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3 09:03:16

갸넨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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갸넨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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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제12대 국왕
갸넨드라
ज्ञानेन्द्र शाह
파일:gyanendra.jpg
<colbgcolor=#DC143C><colcolor=#fff,#fff> 출생 1947년 7월 7일 ([age(1947-07-07)]세)
네팔 왕국 카트만두
재위기간 제12대 국왕
1950년 11월 7일 ~ 1951년 1월 7일
2001년 6월 4일 ~ 2008년 5월 28일
제1대 왕위요구자
2008년 5월 28일 ~ 현직
칭호 갸넨드라 비르 비크람 샤허 데브
대관식 1950년 11월 7일
2001년 6월 4일
신장 178cm[1]
부모 아버지 마헨드라 국왕
어머니 인드라 락쉬미 왕비
배우자 코말 왕비
종교 힌두교

1. 소개2. 생애3. 갑자기 즉위한 왕4. 네팔 왕실 참극의 배후설5. 폭정과 퇴위6. 평가7. 복위 가능성8. 가계

[clearfix]

1. 소개

네팔마지막 국왕.

네팔이 공화국이 된 현재도 왕정복고와 네팔 신정부에 몰수당한 구 왕실 재산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2. 생애

1947년 7월 7일 네팔의 제9대 국왕 마헨드라와 인드라 왕후의 차남으로 출생했으며 제10대 국왕 비렌드라의 동생이자 디펜드라의 숙부였다. 그가 네 살이던 1950년 그의 조부이자 제8대 국왕 트리부반은 라나 가문과의 갈등끝에 가족들과 수행원들을 데리고 뉴델리로 망명해 버렸고 당황한 모한 샨시르 라나 당시 총리는 유일하게 궁에 남아 있던 4살배기인 그를 급한 대로 왕위에 추대해 권력을 이어나가려고 했지만 네팔 국민들의 반발로 갸넨드라를 왕위에 올리고 라냐 가문이 통치를 이어가는 일은 유야무야되고 결국 다음해인 1951년 1월 7일 트리부반은 전국민의 열화와 같은 환호 속에 카트만두로 돌아왔다. 그렇게 왕위에 오를 뻔한 일은 헤프닝으로 남고 둘째 손자였던 그는 이후에는 왕좌와 거리가 먼 삶을 사나 싶었다. 그런데...

3. 갑자기 즉위한 왕

2001년 6월 1일 그는 갑자기 네팔 제 2의 도시인 포카라로 공무차 출장을 떠났다. 그날 밤 9시(한국 시간 6월 2일 새벽 12시 45분)경 나린얀히티 왕궁의 연회장에서 왕세자 디펜드라가 아버지 비렌드라와 가족들을 총으로 쏴 숨지게 했다(네팔 왕실 학살).[2] 연락을 받고 급히 카트만두로 올라온 그는 비렌드라가 죽고 디펜드라가 권총 자살을 기도해 혼수 상태라는 사실을 알고 약 3일간 대리 청정을 거쳤고 혼수 상태였던 조카 디펜드라가 죽자 네팔 제12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4. 네팔 왕실 참극의 배후설

그가 당시 포카라로 출장 중이라 현장에 없었고 그의 자식들은 현장에 있었음에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아서 참사를 사주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이에 대한 증거는 하나도 없고 르가 평소 평판이 안 좋았던 데다 갸넨드라의 자식들은 다치지 않은 것은 맞지만 부인인 코말 왕비가 현장에 있었다가 중상을 입었기 때문에 이 설은 신뢰도가 떨어진다.

그는 공범 내지 바지사장이고 진짜 배후는 인도미국이라는 설도 있다. 물론 이런 류의 배후설은 마오이스트 반군 계열에서나 나오는 배후설이라 진지하게 취급되지는 않는다.

그가 물러난 뒤 네팔 공화국에서도 국민들의 요구로 조사했으나 디펜드라의 단독범행이고 갸넨드라는 사건과 무관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5. 폭정과 퇴위

즉위 자체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문제는 즉위한 뒤 벌인 폭정이었다. 2001년 6월 4일 즉위한 그는 헌법을 바꾸고 전제 정치를 부활시켰으며 비상 계엄령을 선포해 국민들을 불안하게 했다. 게다가 형 비렌드라는 마오이스트 반군과 대화랑 협상을 통해서 휴전하고 이들의 무장해제를 권유해 제도권 정치에 끌어들이게 하려는 노력을 하여 평화적으로 내전을 종식시키려고 시도했지만 그는 이를 무효로 하고 반군에 대한 강경 진압에 들어갔다. 당연히 마오이스트 반군은 분노하여 다시 내전이 터지고 말았다. 그러한 상황이라면 정치권의 원내 세력들이라도 지지층으로 확보했어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국회를 해산하고 총리를 파면하여 공석으로 한 일 때문에 국민 전체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민주화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해 왕실을 지지하는 국민들과 정치권의 집권 여당들까지 돌아서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그의 삽질로 마오이스트 반군은 힘을 얻어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네팔 전체를 장악하면서 마침내 수도 카트만두로까지 진격했다.

