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4-17 09:25:04

소양(전국시대)


초(楚)의 영윤(令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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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楚)나라 왕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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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00> 소양
昭陽
최종직위 영윤(令尹)
미(羋)
소(昭)
양(陽)
아버지 소해휼(昭奚恤)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기원전 ???년

1. 개요2. 기록
2.1. 《전국책》〈제책〉 115.靖郭君善齊貌辨2.2. 《전국책》〈제책〉 131.昭陽爲楚伐魏2.3. 《전국책》〈초책〉 171.五國約以伐齊2.4. 《전국책》〈초책〉 205.五國伐秦2.5. 《전국책》〈한책〉 400.襄陵之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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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춘추시대 초(楚)나라의 왕족. 회왕 시기의 영윤이다. 초나라의 거족 소(昭)씨 사람이며 고사 호가호위로 유명한 소해휼의 아들이다.

2. 기록

2.1. 《전국책》〈제책〉 115.靖郭君善齊貌辨

제모변이 선왕을 뵙자 왕이 말하였다.
“그대는 정곽군[1]이 무엇이든지 들어주는 아끼는 인물이라던데!”
제모변이 말하였다.
“저를 사랑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대왕께서 태자가 되셨을 때 제가 정곽군에게 '태자의 관상이 어질지 못합니다. 턱이 너무 크고 돼지눈처럼 보이니, 이런 얼굴은 신의를 배반합니다. 태자를 폐위시키고 다시 위희(衛姬)의 어린 아들 郊師[2]를 세우니만 못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정곽군께서는 울면서 '안 되오. 나는 차마 그렇게는 못하오'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제 말을 듣고 그렇게 했다면 오늘날 같은 환난은 틀림없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 하나의 예입니다.
또 설(薛) 땅에 이르자 초나라 소양(昭陽)이 몇 배의 땅으로 설 땅과 바꾸자는 제의를 해왔습니다.
저는 그때 '그 제의를 반드시 받아들이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정곽군께서 '설 땅은 선왕(先王)으로부터 받은 것인데, 비록 후왕(後王)이 나를 미워한다고 해도 그렇게 하면 장차 선왕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소!
게다가 선왕의 사당이 바로 이곳 설(薛)에 있는데[3] 내 어찌 선왕의 사당을 초나라에 넘겨 줄 수 있겠소!'라고 하면서 또다시 저의 의견을 듣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그 두 번째 예입니다.”

본 자료의 원문 및 번역은 전통문화연구회의 동양고전종합DB(http://db.juntong.or.kr)에서 인용된 내용입니다.

2.2. 《전국책》〈제책〉 131.昭陽爲楚伐魏

昭陽이 楚를 위하여 魏를 치다

昭陽이 楚나라를 위하여 魏나라를 쳐[4] 그 군대를 뒤엎고 장수를 죽여 8개 城을 얻고는 군대를 옮겨 齊나라를 공격하였다.
그러자 陳軫이 齊王의 使者가 되어 소양을 만나 재배하며 戰勝을 축하하고는 일어나 물었다.
“초나라의 법으로는 이렇게 破軍殺將의 큰 승리일 경우 어떤 官爵을 줍니까?”
소양이 말하였다.
“官은 上柱國을 주고, 爵은 上執珪가 됩니다.”
진진이 말하였다.
“그보다 더 높은 것은 무엇입니까?”
소양이 말하였다.
“오직 令尹이 있을 뿐이오.”
진진이 말하였다.
“영윤은 아주 귀한 자리이군요.
왕께서 두 명의 영윤을 둘 수 없을 것이니, 제가 그대를 위해 비유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楚나라에 어떤 제사를 지낸 사람이 그 舍人들에게 술 한 병을 내려 주자, 사인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여럿이 마시면 부족하고 혼자 마시면 남을 것이니, 청하건대 땅에 뱀을 그려 먼저 완성하는 자가 마시기로 하자’라고 하였습니다.
그 중 어떤 사람이 뱀을 먼저 그리고는, 술잔을 끌어당겨 마시려다가 왼손으로 술잔을 들고 오른손으로 뱀을 그리면서 ‘나는 뱀의 다리까지도 그릴 수가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직 다리를 다 그리지 못하였을 때, 그 다음 한 사람이 뱀을 다 그리고는 술잔을 빼앗으면서 ‘뱀은 본래 다리가 없다. 그대는 어찌 발까지 그렸는가?’하고는 마침내 그 술을 마셔 버려 결국 蛇足을 그린 자는 그 술을 마시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그대가 초나라의 재상으로서 위나라를 공격하여 破軍殺將하여 8개 성을 빼앗았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그 병력이 약해지지도 않았으며, 제나라를 치고자 하여 제나라가 그대를 매우 두려워하고 있으니, 공께서는 이 정도로 만족하게 여기셔야 하며, 더 이상 올라갈 관직도 없습니다. 이기지 못하는 싸움이 없으면서 그칠 줄 모르는 자는 몸은 죽고 관직도 뒷사람에게 빼앗기는 법이니, 이게 바로 蛇足을 그린 자와 같은 것입니다.”
昭陽은 그렇게 여겨 군대를 풀고 철수해 버렸다.

