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9 01:36:56

과수원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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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yrian_Reactor_Before_After.jpg

1. 개요2. 배경3. 폭격까지의 과정4. 작전 진행5. 외교적 수습6. 이후7. 기타

1. 개요

과수원 작전(Operation Orchard; מבצע בוסתן)은 2007년 9월 6일 자정에 이스라엘시리아가 비밀리에 건설 중이던 핵시설을 공습해 파괴한 작전이다. 폭격을 가한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폭격을 당한 시리아도 폭격 사실을 비밀로 했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가 2018년 이스라엘이 인정하면서 알려졌다.

2. 배경

2001년 모사드는 새로 대통령에 취임한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를 분석하던 중에 첨단 무기 거래와 관련된 북한 고위 관리의 방문 사실을 확인했다. 이스라엘의 군 정보국 아만은 이들이 핵무기를 논의했다고 의심했으나 모사드는 이를 부인했다. 이어서 2004년 봄 미국 정보당국은 시리아와 북한 간의 통신을 확인하고 추적하여 사막지대인 알-키바 지역에서 통신이 이루어진 것을 확인했고 모사드 다간 국장의 요청을 아리엘 샤론 당시 이스라엘 총리가 받아들여 특별예산을 배정해 이스라엘의 신호정보 담당 8200부대가 이 지역을 감시대상에 올렸다.

텔레그래프 지의 보도[1]에 따르면 2006년 12월 시리아의 원자력위원회 수장인 이브라힘 오스만이 런던에 가명으로 호텔 예약을 한 것을 알아낸 모사드는 런던에 암살부대 키돈과 잠입부대[2] 네비옷 소속을 포함해 10명 이상의 요원을 파견했다. 요원들은 세 팀으로 나뉘어 한 팀은 히스로 공항에서 그의 입국을 확인했고 한 팀은 그가 묵은 호텔에 방을 잡았으며 나머지 한 팀은 그의 동선과 그가 만나는 사람들을 감시했다.

이브라힘 오스만은 런던에 도착해서 첫날에는 시리아 대사관에 들러 하루종일 회의했고 둘째 날에는 공항으로 가기 전 쇼핑을 했는데 이때 네비옷 요원들이 그의 호텔에 침입해 노트북에 해킹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하드디스크의 내용을 복사했다. 그의 노트북에서는 알-키바 지역 시설의 설계도와 건설 과정을 찍은 사진들이 발견됐다. 모사드는 원래 이브라힘 오스만을 런던에서 바로 암살할 계획이었지만 그가 유용하다고 판단해서 일단 살려 두기로 결정하고 철수한다.

뉴요커 지의 보도[3]와 이스라엘 하레츠 지의 보도[4]에 따르면 이브라힘 오스만은 2007년 3월 IAEA 본부가 있는 오스트리아 에 방문해 회의에 참석했다. 이때도 모사드는 그의 아파트에 침입해 노트북 하드디스크 내용을 복사해갔는데 이번에는 여러 결정적인 사진들이 발견되었다. 건설 중인 핵반응로 사진들뿐만 아니라 북한의 핵 담당 관리인 전치부(Chon Chibu)와 이브라힘 오스만이 같이 찍은 사진까지 발견되었다. 즉 시리아가 북한의 도움을 받아 알-키바 지역에 핵무기 제조를 위한 핵시설을 건설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했다.

파일:Chon Chibu.jpg

왼쪽 사진에서 왼쪽이 전치부, 오른쪽이 이브라힘 오스만. 오른쪽 사진은 6자회담 때 찍힌 전치부의 모습.

2007년 4월 18일 미국 국방장관 로버트 게이츠가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이 정보가 공유되었으며 모사드 국장 다간도 곧 미국을 방문하여 부통령 딕 체니, CIA 국장 헤이든과 국가안보보좌관 스티브 해들리에게 내용을 직접 설명했다. 이에 부시 대통령에 의해 최고위 관료들로 이뤄진 극비 대응팀이 소집되었고 미국 정보기관들은 이스라엘의 정보를 다각도로 분석하여 이스라엘의 정보가 사실임을 확인했다. 북한은 핵 기술을[5], 이란은 10억 달러(약 1조원)의 자금을 지원했으며 이란의 지원 의도는 자체 핵 농축시설이 이스라엘 등의 방해로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국외의 백업 시설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3. 폭격까지의 과정

