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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 전경
헤이다르 알리예프 공원
간자 시 Gəncə [1][2] | |
인구 | 332,600 |
면적 | 170 km2 |
인구밀도 | 2,848/km2 |
시간대 | UTC+4 |
시장 | 니야지 바이라모프 |
홈페이지 | http://ganja-ih.gov.az/az |
아바스 1세가 세운 주마 모스크(간자) (금요 사원)
1. 개요
아제르바이잔어: Gəncə (갠재)러시아어: Гянджа (갼자)
아르메니아어: Գանձակ, Գյանջա (간자크, 간자)
페르시아어: گنجه (간제)
튀르키예어: Gence (겐제)
영어: Ganja
아제르바이잔 제2의 도시. 인구 수로는 바쿠와 숨가이트에 이어 3위지만, 둘은 같은 광역권이기에 사실상 2위 도시이다. 중세와 근대 시절 아제르바이잔 서부 중심지였고, 많은 전쟁과 개발을 겪었음에도 여러 유적이 남아있다. 주민들은 본래 페르시아인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12, 13세기의 수난을 겪은 후 점차 튀르크화되어 현재의 아제리인이 되었다. 대부분 쉬아 무슬림이고, 아르메니아인들도 꽤 있었으나 양측 간의 학살 후 추방되었다. 바쿠에서 시작하여 조지아로 이어지는 천연자원 수송로의 길목에 위치하여 경제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도시이다.
2. 역사
9-13세기의 옛 도시 유적
예로부터 캅카스를 잇는 주요 도시 중 하나였으며, 역사적으로 페르시아와 튀르크, 몽골, 옆나라 조지아 왕국의 각축장이기도 했다. 비록 이미 8세기 전반에 쉬아 이맘 무함마드 알 바키르의 아들 이브라힘이 우마이야 왕조의 박해를 피해 이주해 왔다가 묻히기도 했으나, 도시 자체는 860년경 압바스 왕조령 캅카스 총독 무함마드 빈 칼리드 앗-샤이바니에 의해 세워졌다. 여기에는 흥미로운 설화가 전해진다. 중세 아랍 사가들에 의하면 그는 군대와 함께 야영하던 중, 꿈에서 자신이 주둔한 세 언덕들 중 하나에 보물이 묻혀 있으니 파내어 도시를 세우는 데에 쓰라는 목소리를 들었다 한다. 잠에서 깬 그는 곧장 보물을 찾아 나섰고, 진짜로 발견되자 칼리파 알 무타와킬에게 자초지종을 고하였다. 칼리파는 보물을 자신에게 주는 대가로 도시에 대한 세습 지배권을 약속하였고, 페르시아어로 '보물'[3]을 뜻하는 간지에서 유래한 도시는 캅카스 도시들 중 드물게 시작부터 이슬람 도시였다.
2.1. 중세
조지아 군대가 뜯어간 간자 철문 | 페르시아 대문호 니자미 간자비 (카펫 수공예) |
살라르 왕조에 속하던 도시는 971년 샷다드 왕조령이 되었고, 1063년 샤부르 1세가 도시를 두르는 성벽을 세웠다. 당시 아제리 장인 이브라힘 빈 오스만이 6개의 성문을 세웠는데, 문의 외부에 철을 입고 기도문으로 장식하여 명성이 자자하였다. 1075년에는 말리크샤가 일대를 정복하여 셀주크 제국령이 되었다. 그러던 1139년 땅이 갈라져 호수가 생길 정도로 대지진이 발생하여 일대에서 25만여 사망자가 나는 등 재앙이 닥쳤다. 이때를 틈타 조지아 왕국의 군주 디미트리오스 1세가 무방비 상태이던 간자를 습격, 간자의 철문을 포함한 여러 전리품과 함께 돌아갔다. 포로들의 노동력을 이용해 운송된 간자의 철문은 지금도 조지아 서부 쿠타이시 근처의 겔라티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다.
이후로 일디귀즈 가문을 중심으로 한 무슬림 영주들은 연합군을 결성, 간자에서 집결하여 수차례 조지아와 대결했으나 결국 이기지 못하였다. 한편 그무렵 간자에서는 피르다우시와 함께 초기 페르시아 대문호 중 하나인 니자미 간자비가 일생을 보냈다. 셀주크 제국 말엽의 혼란기에도 번영하던 간자는 1231년 몽골 제국군에게 함락되어 다시 파괴되었다. 이후 일 칸국, 잘라이르 왕조, 백양 왕조 등을 거쳐 16세기 사파비 왕조 하에서야 간자는 카라바흐 주의 치소가 되는 등 재차 중요성을 회복하였다.
