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19:03:42

ADSL

유선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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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원리4. 대한민국에서의 보급5. 문제점6. 후속 기술7. 2010년대 이후의 ADSL8. 관련 문서

1. 개요

Asymmetric Digital Subscriber Line, 비대칭 디지털 가입자 회선

전화선을 사용하여 고속으로 데이터 통신을 할 수 있는 기술인 DSL(Digital Subscriber Line)중 하나이다. 음성 전화와는 별개의 주파수 대역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이름의 비대칭답게 다운로드 회선에 더 많은 대역폭을 할당한 것이 특징이다.

2. 역사

1988년 미국의 벨코어 사가 VOD(주문형 비디오) 서비스를 위해 개발한 기술이다. VOD 서비스에서는 업로드 속도가 빠를 필요가 없기 때문에 ADSL은 업로드 속도보다 다운로드 속도가 빠른 비대칭형 방식이다. 그러나 통신망을 구축하는 데 큰 비용이 들었던 것은 물론이고 이 당시에는 동영상 재생이 가능할 정도로 고사양인 컴퓨터는 전문가와 일부 기술자들이나 만질 수 있었고, 일반 대중들을 상대로 판매되던 PC의 사양이 동영상을 재생하기에는 너무 부족했다. 1988년 당시 PC 환경은 8비트에서 16비트로 넘어가던 시절이었는데, 당시 많이 쓰이던 16비트 PC인 IBM PC XT에서는 동영상은 고사하고 녹음된 PCM 파일도 재생이 어려웠고, 정지된 이미지 파일 한 장도 많은 색상으로 출력할 수 없었다. 거기다 동영상을 압축하는 코덱 기술도 전무했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그야말로 혁신적으로 빠른 속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상용화에 실패했다. 그렇게 몇 년간 묻혀 있다가 1990년대 후반 전 세계적으로 초고속 인터넷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ADSL이 다시 각광을 받게 되었다.

ADSL은 1990년대 후반 대한민국초고속 인터넷을 전 국민에게 보급한 역사적 기술이며, 2000년대 대한민국을 IT 정보화 강국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한 일등 공신이라 할 수 있다. 또 당시만 해도 세계 최초로 상용화 시키는 일이었기에 당시 개발자들은 맨땅에 헤딩하는 정도의 공밀레 작업을 하였다.

3. 원리

아날로그 유선 전화구리선 두 가닥이 서로 꼬여 있는 형태로 된 연선(撚線, Twisted Pair)으로 전화국에서 집이나 회사에 설치된 전화기까지 연결되는 구조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런 아날로그 전화망에서 음성을 전달하는 데 사용하는 주파수 대역폭은 300Hz에서 3400Hz 사이의 3kHz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구리로 되어 있는 선은 그 이상의 주파수로 된 전기신호도 전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남는 주파수 영역을 활용하여 넓은 주파수 대역폭으로 통신을 하게 되면 기존의 전화선 모뎀에 비해 고속의 데이터 전송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클로드 섀넌의 정보이론에 따르면, 대역폭은 정보를 실어나를 수 있는 능력과 양의 상관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DSL 방식의 기초 아이디어이다.

ADSL은 DMT(Discrete Multi-Tone)라는 변조방식을 사용하여 디지털 데이터를 아날로그 신호로 변환한다. 보통 25kHz에서 2000kHz 사이를 사용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고주파 신호는 스플리터(Splitter)에서 저주파 신호(전화통화 음성 신호)와 합쳐져서 구리선을 타고 전송된 뒤, 전화국 또는 집에 있는 스플리터에서 다시 분리되어 처리된다. 이 덕분에 DSL 서비스에서는 전화선 모뎀과 달리 전화를 사용하면서도 동시에 인터넷을 할 수 있다. 스플리터가 필요 없는 UADSL이라는 기술도 나왔지만, 속도가 느려서 국내에서는 묻힌 듯하다.