딕 체니 부통령은 이전부터 시리아와 북한의 핵개발 연관성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즉각 폭격을 주장했지만 부시 대통령은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허위 정보로 이라크 전쟁이 개전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과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군사적 개입을 꺼렸으며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이스라엘이 2006년에 헤즈볼라를 폭격한 일 때문에 이스라엘의 군사적 판단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녀는 폭격이 시리아, 헤즈볼라와 이스라엘의 전면전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고 북한을 포함한 6자회담과 중동평화회담을 둘 다 진행하고 있었으므로 더더욱 군사적 개입을 지지하지 않았다. 백악관 참모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중동에서 세번째 전쟁[6]을 시작할 리스크는 절대 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2007년 6월 19일 이스라엘 올메르트 총리가 백악관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하기 직전인 6월 17일에는 백악관에서 이 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최종 회의가 열렸다. 결론은 핵 시설이 확실하고 북한이 지어 준 것도 맞으나 핵무기를 만들기 위한 재처리 시설이나 미사일 개발 등 무기화 정황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선제폭격을 할 정도의 확신은 없다(low confidence)는 것이었다. 부시 대통령의 회고록에 따르면 6월 19일 정상회담에서 올메르트 총리는 폭격을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부시 대통령은 위와 같은 결론을 전달하며 "내 정보기관들이 핵무기 프로그램이라고 모두 일어나 주장하지 않는 이상, 주권 국가에 대한 공격이 정당화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올메르트 총리는 이후 저녁 만찬에서 최고위 관료들과 회동하면서 체니 부통령이 폭격을 주장한다는 것과 라이스 국무장관, 게이츠 국방장관, 해들리 국가안보보좌관 등 다른 대부분의 참모들은 폭격에 강력하게 반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7월 13일 아침 부시 대통령은 올메르트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시리아에 라이스 국무장관을 특사로 보내 핵무기 해체에 대한 최후통첩을 전달하고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감시 하에 해체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부시에 따르면 올메르트 총리는 미국이 외교적 해법을 추구하는 것에 꽤나 실망한 기색이었다. 올메르트 총리는 외교적 접근을 시작하면 시리아가 상황을 알게 되어 이스라엘이 공격할 수도 없게 되니 비밀을 지켜 달라고 했고 부시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동일한 사실과 리스크를 두고 두 국가가 정 반대의 결론을 내긴 했지만 미국측도 이스라엘의 포지션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다만 이스라엘은 미국이 직접 폭격해 주길 원했고 미국은 그럴 수 없었을 뿐이었다. 미국은 이스라엘이 직접 공격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동안 어떤 의견도 말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은 이를 직접 폭격에 대한 묵인으로 받아들였다.

모사드는 알 키바의 핵시설을 폭격하더라도 이를 공개하지 않으면 바샤르 알아사드도 이를 비밀로 하고 반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애초에 핵시설을 짓고 있었다는 것이 비밀이고 국제적 제재 대상이므로 폭격을 받더라도 대응하지 않고 조용히 핵시설의 존재를 숨기는 것이 유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시리아 정부 내에서도 핵시설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해서 비밀을 지키기 어렵지 않을 것이었고 셋째로는 이스라엘에게 핵시설을 파괴당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큰 망신을 당하는 것인데다 시리아 국내 여론에도 악영향을 주기 때문에 더더욱 비밀로 유지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이러한 결정에는 바샤르 알아사드가 집권한 뒤 이스라엘군의 의뢰로 그를 오랫동안 프로파일링 해 온 심리학자들이 관여했다. 그들이 분석한 바샤르 알아사드는 계산이 철저한 합리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폭격으로 핵시설을 파괴한 뒤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으면 그도 그럴 것이 분명했다.

4. 작전 진행

2007년 6월 이스라엘군 특수부대가 시리아 영내로 침투하여 알-키바 시설 주변의 토양 샘플을 채취하고 지형 정찰을 완료했다. 채취된 토양 샘플에서는 극미량(trace amount)의 플루토늄이 검출되었고 북한 영변 원자로 근처에서 채취된 토양 샘플[7] 속 플루토늄과 같은 것으로 분석되었다. 작전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하여 전자전으로 시리아 대공망을 무력화시킨 사이에 AGM-65 매버릭을 장비한 F-15I가 폭격을, F-16I가 대공 호위를 맡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파일:op orchard flight path.png

2007년 9월 6일 오후 10시 30분 이스라엘 공군 전술기들이 라맛 다비드 기지에서 출격해 터키 국경 근처의 시리아 Tal Abyad 레이더 기지로 향했다. 전자전기들이 재밍과 킬스위치로 레이더 시설을 무력화시키자 F-15I가 매버릭 미사일을 발사해 레이더를 파괴했고, 전자전으로 대공망이 마비된 시리아 영공으로 그대로 침투해 18분 후 알-키바의 핵시설을 매버릭 미사일과 500파운드 폭탄으로 완전히 파괴했다. 이후 튀르키예 쪽으로 빠져나가 튀르키예 영공을 지나 이스라엘로 복귀했다.