결국 그는 국민과 여러 정당들에게도 버림받은 나머지 대국민 사과문으로 항복을 선언했으며 2007년 왕정 폐지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친 결과 왕정 폐지 의견이 왕정 유지 의견보다 과반수에 도달해 2008년 5월 28일에 왕정이 폐지됨으로써 즉위한 지 7년만에 물러났고 샤 왕조는 종말을 맞이했다. 초대 국왕인 프리트비 나라얀이 1768년에 즉위한 후 딱 240주년이 되는 해였다. 다만 국민투표로 왕정이 폐지됐을 뿐이기 때문에 왕위에서 물러나긴 했어도 그 외의 불이익은 받지 않았다.

6. 평가

재위 기간 동안 네팔의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역행시킨 폭군으로 네팔 내에서 많은 비판 받고 있다. 그리고 네팔 내전 당시 구정부군들이 마오이스트 반군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을 저지르는 등 여러 전쟁범죄에 연루되어 있어 여론이 좋지 않다. 현재는 지위와 재산을 잃고 몰락했지만 여전히 네팔에 거주하면서 왕정복고를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왕정복고를 지지하는 정치 세력들이나 정당이 일부 존재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왕위를 잃고, 폐위당한 다른 아시아권 나라의 마지막 군주들이 폐위 이후 사망하거나 해외망명객 신세가 된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가령 이란의 팔라비 2세는 1979년 이란 혁명으로 하야한 뒤 여러 나라를 떠돌았고[3], 1980년 이집트에서 지병인 암으로 숨졌다. 현재 남아 있는 레자 팔라비 전 황태자나 파라 팔라비 전 황후, 파라나즈 팔라비 전 공주 등 일가족들도 망명객 신분으로 미국과 유럽 등지를 떠돌며 이란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4] 그리고 이라크파이살 2세는 1958년 반 왕정 쿠데타를 일으킨 압둘 카림 카심 장군의 군사들에게 총탄 세례를 받고 참혹하게 총살당했다. 라오스의 전 국왕인 사방바타나 또한 1975년 라오스 내전에서 공산 반군인 파테트라오에 패배하자 퇴위당하고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 옥사하는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이처럼 갸넨드라를 비록한 구 네팔 왕실에 대해 신정부와 옛 국민들이 온건한 이유는 대량학살하거나 상식을 뛰어넘는 만행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7. 복위 가능성

왕정이 폐지된 이후 다른 왕정폐지국들과 마찬가지로 갸넨드라 본인의 사유재산이 아닌 왕궁 등 왕실재산은 몰수되어 국가 소유가 되었다. 현재 갸넨드라 전 국왕은 복위와 함께 몰수당한 재산의 반환을 꾸준히 요구하고 있다. 현재 네팔 내에서는 갸넨드라의 전 왕의 복위와 갸넨드라의 아들 파라스 전 왕세자의 왕위 즉위를 통해서라도 왕정 복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왕정복고가 안되더라도 나라얀히티 왕궁 등 공화정 전환 이후에 정부에 의해 몰수된 왕실 재산들에 대한 환원을 주장하는 근왕파 정치 단체와 라스트리야 프라야탄트라 당 등 일부 야당들이 존재하고 있다.

다만 왕정 페지 이후에 들어선 네팔 신정부가 네팔 공산당과 네팔 회의당 등 주요 원내 양당들의 정치 갈등과 분열, 부정부패 등으로 네팔 국민들에게 논란과 비판이 많지만 그럼에도 현 정권의 정치인들보다 더 한 폭군으로 치부되어 국민 대다수의 민심이 여전히 좋지 않다.

또한 현재 네팔에서 고위층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공화주의 성향의 정치인들 상당수는 갸넨드라 전 국왕과 갸넨드라를 지지하는 근왕파 성향의 야당들이 네팔 국민들의 여론 수렴과 복벽에 대한 민주적인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공화제를 뒤엎고 왕정복고를 강행할 경우 다시 내전을 치뤄서 왕정을 뒤엎고 공화정을 다시 재수립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저지하고, 2008년 왕정 폐지 이후의 헌정체제를 수호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천명하고 있어 왕정복고는 사실상 어려울 것으로 보여진다.

8. 가계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파라스 왕자 1971년 12월 30일 생존 ([age(1971-12-30)]세) 히마니 라쟈
슬하 1남 2녀
1녀 프레라나 샤 싱 1978년 2월 20일 생존 ([age(1978-02-20)]세) 쿠마르 라즈 바하두르
슬하 1남


[1] 5ft 10in[2] 이 참극 속에서 갸넨드라의 형제들 중에선 여동생인 쇼브다 공주만 살아남았다.[3] 팔라비 왕가의 인도 내지 망명 불허를 요구하던 이란 신정부의 압력으로 미국, 멕시코, 모로코, 파나마, 바하마 등 여러 나라들을 전전했다.[4] 실제로 이란에서는 이란 혁명 당시 열린 궐석재판에서 국외로 도주한 팔라비 2세 전 국왕과 그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내린 사형 판결이 유지되고 있어 옛 황실 가족들이 귀국하면 형을 집행하겠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