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2-23 21:01:52

공자 영제


초(楚)의 영윤(令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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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楚)나라 왕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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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00> 자중
子重
최종직위 영윤(令尹)
미(羋)
목(穆)[1]
영제(嬰齊)
자중(子重)
아버지 초목왕(楚穆王) 웅상신(熊商臣)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기원전 570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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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춘추시대 초(楚)나라의 왕족. 목왕의 아들이자 장왕의 동생이다. 초나라 관직 중 가장 높은 영윤까지 올랐다. 자는 자중.

2. 생애

기원전 598년, 당시 좌윤(左尹)이었던 자중이 송나라를 공격했고 장왕은 연에서 기다렸다.

기원전 597년, 장왕이 정나라의 도성을 포위한 지 17일째였다. 정 양공이 항복하고 사직만은 멸하지 말아달라고 빈다. 좌우의 신하들[2]이 정나라를 취하고 용서해서는 안된다고 아뢰었지만 장왕은 화친을 허락한다.

정나라가 항복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진(晉)나라의 원군이 온다. 양군이 필에서 맞붙으니 이것이 바로 필 전투다. 자중은 좌군을 지휘했다. 전투에서 초군이 대승을 거둔다.

기원전 595년에 장왕이 신주(申舟)에게 제나라를 예방하게 하고 가는 길에 송나라한테 길을 빌리는 예를 취하지 말라고 명한다. 과거 신주는 송나라의 군주에게 모욕을 주었기 때문에 걱정하여 자신이 가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장왕은 "너를 죽이면 내가 송나라를 칠 것이다"라고 말한다. 결국 신주는 아들을 불러 왕을 접견하게 한 후 길을 떠난다.

예상대로 신주가 송나라 땅을 지나갈 때 송나라 사람들이 그를 제지하고 죽였다. 장왕이 그 소식을 듣고 소매를 떨쳐 일어나 노침 앞 뜰에 이르러서야 신발을 신었고 침문의 밖에서 검을 찼으며 포서의 거리에 도달한 후에야 전차에 올라탔다.[3] 결국 9월, 장왕이 군대를 이끌고 송나라의 도성을 포위한다.

해가 바뀌어 기원전 594년 5월, 아직도 초나라는 송나라의 도성을 포위 중이었다. 결국 초군은 포위를 풀고 송나라를 떠나려고 한다. 하지만 죽은 신주의 아들 신서가 왕의 말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아버지의 복수를 부탁하니 장왕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왕의 전차를 몰고 있던 신숙시(申叔時)는 '막사를 짓고 병사들이 밭을 갈며 지구전을 펼치면 송나라가 항복할 것'이라고 조언한다.[4] 초나라가 물러갈 낌새가 보이지 않자 송나라는 결국 항복하고 대부 화원이 인질이 되었다.

송나라의 항복을 얻고 퇴각한 후, 자중은 신申과 려呂의 일부 지역을 포상으로 줄 것을 요청하고 장왕이 수락한다. 이때 신공 무신은 '신과 려는 북방을 방어하기 위해 부세를 거두는 읍으로 자중이 일부를 취한다면 신과 려의 존재 이유가 없어지고 진(晉)나라와 정(鄭)나라가 한수까지 진격할 것'이라고 왕에게 아뢴다. 무신의 간언을 들은 장왕은 자중에게 포상을 주는 일을 중지했고 자중은 이 일 때문에 무신을 원망하게 된다.

기원전 591년, 노(魯)나라와 위(衛)나라가 진(晉)나라에 협력하여 제(齊)나라를 공격하자[5] 초나라의 영윤 자중이 군사를 일으켜 제나라를 구원한다.[6]

자중이 이렇게 말했다.
군주께서 연소하고[7] 신하들은 선대부들만 못하니 수가 많아야 승리할 수 있다. 『시』『대아·문왕』에 '인재가 많으니 문왕이 편안하셨다.'라고 말한다. 무릇 문왕조차 사람이 많았는데 하물며 우리 같은 사람들이랴? 또 선군 장왕께서 군주를 부탁하시며 '덕으로 멀리 감화시킬 수 없다면 백성에 은혜를 베풀어 잘 활용하는 것이 최상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어서 대대적인 호구조사를 진행하고, 부채를 탕감했으며, 혼자 사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궁핍한 자를 구제하고, 죄인을 사면했다. 왕의 근위대를 포함해 전군을 동원하여 위나라를 침략하고 이어서 노나라를 공격한다. 노나라는 맹헌자를 사자로 보내 목수, 여자 바느질공, 직공 등 백여 명을 데리고 가서 뇌물로 바치고 공형(公衡)을 인질로 바쳐 강화를 청하니 초나라가 이를 수락했다.

자중은 11월에 노 성공, 채 경공, 허 영공, 진秦 우대부 열, 송 화원, 진陳 공손녕, 위衛 손량부, 정鄭 공자 거질 그리고 제나라의 대부와 결맹한다.

기원전 585년, 정나라가 진나라를 따르자 자중은 정나라를 정벌한다.

기원전 584년 가을, 자중이 다시 정나라 정벌에 나선다. 제후들이 정나라를 구원하여 초나라는 운공(鄖公)이 사로잡히는 패배를 당한다. 정나라를 정벌하던 중 동쪽의 오나라가 초나라의 주래州來를 공격하자 자중은 급히 주래로 달려간다.

오나라가 갑자기 초나라의 변경을 공격할 정도 강해진 것은 신공 무신의 공이었다. 신공 무신이 하희[8]를 데리고 진나라로 도망가자 신공 무신에게 원한이 있던 자중과 자반은 무신의 일족을 죽이고 재산을 나눠 갖는다. 소식을 듣고 분노한 무신은 자중과 자반에게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겠다는 편지를 보내고 직접 오나라에 사신으로 가 중원의 선진 문물을 전수한다. 이때부터 오나라는 쉬지 않고 초나라를 방해하는 눈엣가시가 된다.

기원전 582년, 진(晉)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하자 자중은 진(陳)나라를 공격하여 정나라를 구원한다.
[1] 목왕의 아들이기 때문에 목씨라 불렸다.[2] 공양전에 의하면 자중을 지칭한다.[3] 매우 분노했다는 뜻이다.[4] 중국 사서에 나오는 최초의 둔전이다.[5] 진, 노, 위 연합군이 제나라와 싸운 안(案) 전투를 말한다.[6] 정확히 언제 영윤이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7] 초 장왕이 죽고 초 공왕이 어린 나이로 계승한 상황이다.[8] 하징서의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