파일:al-kibar beforeafter.jpg

이 작전에서는 전자전의 역할이 핵심적이었다. 오시라크 원자로 공습 때와 같은 초고속 저공비행은 레이더를 피하기 위한 전술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상황에서, 전자전으로 방공망을 무력화시켜 무방비로 폭격을 성공시키는 모습을 통해 현대 전장에서 전자전의 중요성과 이스라엘의 전자전 능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또한 물리적 폭격에 수반되는 시설 파괴 및 사상자 발생을 피할 수 있어서 최대한 논란을 억제하고자 한 작전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도 적합했다.[8]사이버 전쟁의 모습도 보였는데 시리아 방공망이 악성코드에 감염돼서 꼼짝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이스라엘이 전자전에 이용한 킬스위치들은 일종의 백도어로, 미리 정해진 코드를 수신하면 전자회로의 기능이 정지되도록 만들어졌다. 이것은 칩 제조사들이 각국 정부의 요구에 따라 비밀리에 넣은 것이고 자국산 군사장비가 자국에 적대적으로 쓰이는 등의 상황을 통제하기 위한 용도다. 과수원 작전에서는 이스라엘이 미리 정보를 가지고 있다가 이 기능을 전자전에 사용했다.

5. 외교적 수습

이스라엘은 미국뿐 아니라 시리아와 관련된 주요 당사국들에게도 사전·사후에 접촉해 폭격 작전의 파장을 외교적으로 수습하기 위해 노력했다. 여러 나라와 강한 외교적 관계가 있는 주권국인 시리아를 전쟁 중이 아닌데도 군사적으로 공격하는 일은 상당한 무리수이기 때문에 꼭 필요한 일이었고, 작전의 목표상 국제적으로 일이 커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폭격 전 2007년 2월에 이스라엘 총리 에후드 올메르트는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총리를 튀르키예 앙카라에서 만나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에게 평화 회담을 제의해 달라고 부탁했다. 같은 해 4월 3일 바샤르 알아사드를 만난 에르도안은 그가 평화 회담을 하고자 한다고 올메르트 총리에게 회신했다.

이후 시리아의 핵개발 정보가 밝혀지면서 폭격이 진행되었고, 폭격 직후 올메르트 총리는 에르도안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바샤르 알아사드에게 메세지를 전달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스라엘은 시리아의 핵시설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지만 현재로선 더이상의 행동 계획은 없으며, 여전히 시리아와의 평화에 관심이 있고 시리아가 원한다면 이 일로 세계의 주의를 끌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폭격 후 복귀하는 과정에서 튀르키예 영공을 침범한 것에 대해 그럴 의도가 없었으며 튀르키예의 주권을 침해할 의도가 전혀 없다고 사과했다.

그리고 지역 내 우방국인 이집트와 요르단에도 전화를 걸어 똑같이 상황을 설명하고 그들에게 폭격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함구해 달라고 부탁했으며 이후 올메르트 총리가 직접 모스크바로 가서 러시아에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9]

폭격 2일 후 2007년 9월 8일 튀르키예 미디어들은 하타이 및 가지안텝 지역에서 발견된 이스라엘 공군기의 연료통을 보도했으며 튀르키예 외무장관은 영공 침범에 대해 이스라엘 특사에게 공식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미국의 딕 체니 부통령은 시리아의 핵 프로그램에 북한이 참여한 사건이기 때문에 사건의 전모를 공개하고 싶어했지만 북한과의 6자회담을 추진하던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이스라엘의 침묵 요청을 지지했고 사건은 비밀로 유지되었다.

2007년 10월 23일 올메르트 총리는 에르도안 총리를 런던에서 만나 다시 한 번 상황과 이유를 설명했다. 이 만남에서도 올메르트 총리는 에르도안 총리에게 시리아와의 평화회담을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으며 이에 알아사드가 동의하여 2008년 2월에 튀르키예 앙카라에서 평화회담이 시작되었지만 이 평화회담은 2008년 12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에 튀르키예와 시리아가 항의하면서 결렬되었다. 이스라엘에 따르면 평화회담 동안 양측은 알-키바 폭격에 대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폭격 몇 달 후 부시 대통령은 올메르트 총리에게 동의를 구한 다음 상원의원들에게 상황을 브리핑했다. 이때부터 작전의 상세 사항들이 조금씩 유출되어 뉴스 기사가 보도되기 시작했으며 의회 정보위원회 소속 의원들은 자신들에게까지 비밀로 했던 것에 크게 항의했다. 또한 북핵 관련 이슈가 심각한 상황이었음에도 시리아의 핵무기 개발에 북한이 직접 관여한 대형 사건을 비밀로 했다는 것에 대해 미 행정부 내에서 많은 논쟁이 있었다.

