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시아의 통화 | ||
인도 루피 | 파키스탄 루피 | 방글라데시 타카 |
스리랑카 루피 | 네팔 루피 | 부탄 눌탐 |
몰디브 루피야 |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 | 중국 위안 ( |
افغانۍ (파슈토어) / افغانی (다리어)
1. 개요
아프가니스탄의 통화. ISO 4217 코드로는 AFN[1]이며 기호는 ؋ 혹은 Af(단수형)/Afs(복수형)인플레이션이 20~30%를 계속 넘고 있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 현지에서는 미국 달러나 주변국 통화(파키스탄 루피 , 이란 리알)도 비공식적으로 통용된다. 초인플레이션까지는 아니지만 안 그래도 상황이 안좋은 아프가니스탄 경제에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1936년 인도 루피 1 : 4 아프가니의 비율로 고정시킨 뒤 점점 아프가니의 화폐가치는 하락하면서 1982년에는 인도 루피 1 : 50.6 아프가니가 되어버렸다.
9.11 테러 이후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하고, 이로 인해 탈레반 정권이 축출되면서 신정부가 수립되었고, 디노미네이션을 한 후 2002년부터 새로운 화폐를 찍어냈다. 이 새로운 화폐가 지금의 아프가니로 2005년부터 1, 2, 5 아프가니는 동전이 나오면서 지폐는 나오지 않고 있다.
2023년 6월 현재 환율은 1 미국 달러에 약 86 아프가니이다. 1 아프가니에 약 15원
2. 지폐
2.1. 1961 ~ 63
당시 디자인으로는 전통적인 고딕방식을 수용하던 유럽, 아메리카와는 달리 굉장히 세련된 디자인을 채택한 것이 특징.도안 | ||
앞면 공통 | 모하마드 자히르 샤 | |
10؋ | 그린 모스크[2] | |
20؋ | 독립기념비 | |
50؋ | 나디르 샤[3]의 묘 | |
100؋ | 헤라트의 자마 성원[4] | |
500؋ | 카자키 수력발전소 | |
1,000؋ | 칼라-이-보스트 아치 |
- 500 아프가니권은 색갈이 너무 주황색이라 사막에 떨구면 분간이 안갈 정도의 보호색을 갖추고 있어, 1963년에 색갈을 좀 더 진한색으로 바꾸었다.
2.2. 1967
도안 | ||
50؋ | 대통령궁[5] | |
100؋ | 나디르 샤의 묘 | |
500؋ | 칸다하르 공항 | |
1,000؋ | 산지대의 풍경 |
2.3. 1973 ~ 78
모든 지폐의 앞면에 있는 인물은 아프가니스탄을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아프가니스탄의 초대 대통령 모하마드 다우드 칸으로, 사촌형인 자히르 국왕이 이탈리아에 건강검진을 받으러 간 사이 정부를 전복시키고 공화국을 세웠다. 결국 자히르 국왕은 해외 도피하는 신세가 되었다.도안 | ||
앞면 공통 | 모하마드 다우드 칸 | |
10؋ | 칼라-이-보스트 아치 | |
20؋ | 수도 카불의 전경 | |
50؋ | 바다흐샨지역에서 야크를 탄 교역인들 | |
100؋ | 헤라트 대모스크 | |
500؋ | 고(古)성 | |
1,000؋ | 마자르-이-샤리프 모스크 |
2.4. 1979 ~ 93
피로 세워진 정부는 피로 몰락하듯,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국명을 민주공화국으로 바꾸었다.이 때부터 국립은행을 영어 BANK OF AFGHANISTAN을 로마자 DA AFGHANISTAN BANK로 바꾸었다.
앞면 | 뒷면 | ||
10؋ | 여러가지 무늬 | 살랑 도로 | |
20؋ | 반디 아미르 호수 | ||
50؋ | 다르-울 아만 궁전 | ||
100؋ | 농민 | 다룬타 댐 | |
500؋ | 부즈카시[6] | 옛 카불 성곽 | |
1,000؋ | 블루 모스크 | 개선문[7] | |
5,000؋ | 풀-이 키쉬티 모스크 | 잘랄라바드의 하비불라 왕의 묘 | |
10,000؋ | 헤라트 모스크 | 칼라-이-보스트 아치 |
2.5. 2002(현행권)
앞면 | 뒷면 | ||
| 중앙은행 문장 | 블루 모스크 | |
| 중앙은행 문장 | 개선문 | |
| 중앙은행 문장 | 발라 히사르 요새 | |
10؋ | 아흐마드 샤 왕의 묘 | 개선문 | |
20؋ | 마흐무드 가즈나비 왕의 묘 | 대통령궁 | |
50؋ | 두 개의 검 왕 모스크 | 살랑 도로 | |
100؋ | 풀-이 키쉬티 모스크 | 칼라-이-보스트 아치 | |
500؋ | 헤라트 모스크 | 칸다하르 공항 | |
1,000؋ | 하자트 알리 사원 | 아흐마드 바바 샤 왕의 묘 |
3. 주화
1, 2, 5 아프가니 3종.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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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 사미 사다트 | }}}}}}}}}}}} |
[1] 개혁 이전엔 AFA.[2] 발흐에 위치한 파르사 모스크 위대한 이슬람학자인 파르사의 무덤이다.[3] 자히르 샤 국왕의 아버님 되신다.[4] 원래의 형상은 지금과는 많이 다른데 초기의 헤라트 모스크는 1200년대에 지어졌었다. 그런데... 지진이 한번나서 무너지고, 불이 나서 무너지고, 최종적으론 칭기즈칸에게 손수 무너짐을 당하는 영광(?) 으로 3연참을 당하시게 되니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광경...[5] 의전용 궁전이다, 영빈관과 비슷한 개념. 이곳에 대통령의전실이 있으며, 국가안전이사회도 이곳에 있다.[6] 말을 타고 죽은 양이나 염소(산양)를 탈취해 자신의 진영에 집어넣는 아프카니스탄의 국기(國技). 경기방식이 다소 과격한 탓인가 이슬람 보수파의 관습 탓인가 전통적으로 여자는 참가는 커녕 참관도 불가능하다는 암묵의 룰이 있다.[7] 전쟁에 승리하여 세워진 것이 아니라, 1919년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축하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독립문의 형식에 조금 더 가깝지만, 명칭은 아마눌라의 개선문이라고 한다. 아마눌라 왕이 독립의 주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