본 자료의 원문 및 번역은 전통문화연구회의 동양고전종합DB(http://db.juntong.or.kr)에서 인용된 내용입니다.

2.3. 《전국책》〈초책〉 171.五國約以伐齊

五國이 맹약하여 齊나라를 치다[5]

五國(燕‧趙‧魏‧韓‧秦)이 맹약하여 齊나라를 쳤다.
이때 昭陽이 楚王(頃襄王)에게 말하였다.
“다섯 나라가 제나라를 격파한 다음에는 반드시 남쪽으로 우리 초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왕이 물었다.
“그러면 어찌해야겠소?”
소양이 대답하였다.
“韓나라는 輔國[6]이어서 이익만 좋아하고 힘든 전쟁은 싫어합니다.
이익을 좋아하니 이익으로 유혹할 수 있으며, 전쟁을 싫어하니 위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후한 뇌물을 갖다 주어 이롭게 하면 유혹되게 할 수 있고, 우리가 병력을 모아 접근하면 틀림없이 우리를 두려워할 것입니다.
저들이 우리 병력을 두려워하고 우리의 후한 이익의 유혹에 넘어가면 다섯 나라의 일은 반드시 깨어질 것입니다.
그 맹약이 깨어진 후에는 韓나라에게 약속한 땅을 주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초왕이 말하였다.
“좋다.”
그리고는 大公事를 명하여 韓나라에 보냈다.
그는 공중치(公仲侈)[7]를 만나 이렇게 말하였다.
“무릇 지난번 牛闌의 전쟁과 馬陵의 싸움은 귀국 대왕께서 직접 보신 바입니다.
귀국 대왕이 진실로 五國의 起兵에 가담하지 않는다면 청컨대 5개 城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초나라 군사를 다 모아 齊나라를 공격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제나라가 趙나라와 魏나라를 배반한 뒤에 초나라는 과연 한나라에게 땅을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섯 나라의 동맹은 곤경에 빠지고 말았다.

본 자료의 원문 및 번역은 전통문화연구회의 동양고전종합DB(http://db.juntong.or.kr)에서 인용된 내용입니다.