단, 주파수가 높아질수록 신호가 전달되는 거리는 짧아진다. 소리로 예를 들자면, 낮은 소리는 매우 멀리까지 퍼져나갈 수 있지만 높은 소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xDSL 서비스를 쓰려면 전화국과 집 사이의 거리가 수킬로미터 이내여야 하는 제약이 생기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건물이나 주변 전신주에 xDSL 장비를 갖다 놓되 전화국과 xDSL 장비 사이는 광 케이블 등으로 통신하고, xDSL 장비와 단말기 사이만 xDSL 기술로 통신하는 방식이 주로 사용되었다. 특히 VDSL 같은 경우에는 이 방법이 사실상 필수적이다. 아파트 거주자가 많은 대한민국에서는 아파트 지하에 장비를 설치하여 해당 아파트 건물 전체에 이런 방식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가 보편적이다.

4. 대한민국에서의 보급

대한민국에서 전화선 모뎀PC통신의 시대를 거쳐, KT[1]하나로통신(현 SK브로드밴드) 등을 통한 초고속 인터넷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은 1999년부터였다.

원래는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통신(현 KT)에서 미국에서와 같은 VOD 서비스 용도로 시범 서비스를 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통신은 ADSL은 뒷전으로 미뤄두고 속도가 사실상 전화 모뎀과 다를 바 없는 ISDN을 인터넷 전용선의 주류로 밀고 있었다. IDSN의 최대 전송 속도는 64kbps로, 모뎀의 최고 속도인 56kbps보다 고작 8kbps 빨랐다. ISDN 회선을 2개 물려서 두 배의 속도인 128kbps를 제공하는 서비스도 있었지만 요금도 2배인데다가 전화 요금과 똑같이 종량제로 받고 있었다.[2] 그래도 당시 기준에서야 화상통화를 하거나 동영상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빨랐다고는 하지만 이걸 즐길 수 있다 해도 당시 기준으로도 상당한 저화질이었고, 부유층이나 전문가, 일부 회사원 정도나 즐길 수 있을 따름이었다. 정액제 서비스 조차 PSTN보다 2년 늦었다.[3]

결국 대한민국에서 ADSL은 1999년 4월 1일 제2시내전화사업자로 선정된 하나로통신(현 SK브로드밴드)이 최대 56Kbps(=7KB/s)가 고작인 전화선 모뎀의 약 142배인 최대 8 Mbps(=1MB/s)라는 압도적인 속도를 내세워 본격적으로 정식 서비스를 하면서 보급되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가격도 한 달에 3만 원 남짓한 정액제였기 때문에 보급은 시간 문제였다.

2010년대에 100 Mbps급의 초고속 인터넷을 넘어 기가 인터넷이 전국에 구축되고 10기가 인터넷이 전국에 구축되는 2020년대에는 8 Mbps는 별 것 아닌 속도이지만, 전화선 모뎀의 전송 속도는 최대 56kbps로 ADSL 속도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고 요금 할인시간도 야간이나 특정 시간으로 정해져있었다. 그마저도 대도시 등 일부 지역에서나 56Kbps급을 사용할 수 있었고 실제 속도는 빨라야 40~50kbps 정도밖에 안 나왔다. 1990년대 말 물가 기준으로 ADSL의 이용료는 3만원으로 썩 저렴한 가격은 아니었지만[4] 이때는 모뎀으로 PC통신이나 인터넷에 심취하다가 10만원 이상의 전화 요금을 물던 것을 생각하면 획기적으로 저렴한 것이다. 야간정액제나 도수정액형서비스료 등의 상품도 있었지만 014xx에 한정되는 등 제한이 많았다. 그러니 추가 요금 걱정 없이 한 달에 3만원 정도만 내고 속도도 넘사벽 수준인 ADSL이 경쟁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비교를 하자면 당시 기준 4MB이나 하는 MP3 파일 하나를 56kbps 모뎀으로 다운로드 받는다면 이론상 약 10분이 소요되었는데 이론상으로나 그렇지 실제로는 15분 정도 걸리면 양호한 편이었다면, ADSL의 경우는 이론상 4초, 실제로도 10초가 채 안 걸리는 무지막지한 시간 단축이 일어났던 것이다.