북한과의 핵 협정이 엄청난 논쟁을 일으키던 2008년 4월 미국 정부는 시리아 핵시설과 관련된 사진과 정보를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CIA는 이제 사건이 알려질 만큼 알려졌으므로 정보를 공개해도 알아사드가 이스라엘에 보복하거나 전쟁을 시작할 위험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스라엘은 격렬하게 반대했지만(fiercely objected) 미국은 북한과의 핵 협정에서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북한의 잘못을 공개할 필요가 있었다. 이 글에 포함된 북한 관리의 사진이나 폭격 전후의 모습 등은 이때 공개되었다.

6. 이후

2008년 4월 27일 바샤르 알아사드는 폭격받은 곳이 핵시설이냐는 질문을 받자 핵시설을 아무런 대공방어도 없이 개활지에 덜렁 지어 놓는 게 논리적으로 말이 되냐고 반문했다. 이것이 과수원 작전에 대한 그의 첫번째 공식 반응이었다. 시리아의 공식 입장은 이스라엘이 파괴한 것은 단순 군사시설(미사일 저장고)이었다는 것이다.

여러 뉴스 기사로 사건이 알려지고 IAEA의 현장사찰 요구가 거세지자 시리아는 입장을 바꿔 소수 인원의 현장 사찰을 허용했다. 2008년 6월 단 하루동안의 현장 사찰에서 IAEA 조사관들은 인공 우라늄과 흑연 성분을 발견했고 원자로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very likely)고 결론내렸다. 시리아는 폭격의 잔여물이라고 주장했다.

IAEA의 현장 사찰 때 조사관들을 안내한 것은 시리아군의 모하메드 술레이만 장군으로, 사실 그는 알-키바의 핵시설 건설을 애초부터 관리해 온 책임자였다. 오랜 기간 소련에서 교육을 받은 그는 조직관리, 물류관리, 보안에 천재적인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알아사드의 각종 비밀작전들[10]을 담당했으며 이 능력 덕에 초대형 프로젝트인 알-키바 핵시설도 오랫동안 철저히 비밀로 할 수 있었다. IAEA의 현장사찰 후 2달이 채 지나지 않은 2008년 8월 1일 술레이만 장군은 지중해를 바라보는 타르투스 항의 별장에서 저녁식사 중에 저격당해 사망했다. 2015년 스노든에 의해 공개된 NSA의 정보에 따르면 이것은 모사드와 이스라엘 해군 특수부대의 암살 작전이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

올메르트 총리는 2006년 레바논 전쟁으로 잃은 지지율을 회복하지 못했고 이후 비리 혐의 등으로 인해 2009년 2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2013년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외교 전문에 따르면 시리아 군은 공격받은 직후 화학탄두를 탑재한 장거리 미사일을 대기시켰으나 바샤르 알아사드는 이스라엘의 핵보복을 우려해 보복공격을 하지 않았다. 올메르트 총리는 나중에 미국 하원 소수당 원내대표 존 베이너와 만난 자리에서 이것은 상당한 자제력이 필요한 행동이며 알아사드는 조금도 어리석지 않다(not stupid at all)고 말했다. 술레이만 장군에 대해선 "엄청난 조직관리·물류 능력을 가진 쓰레기"(a piece of shit with extraordinary organizational and logistical abilities)라고 평했다.

2014년 ISIS는 알-키바 핵시설이 있었던 데이르에조르 지역을 손에 넣어 3년간 점령했다. 만약 과수원 작전이 없었다면 무기급 플루토늄과 핵무기 개발 시설이 ISIS의 손에 들어가는 대사건이었을 것이다.

2018년 4월 21일 이스라엘 정부는 공식적으로 과수원 작전을 인정하고 폭격 장면의 사진 등을 공개했다. 영상 링크

7. 기타

본 작전을 주제로 한 Shadow Strike(그림자 공습)라는 소설이 있다.
[1] 2011년 5월 18일[2] 집, 호텔, 대사관 등에 침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하는 역할이다.[3] 2012년 9월 17일[4] 2018년 3월 23일[5] 예를 들어 설계도는 영변과 동일한 북한식 가스냉각 흑연감속로(gas graphite reactor)였다.[6] 2001년 아프가니스탄, 2004년 이라크, 그리고 2007년 시리아[7] 위의 시리아 핵시설 정보는 국가정보원에도 공유되어 북한 핵시설 정보가 협조되었다.[8] John Toepher (2019) 미해군대학원 논문[9] 러시아는 지금도 시리아의 알아사드와 아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10] 이란이 제공한 대량의 무기를 몰래 헤즈볼라에 전달하는 일 등