2.4. 《전국책》〈초책〉 205.五國伐秦

다섯 나라가 秦나라를 치다

다섯 나라[8]가 진나라를 침벌하였는데, 위나라는 강화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위나라가 혜시를 초나라에 보내자 초나라는 혜시를 다시 진나라로 보내어 강화를 주선하도록 하였다.
초나라 두혁(杜赫)이 소양(昭陽)에게 말하였다.
“무릇 진나라를 치는 나라는 초나라입니다.
지금 혜시가 위나라로부터 우리에게 왔는데 公께서 이를 다시 진나라로 보내는 것은, 초나라가 진나라를 치고 있음을 밝혀 줌과 동시에 위나라가 강화하려고 한 사실을 믿게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공께서는 혜시의 말을 듣지 말고 몰래 사람을 보내 진나라와 강화하느니만 못합니다.”
소양이 말하였다.
“좋소.”
그리고는 혜시에게 말하였다.
“무릇 진나라를 공격하는 자는 위나라입니다.
지금 그대가 우리 초나라를 통해서 진나라와 강화를 하게 되면, 초나라는 그 이득을 보게 되지만 위나라는 원망을 듣게 됩니다.
그대는 돌아가시오.
내가 장차 사람을 보내어 위나라를 통해 강화하겠소.”
혜시가 귀국하자 위왕[9]이 기뻐하지 않았다.
그러자 두혁이 소양에게 말하였다.
“위나라가 그대를 위해서 먼저 싸움을 시작해서 군사를 반이나 잃고 초나라에 곤란을 호소하는 데도 들어주지 않고, 강화를 청하여도 성립시켜 주지 않다가 위나라가 입장을 바꾸어 齊나라와 秦나라와 연합하면 그대는 어떻게 구하겠습니까?
우리는 동으로 아직 월나라의 괴롭힘[10]이 있고, 북으로는 삼진(三晉)의 원조도 없으며 제나라나 진나라와의 외교도 확정되어 있지 않아 우리 초나라만 고립되게 되니, 화해를 서두르는 것만 못합니다.”
소양이 말하였다.
“좋소.”
그리고는 즉시 사람을 위나라에 보내어 진나라와 강화한 일을 고하였다.

본 자료의 원문 및 번역은 전통문화연구회의 동양고전종합DB(http://db.juntong.or.kr)에서 인용된 내용입니다.

2.5. 《전국책》〈한책〉 400.襄陵之役

양릉(襄陵)의 싸움

양릉의 싸움에서 畢長이 公叔에게 말하였다.
“무력을 쓰지 않으면 초나라‧위나라가 모두 공의 나라를 고맙게 생각할 것입니다.
무릇 초나라에서는 위나라 공자 고[11]를 태자로 세우려고, 틀림없이 위나라로 쳐들어갈 것입니다.
이때 공께서는 어찌 사람을 시켜 소양(昭陽)에게 ‘전쟁에 틀림없이 이기지 못하리라고 판단되면 그대를 위해 내가 군대를 일으켜 위나라로 출병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는 그대가 싸우지 말도록 말하는 것으로 그렇게 되면 태자와 소양, 그리고 梁王[12] 모두 그대를 고맙게 여길 것입니다.”

본 자료의 원문 및 번역은 전통문화연구회의 동양고전종합DB(http://db.juntong.or.kr)에서 인용된 내용입니다.

[1] 맹상군의 아버지 전영(田嬰)이다.[2] 위왕과 위희 사이에 난 왕자. 선왕의 이복동생.[3] 제 위왕 때부터 사당을 설(薛) 땅에 세웠다.[4] 기원전 323년의 일. 초 회왕이 소양을 시켜 위나라의 양릉(襄陵)을 공격하여 8개의 읍(邑)을 취하였다.[5] 악의가 제나라를 공격한 사건[6] 주모국이 아니고 추종하는 나라. 이때 제나라를 친 주모국은 燕나라임.[7] 韓나라의 재상.[8] 초楚‧한韓‧위魏‧조趙‧연燕의 다섯 나라. 《사기》 〈육국연표〉에 의하면 이 다섯 나라가 B.C.318년에 함께 진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9] 위양왕. 일설에는 위애왕이라고도 한다.[10] 이때 월나라는 초나라에 망한 지 10년이 넘었으나 그 후예들이 옛 월나라 땅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11] 초나라에서 위나라의 태자 사(嗣)를 폐하고 자신과 가까운 太子 高(咎)를 세울 것을 요구하였다.[12] 魏나라의 별칭이 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