장점은 속도뿐만이 아니라서 전화선 모뎀의 경우 전화를 걸어 접속하고 그 사이에 전화를 하거나 전화가 오면 인터넷 연결이 끊기거나, 그게 아니라도 모뎀으로 파일 전송을 하는 일 자체가 변수가 많고 안정적이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저 10분 넘어가는 사이에 속도가 갑자기 느려지거나, 랙이 걸려 막히거나, 다운로드가 끊겨 아예 처음부터 다시 받아야 하거나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5] 그런 판에 당시 월 3~4만원 정도면 전화선 모뎀과 비교해도 비싸지도 않으면서 데이터를 무제한 사용할 수 있서 요금폭탄 걱정도 없는데다, 4MB MP3 파일 하나 받는데도 5초도 안되는 정도로 초고속으로 다운로드가 되고, 좀 큰 파일을 오래 받아야 할 때도 끊김이나 기타 변수가 적은 안정적인 속도와 연결상황 하에서 받을 수 있지, 상시 접속되어있어 전화 걸 필요 없이 바로 인터넷 브라우저로 들어가면 될 정도로 이용이 편리하며 저게 심지어 한 시대에 공존하고 있던 기술이다 보니 모든 면에서 열세였던 전화선 모뎀이 설 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사실 두루넷HFC망을 1998년 6월에 먼저 상용화해서 정액제를 실시했다. 가격도 ADSL이랑 비슷했다. 아니, ADSL이 HFC망 인터넷 가격을 기준으로 삼았다. 하지만 공동주택에서 케이블 방송망을 공동 선로로 설치한 곳은 설치가 안 된다는 문제점이 있었고, 케이블 방송의 보급도 크지 않았던 데다 서비스 지역도 서울 내 몇몇 지역만 되는 게 문제였다. 서비스 가능 지역은 차차 넓혀갔지만 한국전력공사가 통신사업부문을 파워콤으로 분사하면서 초기 확장 속도가 늦어지고 따라 잡히는 빌미가 된다. 이후 하나로통신이 ADSL과 HFC망을 같이 런칭해서 라이벌로 등극하고 두루넷처럼 HFC망만 운영하는 온세통신(현 세종텔레콤) 등의 후발주자들이 가세한다. 이런 판국에도 ISDN을 밀어서 종량제로 돈 긁어내려 발악했었던 KT의 삽질. 그럼에도 최후의 승자는 전화선을 쥐고 있는 KT였다.[6]

한국통신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었지만 당장 ADSL 서비스를 내놓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그러다 보니 기존 ISDN에 "2"자만 하나 더 붙여서 ISDN2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물타기를 저지르기도 했다. 기존 ISDN에서 속도 향상이나 요금제 개편 이런 건 없었으니 이게 ADSL의 대항마가 될 리 없었다. 2000년에 ISDN(014XY) 종일요금제를 도입하긴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물론 도입 전에는 멀티채널이든 아니든 야간/할인시간 정액제에 가입해야 했지만, 결국 몇 개월 뒤, 한국통신도 메가패스라는 이름으로 ADSL 정식 서비스를 내놓게 된다.

기존의 전화선만으로 컴퓨터의 고속 데이터 통신을 가능하게 해주었으며, 전화와 인터넷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고, 24시간 정액 요금제 사용으로 통신료를 파격적으로 절약할 수가 있는 등 여러 메리트가 있어 기존의 일반 전화 모뎀 시대를 종결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전화선 모뎀을 쓸 경우 전화와 인터넷을 동시에 쓸 수 없었고, 인터넷 사용 중에는 통화중이 되거나, 통화 중 착신 기능으로 전화를 받으면 인터넷은 끊긴다. 과금도 전화통화와 똑같이 분당 몇 원 식으로 종량제 요금을 매겨, 많이 쓸 경우 몇 십만 원의 요금을 물 수도 있어 야간정액제 같은 시간형 정액제가 시행되기도 했다.


