로 평화로운 상태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9월 교전이 재발했고 감사후르디아는 조지아 방위군의 남오세티야 재진주를 명령했다. 그러나 조지아군은 감사후르디아에 대한 반감이 심했으므로 실제로는 몇개 부대만이 명령을 따랐으며 그마저도 남오세티야의 민병대에 격퇴되었다. 감사후르디아는 1991년 12월 쿠데타로 축출되었고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가 새로운 조지아 대통령이 되었다. 조지아 내에서는 감사후르디아 지지파가 다시 무장 투쟁을 하면서 상황이 꼬였다. 여기에다가 압하지야의 분리주의 세력도 들고 일어나자 압하지야와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조지아는 사실상 양면전쟁을 수행하는 상황에 빠졌다.
4. 결말
전쟁이 걷잡을 수 없게 커지자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은 전쟁을 중단하기로 결정하였고 셰바르드나제가 1992년 6월 24일에 소치 협정에 서명하면서 1991~1992년 남오세티야 전쟁은 막을 내렸다.이후 남오세티야는 독립된 주권을 확보하여 조지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미승인국가로 남게 되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성공은 했지만 이후 전략적으로 엄청나게 손해를 본 전쟁이다. 조지아 내전에 러시아가 개입한 것을 보면서 동유럽 국가들이 앞다퉈 NATO에 가입하기 시작했다.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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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0년대 소련 내의 민족주의에서 각 SSR의 민족주의가 반소 성향을 띠었다면, 그 SSR 산하의 ASSR이나 AO는 대체로 친소 성향을 띠었다. 즉 자기가 어느 나라의 바로 하위 행정구역으로 편성되었느냐에 따라 소련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다만 러시아 SFSR의 ASSR들은 서로 이질적인 소수민족들을 하나로 묶거나(다게스탄), 러시아인이 절반을 넘거나(부랴트, 코미, 카렐리야, 모르도바), 인구밀도가 너무 낮아서 독립을 위한 결집이 불가능하거나(야쿠트), 다른 SSR 또는 소련 이웃국가와 접경하지 않거나(타타르스탄) 등등 여러 이유로 반러 성향이 상대적으로 옅거나 반러 운동이 성과를 거두기 힘들었다. 물론 체첸처럼 아예 독립전쟁을 벌이거나 타타르스탄과 카바르디노발카리야처럼 중앙정부와 협상하여 자치권을 대폭 확대한 경우도 있다.[2] 감사후르디아의 의장 임기가 시작된 11월 14일부터 그루지야 SSR 최고소비에트는 최고회의(Supreme Council)로 승계된다. 감사후르디아가 몰락한 뒤인 1992년 3월, 차기 총선까지 국가의 임시 통치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국무원(State Council)이 창설되어 최고회의의 역할을 대신했으며, 국무원은 조지아 국회(Parliament, 현행) 창설에 관한 법안을 통과한 후 동년 10월 16일 자진 해산했다. 따라서 이하로는 조지아 최고회의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