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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제12대 국왕 갸넨드라 ज्ञानेन्द्र शाह | |
<colbgcolor=#DC143C><colcolor=#fff,#fff> 출생 | 1947년 7월 7일 ([age(1947-07-07)]세) |
네팔 왕국 카트만두 | |
재위기간 | 제12대 국왕 |
2001년 6월 4일 ~ 2008년 5월 28일 | |
칭호 | 갸넨드라 비르 비크람 샤허 데브 |
신장 | 178cm[1] |
부모 | 아버지 마헨드라 국왕 어머니 인드라 락쉬미 왕비 |
배우자 | 코말 왕비 |
종교 | 힌두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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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네팔의 마지막 국왕.네팔이 공화국이 된 현재도 왕정복고와 네팔 신정부에 몰수당한 구 왕실 재산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2. 생애
1947년 7월 7일 네팔의 제9대 국왕 마헨드라와 인드라 왕후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제10대 국왕 비렌드라의 동생이자 디펜드라의 숙부였다. 그가 네 살이던 1950년 그의 조부이자 제8대 국왕 트리부반이 라나 가문과의 갈등 끝에 가족들과 수행원들을 데리고 뉴델리로 망명해 버렸다. 당시 모한 샨시르 라나 총리는 당황하여 유일하게 궁에 남아 있던 4살배기인 갸넨드라를 급한 대로 왕위에 추대해 권력을 이어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네팔 국민들의 반발에 부딛혀 갸넨드라를 왕위에 올리고 라냐 가문이 통치를 이어가는 일은 유야무야되고 결국 다음해인 1951년 1월 7일 트리부반이 전국민의 열화와 같은 환호 속에 카트만두로 돌아왔다. 그렇게 갸넨드라가 왕위에 오를 뻔한 일은 헤프닝으로 남았고, 둘째 손자였던 만큼 이후로도 왕좌와 거리가 먼 삶을 사나 싶었다.2.1. 갑작스러운 즉위
2001년 6월 1일 그는 갑자기 네팔 제 2의 도시인 포카라로 공무상 출장을 떠났다. 그날 밤 9시(한국 시간 6월 2일 새벽 12시 45분)경 나린얀히티 왕궁의 연회장에서 왕세자 디펜드라가 부왕 비렌드라와 가족들을 총으로 쏴 숨지게 만드는 네팔 왕실 학살을 저질렀다.[2] 연락을 받고 급히 카트만두로 올라온 그는 비렌드라가 죽고 디펜드라가 권총 자살을 기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형인 디펜드라는 이미 승하했고, 조카인 왕세자 디펜드라가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혼수 상태에 빠져 정상적인 공무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갸넨드라는 대리 청정을 맡았고, 약 3일뒤 디펜드라가 승하하자 네팔 제12대 국왕으로 즉위했다.2.2. 폭정과 퇴위
즉위 자체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문제는 즉위한 뒤 벌인 폭정이었다. 2001년 6월 4일 즉위한 그는 헌법을 개정하여 전제 정치를 부활시켰으며, 비상 계엄령을 선포해 국민들을 불안하게 했다. 게다가 형 비렌드라가 생전에 마오이스트 반군과 대화 및 협상을 통해서 휴전을 체결하고, 이들의 무장해제를 권유하는 대신 제도권 정치에 끌어들이는 노력을 하여 평화적으로 내전을 종식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무효로 돌리고 반군에 대한 강경 진압에 들어갔다. 당연히 마오이스트 반군은 분노하여 내전이 재발되고 말았다. 그러한 상황이라면 정치권의 원내 세력들이라도 지지층으로 확보했어야 했지만 오히려 국회를 해산하고 총리를 파면하여 공석으로 만들어 국민 전체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민주화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해 왕실을 지지하는 국민들과 정치권의 집권 여당들까지 돌아서게 만들었다. 그의 실책은 마오이스트 반군들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아 네팔 전체를 장악한 뒤 마침내 수도 카트만두로까지 진격했다.결국 국민과 여러 정당들에게도 외면당하게 된 갸넨드라는 더 이상 왕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여 백기를 들었다. 2007년 왕정 폐지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친 결과 왕정 폐지 의견이 왕정 유지 의견보다 과반수에 도달해 2008년 5월 28일에 왕정이 폐지되었다. 그가 즉위한 지 7년, 초대 국왕인 프리트비 나라얀이 1768년에 즉위한 후 240년 만에 샤 왕조는 종말을 맞이했다.
왕위에서 내려오게 된 갸넨드라는 다른 왕정폐지국들과 마찬가지로 갸넨드라 본인의 사유재산을 제외한 왕궁 등 왕실재산은 몰수되어 국가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그외에는 특별히 이렇다할 탄압이나 불이익은 받지 않았다.