더군다나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였던 유승준을 모델로 내세워 광고[7][8]를 때리고 지사에서 편법을 동원해 마케팅을 일삼았던지라 사람들은 약정제로 계약하여 사은품이나 요금할인 가입비 면제의 혜택을 받았다. 때마침 중소기업의 참여 아래 100만원 이하의 저렴한 가격을 자랑하는 국민PC 사업이 진행 중이었고, PC방보다는 집에서 컴퓨터를 이용하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마음과 정부 차원에서 학교 정보화 교육을 진행하는 시대적 상황에 놓여있었다. 게다가 양지에서는 게임 스타크래프트 열풍이 불었고, 음지에서는 나이 불문하고 성인물에 대한 욕구가 있었기에[9] 초고속 인터넷 열풍을 일으키는 데는 충분했다.

5. 문제점

전화국과의 거리에 따라 속도가 판이하게 차이가 나는 문제가 있다. 전화국과 가까이 있는 집이라면 최소 1 Mbps의 전송 속도가 보장되지만, 전화국으로부터 거리가 점점 멀어질수록 인터넷 속도가 떨어져 사실상의 서비스가 어렵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또한 전화선의 노후화 등으로 인해 통신 장애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나마 하나로통신(현 SK브로드밴드)은 전화국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광 케이블로 통신망을 구축했고 해당 지역은 거리 제한 문제에서는 좀 더 자유롭다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주변의 인터넷 가입자 수가 늘면 속도가 급격하게 줄어드는 문제도 있었다.[10]

인터넷 서비스가 발전하면서 P2P 등 파일을 업로드할 일도 많아져서 비대칭형이라는 단점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주로 프루나당나귀를 통한 야동 공유 측면에서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던 것. 지금은 유사광랜이 ADSL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

6. 후속 기술

ADSL의 전송 속도를 개선한 ADSL2와 ADSL2+라는 기술도 나왔으나, 대한민국에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이미 VDSL 등의 다른 고속 통신 기술이 널리 적용되는 상황에서 굳이 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통신망의 교체가 어려운 국가에는 이 기술들이 도움이 될 수 있었다.

2010년대엔 전화국사와 가입자간을 ADSL이나 VDSL로 직접 연결하기보다는 ONU의 설치로 국사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도 VDSL 서비스가 가능해졌다. 이를 IP-VDSL라고 부른다. 전화국은 원래부터 광 케이블이나 다른 고속망으로 인터넷에 연결해 놓고, ADSL과 VDSL 적용 구간을 점점 줄여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점점 사라지는 추세에 속한다. 인터넷의 정보량이 매우 증가하여, 더이상 느려터진 전화선으로 인터넷을 하기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주택의 경우 광 케이블을 이용한 FTTH로 전환이 되고 있으며, ADSL을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없다. 광랜 설비공사가 귀찮아서 ADSL을 고수하는 집에는 아예 통신사가 무약정+요금추가X 조건으로 VDSL로 갈아타 달라고 통신사가 간청하기도 한다. 노후화된 장비를 더 이상 유지하고 싶지 않아서인 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주택의 경우에는 아직도 ADSL 방식을 사용하는 모습이 간간이 보인다. 이 경우 장비교체를 미처 못한 경우라고 보면 된다. 공공기관도 가끔 있는데,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건드리지 않는 특성상, 특정 용도로만 사용하고 그 용도로 누가 문제를 보고하지 않았다면 담당 ISP에서 장비 일체를 교체할 때까지는 그냥 그렇게 두게 된다.

특히 외진 도서지역. 보통 인터넷 속도에 크게 신경쓰지 않고, 한 집에서 오랫동안 산 어르신 세대의 집에서도 종종 보인다. 빠르지 않은 컴퓨터로 HTS와 뉴스포탈 정도만 이용하며 온라인 게임을 하지 않아 핑에 관심이 없는 경우, 느린 ADSL로도 큰 불편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집은 인근 주택이 다 광랜 이상으로 바꿀 때까지, 전화국에서 장비를 완전히 교체하면서 지원하지 않게 되어 동일 요금으로 바꿔드립니다하고 기사가 찾아오거나 통신사에서 전화할 때까지 모른다. 만약 자기 집 인터넷 속도가 케이블 인터넷도 아닌데 다른 집보다 심각하게 느리거나 업로드/다운로드 속도의 차이가 크다면 인터넷 회사에 전화해 문의해보라. 99% 확률로 기사가 회선교체하러 찾아온다.

