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17:41:30

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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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번영하는 무역 도시2.2. 아바스 1세의 파괴와 강제 이주2.3. 근대2.4. 근현대 분쟁
3. 유적의 파괴4. 여담

1. 개요

아제리어 Culfa
영어 Julfa
아르메니아어 Ջուղա (주가)

아제르바이잔나히체반 자치공화국의 도시. 현재 시가지는 중근세 시기 유라시아를 망라한 아르메니아 상인들의 거점 도시로 번영했던 옛 도시 줄파의 동남쪽에 위치한다. 아라스 강을 사이에 두고 남쪽의 이란과 접경하며, 강 건너편에도 줄파의 페르시아어 발음인 졸파란 도시가 있다. 해발 700 미터의 고지대에 위치하며, 인구는 약 1만 3천명이다.

2. 역사

아라스 강 북안의 바위 산지에 입지한 옛 줄파는 티그라네스 대왕메디아 왕국을 격파한 후 그 포로들을 이용해 세웠다고 전해진다. 다만 본격적으로 도시가 성장한 것은 11세기에 중세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였던 아니가 파괴된 후 그 유민들이 이주해 오면서다.

2.1. 번영하는 무역 도시

15세기 들어 실크로드가 재차 활성화되며 줄파는 유라시아 곳곳을 누빈 아르메니아 상인들의 본거지로 번영했다. 특히 이스탄불과 타브리즈를 잇는 무역로 상에 있어 오스만 제국사파비 왕조 간의 교역을 거의 독점했다. 줄파 상인들은 서쪽으로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동쪽으로는 광저우시닝, 북쪽으로는 모스크바, 남쪽으로는 모카스리랑카에 이르렀다. 1600년경 줄파의 인구는 약 1~2만 가량이었다.

2.2. 아바스 1세의 파괴와 강제 이주

16세기 들어 오스만 제국사파비 왕조 사이를 오가며 주인이 여러번 바뀌던 줄파는 전란에도 불구하고 쇠퇴하지 않았다. 하지만 1603년, 오랜만에 줄파를 재점령한 사파비 조의 샤 아바스 1세는 일대를 지켜낼 수 없다고 판단하여 부유한 도시를 또 내줄 바에야 파괴해 완충 지대로 삼고자 하였다. 그에 따라 1605년 10월에 줄파는 초토화되었고, 모든 주민들은 3일의 유예 기간 후 이란 고원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수르군) 이주를 거부한 이들은 학살되었다.

중근세 아르메니아의 중심 도시이던 줄파의 파괴로 아르메니아인들은 또다시 디아스포라를 겪으며 유라시아 각지에 흩어지게 되었고, 아르메니아 본토 곳곳에 쿠르드 / 아제리 / 튀르크 인들이 정착하며 인구 분포가 불리하게 바뀌게 되었다.[1] 한편 기존 주민들의 귀환을 막기 위해 줄파 시가지는 철저히 방화된 후 초토화되었고, 근처에 숨어 있던 이들도 1606년에 붙잡혀 내지로 이주되었다⁷.

2.3. 근대

교역로 상에 있었기애 줄파의 폐허는 곧 재활용 되어 작은 마을이 들어섰다. 1747년 일대는 카자르 왕조령 나흐츠반 칸국에 소속되었다. 19세기 들어 시가지는 옛 줄파에서 동남쪽으로 3km 떨어진 알린자 강과 아라스 강의 합류지로 이전되었다. 카자르 조의 세관과 우체국, 수비대가 있던 줄파는 1828년의 투르크멘차이 조약을 통해 러시아 제국령이 되었다. 1840년, 일대는 아르메니아 주가 되었다가 1847년 예레반 주로 개편되었다. 1897년 기준 인구는 약 8백명이었고, 대다수가 아르메니아인이었다.

2.4. 근현대 분쟁

1918년 ~ 1920년간 적백내전의 혼란기에 줄파는 아르메니아 공화국과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 간의 분쟁지였고, 카르스 조약 후 소련 치하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산하 나히체반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소속되었다. 2차 대전 시기 이라크, 이란을 거친 소련 지원 물자 수송로인 페르시아 회랑이 줄파를 지나며 중시되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에 귀속된 후 줄어들던 아르메니아인들은 소련 붕괴 시기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을 겪으며 대부분 자의 혹은 강제로 아르메니아로 이주되었다.

3. 유적의 파괴

1603년 이후로도 옛 줄파에는 파괴된 다리, 2개의 카라반사라이 (하나는 아라스 강 남안), 성채, 파괴된 교회, 1만기의 묘비가 있던 묘지 등이 있었다. 그중 묘지 정도만 현대까지 있었으나 20세기 초의 철도 건설과 2005년 전후의 군대를 동원한 조직적인 파괴로 인해 대부분 훼손되고 말았다. 아르메니아로 옮겨진 몇개 만이 에치미아진에 남아있다.

4. 여담

뉴 줄파로 옮겨간 후에도 줄파 상인들은 유럽, 서아시아, 중앙아시아를 넘어 마닐라, 마카오, 시닝, 자카르타, 아카풀코에 이르는 드넓은 무대에서 교역을 행했다. 이들의 활약은 19세기 초엽, 중남미 국가들의 독립으로 마닐라 은 시장이 쇠락할 때까지 지속되며 근세 이란의 대외 교역을 주도했다.


[1] 나고르노 카라바흐 일대 역시 이때 아르메니아 인들이 이주된 자리에 아제리인들이 유입되며 향후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