3. 평가
재위 기간 동안 네팔의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역행시킨 폭군으로 네팔 내에서 많은 비판 받고 있다. 그리고 네팔 내전 당시 구정부군들이 마오이스트 반군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을 저지르는 등 여러 전쟁범죄에 연루되어 있어 여론이 좋지 않다. 현재는 지위와 재산을 잃고 몰락했지만 여전히 네팔에 거주하면서 왕정복고를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왕정복고를 지지하는 정치 세력들이나 정당이 일부 존재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왕위를 잃고, 폐위당한 다른 아시아권 나라의 마지막 군주들이 폐위 이후 사망하거나 해외망명객 신세가 된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가령 이란의 팔라비 2세는 1979년 이란 혁명으로 하야한 뒤 여러 나라를 떠돌았고[3], 1980년 이집트에서 지병인 암으로 숨졌다. 현재 남아 있는 레자 팔라비 전 황태자나 파라 팔라비 전 황후, 파라나즈 팔라비 전 공주 등 일가족들도 망명객 신분으로 미국과 유럽 등지를 떠돌며 이란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4] 그리고 이라크의 파이살 2세는 1958년 반 왕정 쿠데타를 일으킨 압둘 카림 카심 장군의 군사들에게 총탄 세례를 받고 참혹하게 총살당했다. 라오스의 전 국왕인 사방바타나 또한 1975년 라오스 내전에서 공산 반군인 파테트라오에 패배하자 퇴위당하고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 옥사하는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이처럼 갸넨드라를 비록한 구 네팔 왕실에 대해 신정부와 옛 국민들이 온건한 이유는 대량학살하거나 상식을 뛰어넘는 만행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4. 네팔 왕실 참극의 배후설
그가 당시 포카라로 출장 중이라 현장에 없었고 그의 자식들은 현장에 있었음에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않다. 이 때문에 참사를 사주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이에 대한 증거는 하나도 없고 그가 평소 평판이 안 좋았던 데다 갸넨드라의 자식들은 다치지 않은 것은 맞지만 부인인 코말 왕비가 현장에 있었다가 중상을 입었기 때문에 이 설은 신뢰도가 떨어진다.그는 공범 내지 바지사장이고 진짜 배후는 인도와 미국이라는 설도 있다. 물론 이런 류의 배후설은 마오이스트 반군 계열에서 나오는 주장이라서 진지하게 다뤄지지는 않는다.
그가 물러난 뒤 수립된 네팔 공화국에서도 국민들의 요구로 재조사를 했으나 디펜드라의 단독범행으로 갸넨드라와는 무관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5. 복위 가능성
현재 갸넨드라 전 국왕은 복위와 함께 몰수당한 재산의 반환을 꾸준히 요구하고 있다. 현재 네팔 내에서는 갸넨드라의 전 국왕의 복위 또는 갸넨드라의 아들 파라스 전 왕세자를 옹립하여 왕정 복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왕정복고가 안되더라도 나라얀히티 왕궁 등 공화정 전환 이후에 정부에 의해 몰수된 왕실 재산들에 대한 환원을 주장하는 근왕파 성향의 시민단체와 라스트리야 프라야탄트라 당 등 일부 야당들이 존재하고 있다.다만 왕정 페지 이후에 들어선 공화정 정부가 네팔 공산당과 네팔 회의당 등 주요 원내 양당들의 정치 갈등과 분열, 부정부패 등으로 네팔 국민들에게 논란과 비판이 많지만 그럼에도 현 정권의 정치인들보다 더 한 폭군으로 치부되어 국민 대다수의 민심이 여전히 좋지 않다.
또한 현재 네팔에서 고위층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공화주의 성향의 정치인들 상당수는 왕정복고와 갸넨드라 전 국왕의 구 왕가 재산 반환 주장에 대해 결사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만약 갸넨드라 전 국왕과 갸넨드라를 지지하는 근왕파 성향의 야당들이 네팔 국민들의 여론 수렴과 복벽에 대한 민주적인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공화제를 뒤엎고 왕정복고를 강행할 경우 다시 내전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저지하는 일이 있더라도 2008년 왕정 폐지 이후의 헌정체제를 수호하겠다고 천명하고 있다. 때문에 대다수 국민여론이나 정치권 주류 입장 모두 왕정에 부정적이기 때문에 왕정복고는 사실상 어려울 것으로 보여진다.
6. 가계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파라스 왕자 | 1971년 12월 30일 | 생존 ([age(1971-12-30)]세) | 히마니 라쟈 슬하 1남 2녀 |
1녀 | 프레라나 샤 싱 | 1978년 2월 20일 | 생존 ([age(1978-02-20)]세) | 쿠마르 라즈 바하두르 슬하 1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