2.2. 아바스 1세의 건설
16세기에 세워진 성벽 | 금요 모스크 (주마 메스지드) |
금요 모스크 (주마 메스지드)
1578년 오스만 제국군이 점령했으나 1606년 사파비 령으로 회복되었고, 아바스 1세는 기존 시가지의 서남쪽 5km 지점에 새 도시를 세우며 사파비 양식의 모스크와 목욕탕 등을 세우고 (16세기에 세워진) 성벽을 서양 기술을 적용하여 보강하였다. 이와 함께 지명 역시 압바사바드로 개칭되었지만, 기존 시가지와 합쳐지며 간자로 원상 복구되었다. 사파비 조의 멸망기인 1723년 재차 오스만 제국이 일대를 점령했으나, 나디르 샤가 1734년 11월 ~ 1735년 7월까지 무려 9개월에 걸쳐 벌어진 간자 공성전을 통해 회복하였다.
2.3. 간자 칸국
간자 공성전 (1803-04) | 간자 성채 지도 |
사파비 시기 목욕탕 옆의 자바드 칸 영묘
이후 아프샤르 왕조를 거쳐 간자는 카자르 왕조의 수위권 하에서 캅카스에 우후죽순 들어선 칸국들 중 하나인 간자 칸국의 수도가 되었다. 19세기 들어 간자는 러시아 제국의 남하에 직면하였다. 1801년 조지아 동부를 병합한 러시아 제국은 1803년 11월, 간자 칸국에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 통첩을 보내고 대군을 파병했다. 간자 칸국의 6대 군주이자 카자르 왕실의 인척인 자바드 칸은 협상을 통해 지연시키며 원군을 기다렸지만, 1804년 1월 러시아 군은 대대적인 포격과 함께 총공세에 나섰다.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던 중, 성내의 아르메니아 인들이 성문을 열어버리며 도시는 함락되었다.
자바드 칸을 위시로 한 왕실 대부분은 투항을 거부하고 싸우다 전사하였고, 러시아 군은 5천에 달하는 주민 및 수비대를 학살하였다.[4] 간자 함락 후 카자르 조는 러시아와 전면전에 나섰으나 대패하였고, 1813년 굴리스탄 조약을 통해 간자는 러시아 제국에 할양되었다. 1826년의 2차 전쟁에서 카자르 군이 일시적으로 간자를 수복했으나, 1828년 투르크만차이 조약으로 러시아 지배권이 공고해졌다.
2.4. 러시아 & 소련 시기
러시아 제국기에 세워진 루터 교회 |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성당 |
1924년에 개장한 간자 고고학 박물관
러시아 제국은 지명을 간자에서 당시 차르인 알렉산드르 1세의 왕비 이름인 옐리자베타에서 따서 옐리자벳폴(Елизаветполь)로 고쳤다.
러시아 제국 시기 지금의 카라바흐, 장게주르 지역을 포함한 서부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아우르는 옐리자벳폴 현(Елизаветпольская губерния)의 중심지였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잠시 독립했던 아제르바이잔이 소비에트 연방에 의해 다시 합병되고, 옐리자베트폴로 불렸던 간자시도 잠시 명칭이 환원되었다가 1935년 볼셰비키 지도자 중 한 명인 세르게이 키로프의 이름을 따서 키로바바트(Кировабад)로 개명되었다.
2.5. 현대
1991년에 세워진 니자미 간자비 영묘
2012년에 세워진 중세 간자 성 재현단지
1989년 아제르바이잔이 독립을 회복한 이후 도시 이름은 다시 간자로 환원되었다. 이후 아제리 정체성을 상기시키는 건설이 뒤이었다. 아르메니아와 분쟁 중인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가까운 도시이기도 해서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당시 아르메니아군의 폭격을 받기도 했다. 후자의 경우 25명의 사망자와 118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시가지 일부가 파괴되었다.
3. 관광
간자의 랜드마크인 이맘자데 이브라힘 영묘
이브라힘 영묘 내부의 중세 시기 영묘 유구
1980년 대통령 방문을 기념해 명명된 헤이다르 알리예프 공원
목욕탕 등 페르시아 유적, 니자미 간자비 영묘, 러시아 제국 시기 건축된 루터교회 성당 등의 유적이 시내 곳곳에 있지만 볼 거리가 많다고 볼 순 없다. 그래도 구소련의 색채를 지워가고 있는 바쿠와 달리 소련 당시의 칙칙한 분위기와 페르시아 유적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도시. 시외로 나가면 괴이괼(Göygöl) 호수 같은 명승지도 있다. 동구권의 분위기가 짙게 느껴지는 헤이다르 알리예프 공원 역시 가볼 만하다.
교통 역시 간자 국제공항이 있으므로 러시아나 튀르키예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1] 아제르바이잔어로 갠재로 발음한다.[2] 영어로 GANJA 로 표기하다보니 ‘간자’로 발음된다고 생각하지만 아제르바이잔어 Ə 를 영문으로 표기할 때 A로 표기하다보니 생긴 오류이다.[3] 아랍어로도 보물은 칸지이다.[4] 그중 5백은 모스크에 피신해 있다가 러시아에 내통한 아르메니아 인의 부추김으로 학살되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