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공수(公壽) / 수당(守堂) |
출생 | 1905년 9월 1일 |
전라남도 창평군 군내면 용수리 (현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용수리)[1] | |
사망 | 1981년 5월 29일 (향년 75세) |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 자택 | |
본관 | 제주 고씨[2]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1107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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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대학 교수.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고재필 전 보건사회부 장관은 그의 첫째 남동생이다.
2. 생애
고재천은 1905년 9월 1일 전라남도 창평군 군내면 용수리(현 담양군 창평면 용수리)에서 아버지 고광술(高光述, 1873. 4. 17 ~ 1945. 9. 16)과 어머니 경주 김씨(1870 ~ 1929. 7. 15) 김정엽(金正燁)의 딸 사이의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창평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진학했다.그는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6년 여름, 학우 10여 명과 함께 학교 뒷산인 여기산(麗妓山)에 모여 항일학생결사 건아단(健兒團)을 조직했다. 이들은 민족사회에 이바지하고자 농민대중을 계발하여 신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건아단을 조직했으며, 건아단 단원들은 농촌사회의 계발이 곧 독립운동의 기초가 된다고 보고 그들의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농민을 계몽 지도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들은 경기도 수원군 안룡면 고색리(현 수원시 권선구 고색동)를 비롯한 여러 마을에 농민야학을 설립하여 농민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1927년 9월 수학여행차 북도 지방에 갔던 그는 강원도 등지에서 일본인 소유의 대규모 농장을 목격하고 분노해 민족농장 건설의 꿈을 키웠다. 1928년 6월, 건아단은 당시 일본 도쿄에 설치되어있던 조선농우연맹(朝鮮農友聯盟)에 가입하고 조선농우연맹의 '조선인에 의한 조선농촌개발'이라는 주장에 찬동하여 이를 추진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같은 해에 조선농우연맹이 국내에서 지방강연 등 계몽활동을 할 때 연사로 참여한 수원고등농림학교 학생 한전종(韓典鍾)이 학교에서 무기정학을 당하자, 단원들은 정체를 숨기기 위해 단명을 계림농흥사(鷄林農興社)로 개칭 위장했다.
그런데 건아단 출신으로 김해공립농업학교에 교사로 근무하던 김성원(金聲遠)이 건아단의 목적을 수행하던 중 일본 경찰에 검거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계림농흥사는 1928년 여름 다시 조선개척사(朝鮮開拓社)로 조직을 개편하였으나, 사건이 확대됨에 따라 이들의 활동이 드러나게 되었고, 결국 그해 9월 고재천은 동지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고 18개월 동안 미결수로 구금되어 있으면서 모진 고문을 받다가, 1930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면소 판결을 받고 출옥하였다.
8.15 광복 후 전남대학교 교수로 재직해 농림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그 뒤 1981년 5월 29일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고재천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8년 10월 30일 당초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 선영에 안장되어 있던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했다.
3. 여담
- 고재천 본인은 독립유공자인 반면, 첫째 남동생 고재필은 아이러니하게도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 만주(관료) 부문에 등재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만주국 대동학원을 졸업하여 고등관시보로 근무하다가, 1941년 고등관고시 행정과 적격고시에 합격하여 사무관으로 승진하였던 전력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것으로 보인다.
- 장남 고우석(高友錫, 1926. 11. 11 ~ 1979. 7. 6)은 전북대학교 교수, 전라북도 교육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 농림대학 학장 재직 중이던 1961년, 선대의 고향인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에 있던 '대명매(大明梅)'를 전남대학교에 기증, 이식하였다. 이 '대명매'라는 매화나무는 11대조 월봉공(月峯公) 고부천(高傅川, 1578 ~ 1636)이 1624년(인조 2) 주문사(奏聞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 북경에 다녀왔을 때, 당시 황제 천계제로부터 하사받은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