선진국이라도 미국처럼 땅이 넓거나 회선을 새로 구축하기 어려운 개발도상국에서는 유선망보다는 WiMAX와 같은 무선 인터넷이 더 인기를 끌었다. 원래 WiMAX는 WiBro처럼 이동하면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 선을 Wi-Fi보다 더욱 더 넓은 범위에서 무선화 시키지는 취지도 있었다.[11] 2020년대 들어서는 4G LTE/5G NR 라우터스타링크가 그 자리를 이었다.

7. 2010년대 이후의 ADSL

2010년대 이후의 웹 환경에서는 ADSL은 통신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만약 ADSL을 이용한다면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ADSL이 최대로 지원하는 8 Mbps라는 속도는 일반적인 웹 서핑 정도는 큰 불편함이 없는 속도지만 업로드 속도가 최대 1 Mbps로 카카오톡으로 사진 한 장 보내기에도 느리다. 특히 유튜브 같은 동영상 서비스는 1080p도 버거운 경우가 많은데, 유튜브 1080p 최대 비트레이트가 딱 8 Mbps로 ADSL의 최대 속도와 같기 때문이다. 굳이 ADSL 속도를 다시 느껴보고 싶다면 3G 스마트폰 혹은 LTE/5G 스마트폰에서 3G 우선 모드로 설정 해보자.

ADSL을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기업체도 있다. 전송량이 많지는 않고 광통신망의 혜택을 받기 힘들거나 필요가 없는 경우에는 ADSL이 유리하기 때문. 예를 들어 편의점(CVS) 사업에서도 사용되는데, 편의점과 본부가 통신을 위해 전용망 구성을 위해 비용이 저렴한 ADSL을 선호하기도 한다. 전화선 일반모뎀 방식의 경우 요즘 시대에 음성 모뎀을 이용하는 건 종량제 방식인지라 사실상 하루 종일 전용망에 접속해야 하는 편의점의 경우에는 요금폭탄을 피하기는 힘들므로. 더욱이 2017년 014XY 번호를 없앰에 따라 일반 전화선 방식 모뎀의 서비스가 종료된 상황이기도 하다.

8. 관련 문서


[1] 당시 공기업 한국전기통신공사(약칭 한국통신).[2] 참고로 일본에서 NTT가 조만간 100 Mbps급 인터넷 서비스가 개시될 것이라며 한국통신과 똑같이 ISDN을 밀었다가 정보화를 늦추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3] PSTN은 1997년 4월 1일, ISDN은 1999년에 서비스되었다. 1998년부터 수도권 지역에서만 01414로 접속이 가능했다.[4] 1999년 월 최저임금이 344,600원이었다. 2024년 기준 메이저 업체인 KT/SKB/LG U+ 기준으로 부가세 포함 22,000원이면 100Mbps급의 초고속 인터넷을 쓸 수 있으니 회선 속도 및 물가 차이까지 고려하면 엄청나게 저렴해진 셈이다.[5] 여담으로 그래서 당시에 중간에 끊겨버린 다운로드 파일을 이어서 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프로그램들이 알음알음 알려졌다. 고작 메가바이트 단위 파일인데도 이런 프로그램이 필요했다.[6] 1990년대 KT 유선전화 점유율이 99%였다. 이 당시 ADSL 후발주자임에도 통신 인프라가 압도적으로 깔려있기에 가능한 일이였다.[7] "따라올테면 따라와봐!"라는 카피로 유명했다.[8] 물론 중간에 원미경, 유인촌, 차인표-신애라 부부를 모델으로 한 광고도 진행했다.[9] 당나귀 등 P2P를 통해 음란물이 널리 유포됐던 시기였는데, 하필 이 시기 여배우 오현경과 여가수 백지영사생활 유출 영상이 빠르게 유포된 것도 초고속 인터넷 보급 열풍의 그림자였다.[10] 이는 당시 통신 장비의 성능 문제도 있었다.[11] 이동하면서 쓰는 목적과 유선망의 무선화는 서로 다른 표준으로 지정되어 있다. 어느 한쪽을 목표로 개발된 것을 전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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